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보산 무학사 태고종 대종사 혜성 큰스님을 뵙다

“저희 큰스님께서는 출가를 하신 후에 평생 남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시죠. 지금까지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살아 오셨습니다.”

칠보산 아래 금곡동 무학사 주지이신 혜성 큰스님. 스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뜸 ‘아! 그분’하고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1969년 태고종에 입문을 하신 후, 1969년 12월 칠보산 중턱에 무학사라는 절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남을 위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혜성 큰 스님의 이러한 남을 위한 삶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큰스님 어째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사시나요?”

참으로 큰스님께 드려서는 안 될 우문(愚問)을 드린 셈이다.

 

어려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아마도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것이 이유인 듯합니다. 조국의 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하게 되었죠.”

 

사실 알고 보면 이렇게 남을 위해 봉사를 하고,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는 것은 집안의 내력이다. 혜성 큰스님의 조부는 8,15 광복 후에 현 화성시 매송면(당시 수원군)의 초대 면장을 지내셨다. 1958년 당시 자비를 들여 어천수리조합이라는 것을 조성해, 수리조합장을 역임하면서 농민들에게 물을 대어주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갖고 있는 수만 평에 달하는 농토를 농민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송면, 남양면, 비봉면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분들은, 조부의 공을 기억하고 있다고. 조부의 뒤를 이어 부친도 3대 면장이었다고 한다. 부친 역시 남을 돕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셨다는 것. 어려서부터 그런 선조들의 삶을 보고 자라난 혜성 큰스님께서도, 자연이 남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손에 무엇을 쥐고 나오나요? 아니죠. 빈손으로 나옵니다. 본디 세상에 내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마치 내 것 인양 알고 있기 때문에 분란이 오고 화가 미치는 법이죠.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죠.”

 

100억대에 달하는 땅도 쾌척하신 혜성 큰스님

 

“큰스님,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그렇게 기부를 하셨습니까?”

질문마다 참 우문을 한다는 생각이다. 이미 혜성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을 뛰어넘어 피안에 살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그럼에도 속된 질문을 하고 말았다. 혜성 큰스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시면서

“본디 내 것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리고 그런 재산을 갖고 있으면, 이다음에 우리 문도들이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팔요 하신 분께 드려야 그 분들이 또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이죠.”

혜성 큰스님은 2012년에 1차로 시가 약 15억 원에 달하는 땅 3천 평을 사회에 헌납하셨다. 그리고 이어 남들이 금싸라기 땅이라고 하는, 시가 100억 원에 달하는 땅마저 노인복지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 때는 그렇게 큰 돈 인줄 몰랐어요. 기부를 하고보니 시세로 따져 그렇게 큰 금액이라는 겁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신 혜성큰스님은, 세상에 태어나 꼭 해야 할 일이 바로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하신다.

 

 

세 번이나 총무원장의 소임을 맡아

 

“우리 큰스님은 참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셨고, 입적하신 큰 스님들도 받지 못하는 대종사 칭호를 살아생전에 받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일은 모두 그동안 큰스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오셨는가를 알 수 있는 일이죠.”

한 자리에 앉아 대화를 하시던 처사님 한 분이 말씀을 하신다. 그런 말씀을 듣는 혜성 큰스님은 손 사례를 치신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몫을 다했을 뿐이죠. 제가 너무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기가 송구해, 몇 번을 고사를 하기도 했죠. 지금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혜성 큰스님은 1989년 대한불교 법상종 총무원장. 1989년 한일불교 문화교류 한국대표. 1991년 남북불교도 한국대표. 1995년 한국불교 미륵선종 총무원장. 1997년 한국불교 법왕종 총무원장. 2011년 대만국제불교 재승대회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셨다, 2013년에는 한국불교 태고종에서 큰스님들이 타계 후에야 받는다는 ‘대종사’ 칭호를 생존에 받으셨다.

 

 

30년 넘는 세월을 이어온 장학사업과 노인복지사업

 

혜성 큰스님께서는 남을 위하는 것이 몸에 배셨다. 198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학 사업을 하고 계시다. 언제나 소문 없이 하시기 때문에 아직도 큰스님의 소문이 나지 않고 있단다. 큰 스님의 장학 사업은 칠보초등학교를 비롯해 서호, 매송, 송라, 호매실, 탑동, 금호, 능실초등학교 등 졸업식 때만 되면 어김없이 이어지셨다. 미래에 이 나라를 짊어질 동량이 될 어린이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으신 것.

 

그런가하면 노인복지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계시다. 1980년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경노사업도 이어오고 계신 것. 매년 칠보초등학교 강당에 500~600명의 어르신들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시고 계시기도. 또한 (사)대한노인회 금호동 협의회 23개 회장단에게 월례회마다 점심식사대접을 하셨다. 그 외에도 45개 통장님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함께 지원을 하기도.

 

현재 혜성 큰스님께서는 사단법인 사회복지발전협의회 이사장님으로, 하루 24사간을 쪼개, 봉사 일에 전념을 하고 계시단다.

 

“큰스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법문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만나주신 스님께 법문을 부탁드렸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남에게 의지해서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은 수익 중, 단돈 1,000원이라도 남을 위해 쓸 수만 있다면, 굳이 복지라는 것을 정부에서 할 필요가 없죠. 그저 사람은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하기에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니 내려놓아야죠. 그 마음만 갖고 있다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대담을 마치고 포행을 나가시는 혜성 큰스님의 뒤로 바람 한 점이 따라간다. 아마 저 바람도 큰스님 마음이 닮고 싶었나보다.

 

칠보산 무학사. 초행길이라 낯이 설다. 무학사 큰스님이신 태고종 대종사이신 혜성스님을 찾아뵙기 위해 칠보산으로 향했다. 지도에는 칠봉산 전망대로 오르는 7번 등산로에 무학사가 있는 것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 갈림길인 학교 앞길로 들어서니, 이런 세상에. 길이 막혀있다.

 

다시 돌아서 여기저기를 헤매기 30여 분. 겨우 묻고 또 물어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포장도로인 숲길은 등산로인 듯하다. 걸어 오르면 딱 좋은 길을 약속시간 때문에 차를 몰고 오르려니 숲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저 자연 속에 그저 큰 호흡을 한 번 하고 걸어 오르면 좋았을 것을.

 

 

태고종 대종사 혜성스님이 출가하여 창건한 무학사

 

차로 비포장 숲길을 오르다가 보니 칠보산 무학사란 안내판이 보인다. 혜성스님이 1969년에 출가를 하여 태고종에 입문을 하신 후, 그 해 12월부터 이곳 칠보산 전망대가 있는 봉우리 중턱에 무학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비탈을 정비해 전각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크지 않은 전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무학사는 아직도 불사중이다. 작은 중장비 한 대가 경내에 서 있고, 불사를 하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종무소를 찾아가보아도 기척이 없다. 전각 여기저기를 돌아보지만, 어느 곳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경내에 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어디 출타 중인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경내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산을 깎아 작은 전각들을 여기저기 마련한 까닭에 전각들이 크지 않다. 절이 중심인 대웅전이라야 정면 두 칸이다. 견성문을 들어서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목 좌측에는 토굴법당 입구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대웅전이 서 있다. 대웅전 옆으로는 살창을 낸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또 관세음보살을 모신 듯하다.

 

일제 때 조성한 채광 굴에 마련한 토굴법당

 

대웅전 뒤편으로는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라 산신각을 돌아본다. 그리고 산신각 뒤편을 보니 커다란 바위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자연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얼마의 세월을 저렇게 바위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것일까?

 

갑자기 사람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난다. 칠보산 등산로 중 한 곳인 무학사 아래편에 마련된 쉼터에 4~5명의 여자들이 피곤한 다리를 쉬며 떠들고 있는 중이다. 참 교양머리 없다는 생각을 한다. 참선을 하는 도량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으니 말이다.

 

 

산신각을 내려와 대웅전 곁에 있는 토굴법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갑자기 한 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할 만한 서늘한 바람이 굴에서 불어온다. 바닥은 습기가 있어 축축하다. 머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세 분의 부처님을 굴 안에 모셔놓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토굴법당은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철을 캐느라 뚫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자연 속에 머무는 절 무학사

 

혜성스님은 이 채광 굴을 토굴법당으로 마련하고자 몇 년간을 더 파냈다고 하신다. 그리다가 이곳에서 물길이 터져 관을 묻고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여기를 토굴법당으로 조성했는데 물이 흘러 질척거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수관을 묻었더니 기껏 파놓은 천정이 다시 낮아진 거예요. 그래서 다시 몸을 낮추고 드나들었죠. 아마도 부처님의 뜻인가 봐요. 겸손하게 살라는”

 

 

이곳 말고도 또 한 곳의 토굴법당이 있다. 한참을 그렇게 경내를 돌아보아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동행을 한 일행인 그 밑에 기척이 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계세요?’를 외치고 나서야 겨우 대답소리가 난다. 무더운 여름날 낮잠이라고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큰스님을 뵈러왔다고 하니, 여긴 윗절이고 아래편에 큰절로 가보란다. 큰스님은 그곳에 계시다고.

 

길을 물어 힘겹게 찾아온 칠보산 무학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바빠 미처 느끼지 못하고 오르던 숲길이 정말 좋다. ‘시간을 내어 이 비포장숲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리라’. 속으로 생각을 한다. 아마 이 칠보산 무학사에서 또 다른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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