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의 성으로도 알려진 남한산성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작금에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 연차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은 많은 구조물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총 길이는 11.76km에 달한다. 본성은 9.05km이며 옹성이 2.71km이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축성 때 승병들이 묵었던 9개소의 사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경사. 그 주차장 한편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본성에 11, 봉암성에 4,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비밀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적의 배후를 교란하거나, 식량을 은밀히 운반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장경사 암문이라고도 부르는 제1암문은 형태가 특이하다. 딴 암문들은 성곽을 돌출시키고 그 안에 암문을 숨겼지만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이 돌출되어 있지 않다. 성벽에 아취모양을 구성하고 그 안에 문을 달았다.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출부는 아래와 위 양편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이 암문은 작지만 두 짝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암문은 성벽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이곳은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주변의 성벽에는 몇 개의 수로가 나 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천정도 커다란 장대석을 이용해 덮었다. 암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경사로 통하게 되어있어, 비상시에는 많은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다산 정약용이 한 말이다. 다산은 신분타파를 위한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지난 날 드라마 이산에서 보이는 다산을 처음부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아마 다산의 그런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화성의 모든 축성과정을 그려내고 감독하는 소임을 맡았다. 화성을 축조할 때 다산은 서양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 결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축조에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다산은 대단한 학자요, 과학자였다. 이산에 다산이 처음 등장할 때 성균관 담을 넘는다거나,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허황된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장약용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최초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

 

요즈음 군인들이 도하작전을 할 때면, 강에 배를 연결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하작전이 다산이 최초로 사용을 하였다고 하면, 틀린 말이라고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 보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의 배다리인 주교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산을 다녀올 때 사용하였다.

 

당시 정조 이산은 1,779명의 문무백관, 나인, 호위군사 등과 함께, 779필의 말로 다리를 건넜다. 당시의 주교는 가로 4m, 세로 11m의 목선 나룻배 37척을 연결해 만들었다. 당시 이산의 능행차도에는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우리 기록문화의 최고봉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63쪽의 반차도(班次圖)는 기록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그림들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시 궁중 화원들이 그린 조선 최대의 기록화이다. 반차도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 화성문화재의 정조 능행차는 바로 이 반차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이론만 내세우는 인물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당시 서구에서 들어 온 서적은 거의 다 탐독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백성을 자신만큼 생각하는 정약용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외에도 탐구가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그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강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정조의 굳은 의지와, 애민사랑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화성은 정부와 행정, 그리고 학자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을 한 당대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될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으로 빗물 한 가족이 대지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 가족은 한반도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이곳에 떨어진 빗줄기는 그렇게 흘러 세 곳의 물길로 합류가 된다.

 

 

양대 강의 발원지 태백

 

강원도 태백의 해발 935m인 삼수령 마루에 적혀있는 글이다. 삼수령의 고개이름은 큰 피재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태백시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3대강이 발원하고, 민족의 척추인 태백산을 상징하는 삼수령이기도 하다. 태백에서 분출되는 낙동강은 남으로 흘러 영남 곡창의 질펀한 풍요를 점지하고, 공업입국의 공도들을 자리하게 했다.

 

한강 역시 동북서로 물길을 만들면서 한만족의 수도를 일깨우고, 부국의 기틀인 경인지역을 일으켜 세웠다. 오십천도 동으로 흘러 동해안 시대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삼수령 고개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남자 분은 이곳에 비가내리거나 눈이 내려 녹아 물이 흐르면, 남으로는 낙동강으로 스며들고, 동북으로는 한강으로 스며들며, 동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고 이야기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강의 발원이란 끊임없이 물이 나오는 곳을 그 발원지로 삼기 때문에 삼수령에 떨어지는 비가 발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떨어지는 비가 3대 강과 천으로 스며들어 그 물과 합류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삼수정에 오르다.

 

삼수령 분기점에는 탑이 서 있다. 해발과 이곳이 오십천과 한강, 낙동강의 시원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삼수령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이 삼수령은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길이다.

 

 

삼수령 탑이 서있는 곁에는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정자가 서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정자는 누각으로 지어졌는데, 삼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에 오르니 밑으로는 깊은 골이 보이고, 저 멀리 백두대간의 봉우리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깊은 숨을 쉬어본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상쾌하다.

 

누구라 이곳에 올라 글 하나 적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정자가 오래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면,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올라 글 몇 수 남겼을 만한 그러한 정취다. 나라도 글을 잘 쓴다면 짧은 글 한토막이라도 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런 시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참으로 역부족한 인사이니 어찌하랴. 능력이 없음을 탓할 수밖에.

 

 

삼수령은 차로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태백시내에서 이곳을 지나면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로 갈 수가 있고, 이곳을 넘어 태백으로 들어가면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를 만날 수가 있다. 삼수정 위에서 주변 경치를 돌아본다. 걸어서 이곳을 올랐다면 그대로 선계가 아닐까?

 

지금 이렇게 차로 오른 삼수령이 조금은 서운한 것은, 그런 옛 정취를 느낄 수 없어서인가 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삼수령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오늘도 하늘에서 내려선 가족들은 또 이렇게 세 곳으로 헤어져 물길을 만들려나?

아이들에게 소중한 물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

4대강, 물론 그 외에도 많은 강이 있다. 하지만 한강과 금강, 섬진강과 낙동강은 그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강들이다. 이 강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 강이 시작되는 발원지를 찾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아이들이 방학을 하게 된다. 올 겨울방학을 아이들과 함께, 뜻 깊은 4대강 발원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이 중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과,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거리이다. 뜬봉샘은 전북 장수에, 데미샘은 전북 진안에서 발원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는 같은 태백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에 나누어 돌아볼 수 있는 4대강 발원지로의 여행, 주말여행으로 추천한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에는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가 자리하고 있다. 검룡소 일대의 계곡은 아름다운 계곡과 지형 등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희귀한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오르는 냉천이, 하루 2천 톤 가량이나 용출된다. 사계절 9℃ 정도의 수온을 유지하고 있는 검룡소의 물은, 20m 이상 계단처럼 된 자연암반을 따라 폭포를 이루며 흐른다.

검룡소에는 재미난 전설이 전한다. 옛날에 용이 되려는 이무기 한 마리가 검룡소에 살았다. 이 이무기는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 이었는데, 용이 되려고 강줄기를 거슬러 이곳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이 이무기는 검룡소가 강 상류의 가장 위쪽 연못임을 확인하고, 연못에 들어가 용이 되기 위한 수업을 하였다고 한다. 검룡소 앞 바위에는 할퀸 모양의 자국이 나있는데, 이 자국은 이무기가 연못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생긴 자국이라 한다.



검룡소는 입구에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검룡소를 찾아간 것은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이었다. 눈길에 미끄러지며 찾아간 검룡소.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솟아오르는 물이 계곡을 따라 힘차게 흐른다. 검룡소 주변으로는 산짐승들이 물을 먹으로 온양, 발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다. 생명의 근원인 물은 그렇게 인간만이 아니고,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있다.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원신암 마을을 지나서 북쪽 오계치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1.19km 앞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해발 1,151m의 팔공산 북쪽 기슭을 흐르는 상추막이골에 자리한 데미샘. ‘데미’란 이 고을 말로 봉우리를 뜻하는 ‘더미’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데미샘 동쪽에 솟은 작은 봉우리를 동네 주민들은 천상데미(해발 1,080m)라 부르는데, 이는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의 원신암 마을을 지나서 북쪽 오계치를 향해 오르다가 보면,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이 1.19km 앞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해발 1,151m의 팔공산 북쪽 기슭을 흐르는 상추막이골에 자리한 데미샘. ‘데미’란 이 고을 말로 봉우리를 뜻하는 ‘더미’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데미샘 동쪽에 솟은 작은 봉우리를 동네 주민들은 천상데미(해발 1,080m)라 부르는데, 이는 섬진강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장수군 장수읍 수분 마을 뒷산인 신무산의 계곡을 따라 2.5km 올라가면,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이 있다. 뜬봉샘은 봉황이 날아올랐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뜬봉샘에는 조선의 개국조인 이성계와 얽힌 설화가 전한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얻기 위해 전국 명산의 산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으려고, 신무산에 올라 중턱에 단을 쌓고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백 일째 되는 날 새벽에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있는 단을 조금 벗어난 골짜기에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떠오르더니 그 무지개를 타고 봉황새가 하늘로 비상을 하는 것이었다. 봉황이 날아간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니 새 나라를 열라는 천지신명의 계시였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정신을 가다듬고 봉황이 날아간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풀숲에 덮인 옹달샘이 있었다. 이 옹달샘에서 봉황이 떴다고 하여 샘 이름을 ‘뜬봉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뜬봉샘이 바로 금강의 발원지이다. 수분마을에서 뜬봉샘까지 천천히 걸어올라 가는 길.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금강의 발원지도 볼 수 있는 뜬봉샘. 한 번쯤은 가볼만한 곳이다.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태백시 황지3동 시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둘레가 100m인 상지와 50m인 중지, 그리고 30m인 하지로 된 3개의 못으로 나뉘며 상지의 남쪽에는 깊이를 잴 수 없는 수굴이 있어 수원이 된다고 한다. 황지에서 분출되는 물의 량은 가뭄에도 변함없이, 하루에 약 5000톤 정도가 용출되며 수온 또한 상온 15도를 유지하고 있다.

황지는 고지도를 비롯한 <동국여지승람>, <택리지> 등 옛 문헌에 의하면.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동강의 근원으로서 관아에서 제전을 두어 가물 때는 기우제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심 한 복판에 발원지가 있다는 것도 색다르지만, 이 황지의 주변은 공원을 조성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고 있다. 황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황지는 원래 황부자가 살고 있던 집터로, 주인 황씨는 많은 재산을 지닌 부자였으나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자린고비였다. 어느 봄날 황부자는 외양간에서 쇠똥을 쳐내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남루한 노승이 시주를 청했다. 황부자는 시주하기를 거절했으나, 노승은 물러나지 않고 거듭 염불을 외며 시주를 청했다.

화가 치민 황부자는 쇠똥을 한가래 퍼서 시주바랑에 넣어주며 "이거나 받아가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승은 노하기는커녕 공손히 인사하고 돌아가는데, 마침 방아를 찧던 며느리가 이런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 몰래 쌀 한바가지를 퍼내어 노승에게 시주를 했다.

"이 집은 이미 운이 다 했으니 아기를 업고 속히 소승의 뒤를 따라오시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라고 이야기를 한 노승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며느리는 곧 노승의 뒤를 따랐다. 송이재를 넘어 구사리 산마루에 이르렀을 때, 뇌성벽력과 함께 땅이 갈라지는 소리에 놀란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리고 황부자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지금의 황지는 원래 황부자 집터였다고 하며, 상지는 집터, 중지는 방앗간, 하지는 측간자리라고 한다. 물론 전설이긴 하지만, 그런 내용을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여, 세상 살아가는 도리를 알려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주말여행. 4대강의 발원지가 어떨까?

여주장. 그냥 여주에 있는 장이 아니고, 500년 긴 성상을 한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여주 5일장에 대한 책이다. 2009년 10월 가을이 깊어갈 때부터 시작해, 2010년 6월 더위가 막바지로 치솟고 있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5일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가을부터 여름까지 4계절을 장에서 지낸 셈이다. 그렇다고 장돌뱅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다

여주는 전통 있는 고장이다.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여주는 예전부터 땅이 비옥하고 풍부한 농산물에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주변의 도시와는 달리 여주는 목(牧)을 둘 정도로 큰 도시에 해당했다. 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나루, 광나루와 함께 이포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이 중 여주에 이포와 조포가 있을 만큼 여주는 수운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이러한 여주의 5일장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된다. 그러나 아직 여주 5일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고 책을 쓰기위해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료라고 나온 것은 다만 몇 줄에 불과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었다. 9개월의 여주 5일장 순례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여주 5일장은 독립운동의 시원지

여주 5일장. 그냥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여주 5일장에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난 뒤, 여주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유림을 위시한 많은 여주사람들은 일제에 항거를 시작한다.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일본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여주장에 숨어들어 일본군 등 50여명을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주의 마을들이 일본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3, 1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13도 의병 총사령관을 여주 출신 이인영대장이 맡기도 했다. 결국 여주 5일장은 구국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주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

여주 5일장을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물론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외에도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세상 이야기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부부장꾼, 비가오나 눈이오나 제 자리를 지키면서 몇 명 안되는 단골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멀리 꿈을 안고 이국으로 와 피곤한 삶을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는 이주노동자들. 손톱이 다 뭉그러지도록 하루 종일 마늘을 까고 계시는 할머니. 대물림인 뻥튀기를 하는 어느 분의 이야기. 그 안에 삶의 모습이 있었다.



‘마을 사람은 장으로, 도독은 마을로’

5일장은 인정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말만 잘하면 그냥도 준다’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5일장으로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마을은 텅 비어버린다. 장으로 다 나가기 때문이다. 꼭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다. 5일 동안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친하지 않아도 친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5일장이다.

여주 5일장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접고 또 접었다. 한정된 페이지에 글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 중에서 이야기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많은 고민도 했다. 그 중 어느 이야기 하나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9개월의 작업 끝에 작은 책자 하나를 펴들었다. 『500년 세월의 여주 5일장』 비록 책은 볼품이 없지만 땀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주 5일장’ 책 안에는

이 책 안에는 5일장의 의미, 5일장의 역사, 5일장의 기능, 그리고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5일장 책을 집필하면서 느낀 한담을 적은 ‘강한루 마루에 땀을 식히다’로 되어 있다. 발품을 수도 없이 팔아 만들어 진 책이다.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 컬러사진 한 장 넣지 못했다. 한정판이기 때문에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줄 수도 없다.



21번째 쓰는 책이지만 이번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그만큼 다리품을 팔아야만 했다. 손이 얼어오고, 몸에서 쉰내가 날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손에 받아 든 책이다. 이것이 여주 5일장의 모두는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여주 5일장이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500년 세월의 여주5일장’

발행일 : 2010년 6월 25일
발  행 : 여주문화원
발행인 : 이 난 우
지은이 : 하 주 성
디자인 : 김 금 자
비매품, 한정판 158쪽

(주) 이 책은 비매품 한정판이므로 많은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혹 꼭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제 방명록에 비공개로 받으실 주소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6분께만 드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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