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장동 갤러리 고칸에서 아버지를 그리며 고래이야기 주제 전시

 

장안구 파장천로 56 두리야빌딩은 1층과 2층이 데일리라는 카페다. 이 카페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이곳이 카페인지 갤러리인지 구별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카페가 고칸(관장 임정민)’이라는 갤러리로 함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고칸을 찾아가려면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행정복지센터를 찾는 것이 가장 빠르다. 파장동 행정복지센터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2, 날씨가 쌀쌀하다. 고칸을 찾아 임정민 관장의 안내로 2층으로 올라갔다. 카페로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손님들이 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있다. 요즈음은 이런 카페들이 대세라고 한다. 작품을 관람할 수도 있고,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이조란 생각이다.

 

이곳 카페에서 121일부터 30일까지 전시를 하고 있는 정유정 작가. 차를 한 잔 놓고 마주앉았다. 이번에 12번째 개인전이라고 한다.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한 정유정 작가는 교사로 퇴직했다. 이번 정유정 작가의 그림 모티브는 고래다. “나의 고래는 그리운 아버지, 원대한 꿈, 신뢰, 사랑, 보호, 파워풀한 힘, 자연 그리고 자유를 위한 외침이며 치유다라고 하는 작가의 고향은 울산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삶의 고뇌를 담아 내

 

정유정 작가는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가정시정으로 인해 교육대학에 진학해 교사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림에 대한 열망을 놓을 수가 없어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그림을 전공했다. 그동안 정유정 작가는 국내외 그룹전에 100여회나 참가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현재 한국미협 이사, 안산미협 이사를 맡고 있는 작가는, 2011년 공무원미술대전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2013년 나혜석 미술대전 특별상, 2013년 국토환경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 외에 각종 공모전 등에 다수 입상한 경력이 있다. 그런 작가가 이번에 고칸에 전시된 작품들의 주제는 고래다.

 

어릴 적 아버지가 외항어선을 탔다는 정유정 작가는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세상을 떠났다며, 그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껏 바다를 누비는 고래를 주제로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카페 벽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의 다양한 고래 그림들은 작가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2018년 명예퇴직 후 오로지 작품에만 전념해

 

명예퇴직을 앞두고 이 다음에 내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작가는, 계속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미술대학원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작가의 작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래지 않은 시간에 12회라는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는가 보다.

 

작가는 고래를 모티브로 한 이번 작업은 치열한 경쟁의 삶과 차별속에 신음하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고뇌를 몽환적인 꿈의 모습으로 가시화하여 본성이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 즉 자연으로의 회귀, 자유로운 여행, 평화, 명상, 근본에의 끊임없는 질문, 생존 등을 뛰어넘어 남녀, 인종, 성소수자, 생태환경까지 모든 생명이 존경받는 세상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굳이 닫힌 공간이 아닌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카페라는 전시공간을 택해 초대전을 갖는 이번 정유정 작가는, 이번 전시회를 정해진 장소에서 전시를 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드나드는 카페라는 곳을 선택하면 그런 걱정을 피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우리의 전시가 몇몇 사람의 정해진 사람들을 위해 전시를 할 것이 아니라, 작가가 사람들에게 다가가 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롭게 우주공간을 마음껏 휘저으며 다니는 고래.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시간을 내어 정유정 작가의 초대전이 열리는 고칸을 찾아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겠다.

 

경매!’, 경매란 어떤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여럿일 때, 값을 제일 높게 부른 사람에게 팔거나, 또는 그러한 행위를 말한다. 경매는 대개 소장가치가 높은 골동품이나 미술품 등에서 많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꼭 소장가치가 높아야 경매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실생활에서 필요한 것들도 경매를 통해 사고팔기도 한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18-3에 소재한 수원 세향 옥션’. 경기도보건환경 연구원 옆에 자리하고 있다. 가 건물로 지어진 이 매장을 15일 오후에 찾아보았다. 오후 2시부터 이곳에서 골동품 경매가 이루어진다고 해서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이루어지는 경매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집가들과 판매상들이 모여든다. 그 인원이 많을 때는 100명이 넘어선다고 한다.

 

 

많은 제품이 진열되어 있는 세향 옥션 매장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골동품 경매장 세향 옥션. 시간이 되어가자 전국에서 모여 들었다는 차들이 도착한다. 저마다 오늘 경매에 붙일 물건들을 매장 안으로 나르기 바쁘다. 미리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고 있다. 참 꼼꼼하게도 물건들을 살핀다. 우리처럼 대충 훑어보는 것이 아니다.

 

지난 달 920일에 문을 열었다고 하는 이 골동품 경매장은 수원에 두 곳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물건 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지에서 건너 온 것들도 보인다. 골동품, 고 미술품, 근대 화가들의 작품, 기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나와 있다. 그것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희 매장에서는 골동품만이 아니라 근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들을 사고팝니다. 직접 경매인들이 물건을 들고 와 경매에 붙이기도 하지만, 저희들의 소장품 또한 판매를 하죠. 경매는 수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번을 합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경우에는 상설매장 운영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공경락 수원 세향 옥션 대표의 말이다. 이곳의 운영은 경매사인 박복만과 공동운영을 하고 있단다. 보통 경매는 전문경매인이 하기도 하지만, 물건을 가져 온 판매자들이 직접 경매를 할 수도 있다고.

 

 

자연스런 판매 분위기 조성해

 

세향 옥션의 경매방법은 수요일과 토요일이 차이가 난다. 수요일에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반품 없는 경매를 하며. 판매자가 직접 자신의 소장물품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토요일에는 사전에 경매물품을 등록하는 방법으로 진행이 되며, 물품의 예상금액과 물품의 설명을 출품자가 직접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출품의 점수는 20점을 원칙으로 한다.

 

기본적인 안이야 저희들이 정해놓았지만 꼭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가급적이면 자연스런 분위기로 경매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딱딱한 경매보다는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자는 것이죠.”

 

수요일과 토요일에 이루어지는 경매는 1부는 오후 2시부터 시작이 되고, 2부는 오후 6시부터 시작을 한단다. 또한 이곳 경매장에서는 고가의 물품이 나오거나. 판매자가 물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경우 감정까지 해주어, 판매자가 손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것.

 

 

저희들은 이곳에서 경매를 하지만, 꼭 저희가 그런 이익창출을 위해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매일에 전국에서 이곳을 찾아오시는 분들이 주변 식당 등을 이용해 지역 경제에 보탬을 줄 수 있고, 또한 경매가 없는 날에는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무상 임대해 많은 분들이 와서 구경도 하고 모임도 할 수 있도록 마련할 계획입니다.”

 

공경락 대표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경매시간이 되었다면서, 우선은 밖에 진열한 덩치가 큰 물건부터 먼저 경매에 들어가겠다고 발표를 한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을 갖고 나오면 매장에서 필요한 것은 적당한 값으로 매입을 하겠다고 하는 공경락 대표. 앞으로 이 골동품 경매장이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고, 지역의 문화예술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미륵당집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하던 곳이다. 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곳은 계획을 세워 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녔으니...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다.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잘 아신다는 분이 이렇게 알려주었으니, 주변만 맴돌 수밖에.

 

 

주변을 돌면서도 당집을 발견 못해

 

몇 번을 파장동 직원들과 통화를 하고 난 후에야 바로 눈앞에 있는 당집을 발견했으니, 답사를 하면서도 이런 경우는 또 생전 처음이다. 당집 앞으로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었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고 부르던 것을, 누군가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부른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굳게 닫힌 문, 까치발로 보다

 

그런데 문제는 미륵당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는 것이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이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미륵님 미륵님, 선이라도 보세요?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을 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을 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가 힘들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을 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향민을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다 마을을 떠난 듯하다. 매일 수백 대의 버스가 앞으로 지나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미륵당 석불. 그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모처럼 틈을 내어 찾아간 수원 파장동 미륵당 석불. 생긴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 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었다. 세월은 그렇게 영험한 미륵조차도 버려두는 것인지.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이 된 파장동 노송지대.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이곳이 요즈음 더럽혀진 주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전국 파워소셜러 팸투어 둘째 날에 지난 317일에 찾아간 노송지대에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효행기념관 부근 9, 삼풍가든 부근 21, 송정초등학교 부근 8)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이 자연경관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노송지대 주변 정비 아쉬워

 

이번 파워소셜러 팸투어에 찾아간 노송지대 주변은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주변이 어수선 해 이곳이 문화재 지역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문화재는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소나무 길 사이로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소나무의 생육에도 지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는 매연에는 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차량. 그리고 정리가 안 된 주변 환경. 정조대왕의 효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낯이 뜨겁다. 500주나 심었다는 소나무는, 당시에 심은 것들은 이제 겨우 40주 정도이다. 남은 소나무는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지금도 몇 그루의 나무는 생육이 좋은 편이 아니다. 파워소셜러들은 이구동성을 이야기들을 한다. 이곳의 차도를 변경하고 아스팔트를 걷어낸 후, 흙길로 조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소나무 주변에 모든 잡목을 옮겨, 소나무들을 온전히 괸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 가을 막걸리라도 부어 주어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에 소재한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훨씬 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처진소나무는 매년 봄, 가을에 운문사의 스님들이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리 주변에 뿌려준다. 그래서인가 항상 푸른빛을 띠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파장동 노송지대에 소재한 소나무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려줄 수 있는 귀한 나무들이다. 이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수원도 봄, 가을로 소나무에게 막걸리를 주는 날을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영양분을 빼앗겨버려, 제대로 생육하지 못하고 있는 노송지대의 소나무들.

 

 

더 이상 이 나무들이 주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5월과 10월 날을 정해, 믹걸리를 주는 날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런 행사 하나로도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이 더 잘 자라날 수 있으며, 이 행사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지대를 알릴 수도 있어, 모두에게 나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사람이 사는 안식처, 바로 집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집은 사실 우리들의 집은 아니다. 이웃과 소통이 막혀버린 꽁꽁 싸맨 그런 집들은 정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바로 우리 선조 때부터 살아온 ‘고택’이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200여 채가 넘는 고택을 둘러보았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카메라에 신경이 자꾸 쓰인다. 연신 뿌리는 빗방울을 닦아내도 금방 뿌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수원광주이씨월곡댁'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는 이 집은 '파장동 이병원가옥'이었다. 이렇게 명칭이 바뀌면 가끔 애를 먹기도 한다. 옛 이름을 갖고 찾아다니다가 엉뚱한 곳으로 길 안내를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월곡댁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데서 더 의미를 두는 집이다. 안채의 대청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조 고종 25년인 1888년(광서(光緖) 14년 견자(犬子) 3월 18일 유시(酉時))에 건축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남은 초가 한 채

 

이 집은 수원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들려보았던 집이다. 초가를 올린 집이라 지붕을 보수하고 있을 때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있다. 집은 안채를 둘러싼 담 밖으로 ― 자형의 헛간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파장동 월곡댁에 도착해 보니 도심 어디나 그러하듯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이리저리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가 할 수 없이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비는 계속 쏟아지는데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망설이야. 사람은 비를 맞아도 카메라만 맞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비를 맞고 월곡댁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안채와 바깥마당을 조금 떨어진 헛간채의 사이에도 몇 대의 차가 서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도 차를 대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차를 비켜서면서 사진을 찍어댄다.

 

사방이 트여있는 ― 자형의 헛간채

 

안채와 바깥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월곡댁은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다. 헛간채 남쪽으로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를 내었다. 헛간채는 넓은 5칸 정도로 꾸며졌다. 그 맨 끝에는 방으로 놓아 안채와 별도로 이곳에서 헛간채를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헛간채 앞에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헛간채는 방과 광 등으로 꾸며졌는데, 광문의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 아마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 듯하다.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담 안에 꾸며진 안채와 바깥채

 

원래 이 월곡댁의 집 뒤로는 낮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주변에는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집들이 답답할 정도로 들어차 있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초가 한 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바깥채에 달아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사진을 좀 찍겠다고 이야기를 한 후 안채를 둘러본다. 안채는 평범한 ㄱ 자형으로 부엌과 대청, 안방과 건넌방으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의 초가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안채의 구성은 동편의 끝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대청을 두고 있는 건넌방은 문밖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았다. 집은 그저 평범한 듯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안채의 부엌은 안마당으로 쪽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툇마루를 놓아 안방과의 연결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건넌방도 위아래 칸으로 나누어졌으며, 앞쪽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마 이렇게 부엌과 건넌방을 돌출시켜, 서해안에서 안채로 불어오는 바람을 최대한 막아낸 듯하다.

 

사랑채로 사용한 바깥채

 

월곡댁은 지정 당시 명칭이 '파장동이병원가옥'이었던 것이 바뀐 이유는, 소유자 이병원의 모친인 성주 도씨가 과거 안산군 월곡면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지은 가옥으로, '월곡댁'으로 불린 것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2007년 1월 29일자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바깥채는 사랑채의 용도로 쓰였다. ㄴ 자형의 바깥채는 꺾인 부분에 중문을 두고,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광과 방이 있다. 이 바깥채는 조금은 옛 모습에서 달라진 듯하다. 사랑채는 위아래 방을 안채와 직각이 되게 배치를 하고, 중문이 부엌을 향하게 하였으며, 마당 앞에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집을 지은 년대가 남아 있는 수원광주이씨월곡댁.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월곡댁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다. 정작 집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불편하겠지만, 이렇게 비가와도 찾아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고맙기 한이 없는 소중한 집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