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수원에는 모두 67점의 문화재가 소장한다. 이 중 국가지정 보물이 모두 11점으로, 보물 제14호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와 수원화성 화서문, 팔달문,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이 속해있다. 국가 사적은 3점으로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 사적 115호 화령전, 사적 제478호 수원화성행궁 등 3점이다.

 

국가민속문화재는 장안구 파장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소재한 제123호 수원광주이씨 고택이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는 제69인 팔달문 동종(수원박물관) 26점이 있다.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는 제8호인 승무·살풀이춤 등 4, 경기도기념물은 제19호 노송지대 등 8점이 소재한다. 경기도문화재자료는 제1호 수원향교를 비롯해 모두 8점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에 생성·건축된 유물 및 유적이 중점적으로 등재되어 있는 등록문화재는 모두 6점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팔달구 교동 741에 소재한 구 수원문화원 건물과, 등록문화재 제598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달구 매산로 119(교동, 가족여성회관)에 소재한 구 수원시청사 등이 있다.

 

이중 불교관련문화재는 보물 제14호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재151호 봉녕사 석조삼존불, 152호 봉녕사 불화와 제221호 수원청년암 영산회상도, 경기도기념물 제225호 수원창성사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46호 수원청년암 아미타회상도, 147호 수원 청년암 신중도, 148호 수원 청년암 독성도, 149호 수원 청년암 산신도, 150호 수원 청년암 칠성도 등이 10점의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다.

 

 

불교문화재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여행

 

항상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느끼는 점이지만 의미없는 여행은 그만두라고 권하고 싶다. 요즈음 사람들은 기동력이 좋기 때문에 차를 몰고 어디든지 돌아보기 편하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 없이 떠난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이 얼마나 오래 기억에 남아있을까? 여행은 다녀온 후 10년이 지나도 그 당시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하기에 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주제를 정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테마로 인근에 있는 관광명소를 돌아보면(그곳이 문화재가 되었던지 명소가 되었던지) 후일 정리하기도 좋고, 테마가 있는 여행이기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수원여행을 하면서 경치가 좋은 곳이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을 여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한 가지 테마를 정해 돌아보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 하기에 수원에 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유산 중에 불교와 관련이 있는 곳을 돌아보기를 권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나 수원시청 홈페이지를 들려보면 자료는 충분하다.

 

 

보물 진국국사 탑비와 봉녕사, 청년암 등 하루에 돌아볼 수 있어

 

13, 일찍 길을 니섰다. 방화수류정을 오르는 길로 들어서면 삼일상업고등학교로 오르는 도로 좌측에 진각국사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진각국사탑비는 원래 광교산 창성사 터에 있었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현 위치인 방화수류정 인근으로 옮겼다.

 

탑비를 돌아본 후에는 인근 우만동에 소재한 봉녕사를 찾아가면 여행 동선이 편해진다.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중기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상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조성하였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삼존불 모두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봉녕사의 중심인 대적광전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약사보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약사보전에는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봉녕사 불화 2점이 일괄 지정되어 있다. 약사보전에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는 바로 신중탱화와 현왕탱화이다. 봉녕사를 돌아본 후 조원동 광교산 자락에 위치한 청년암을 찾아보는 동선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청련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조선 정조 1년인 1777년에 비구니 청련이 심낙서 등의 시주를 얻어 창건한 사찰로, 1902년 영친왕의 생모인 엄비가 중창하였다. 청련암에는 여러 조선후기의 불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세 곳의 불교 관련 문화재를 돌아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차를 이용한다면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진각국사탑비를 제외한 봉녕사 불교문화재나 청련암 불화 등을 촬영하려면 반드시 먼저 종무실을 찾아들어가 촬영을 하겠다고 승낙을 받아야 한다. 요즈음 불교문화재 훼손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모든 전각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 테마가 있는 수원여행, 더 날이 추워지기 전에 한 바퀴 돌아보기를 권한다.

 

한 때는 광교산 89개소 암자의 본사 노릇을 하던 절이 있었다. 바로 진각국사(1307~1376)가 광교산에 창건한 창성사라는 절이다. 이 절을 건립하고 난 뒤 수많은 사람들이 광교산으로 모여들었다. 광교산(光敎山)고려야사에 의하면 원래 이름이 광옥산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광교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옥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었는데,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았다고. 이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光敎)’라고 하였으며, 그 뒤 이 산에 수많은 사암(寺庵)들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구름에 쌓인 광교산 청련암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더니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걸망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기로 했던 날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뿌리는 빗방울이 영 길을 떠나기에는 적당치가 않은 듯하다. 그렇다고 무료하게 맥을 놓고 있자니 그도 답답하다. 산을 오르자니 길이 많이 젖어 잇을 것 같아 청련암으로 향했다.

 

광교산 청련암.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청련암은 도심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산 중에 들어선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절이다. 진각국사가 광교산에 창성사를 창건하면서 청련암은 창성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그러한 청련암이 퇴락하여 빈 터만 남아있던 것을 비구니 창건주인 청련스님이 정조 1년인 1777년 절을 짓고 청련암으로 사명을 붙였다.

 

 

영친왕 이은을 잉태하게 만든 절 청련암

 

청련암이 유명한 것은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가 이곳 청련암 봉향각 건물에서 기거하면서 칠성각에 기도하여 영친왕 이은을 잉태한 곳이기 때문이다. 영친왕 이은은 조선의 마지막 황테자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인해 청련암을 새롭게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6일 아침 일찌감치 청련암을 찾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날이 잔뜩 흐리다. 일주문을 들어서 환희루 계단을 오른다. 환희루는 범종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우란분절에 사용할 영가 등이 걸려있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후 종무소를 찾아들었다. 절에 모셔진 탱화를 촬영하고 싶어서였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려본다고 하더니 허락을 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실내는 촬영을 금한다고 하여 전각의 외부만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474-1 광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지만, 주변으로는 아파트와 주거 밀집 지역이다.

 

비안개에 쌓인 청련암을 돌아보다

 

광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청년암은 경내에 숨죽인 고요함이 발소리조차 조심하게 만든다. 귀비 엄씨가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드렸다는 칠성각 앞으로 다가선다. 손을 모아 합장을 한 후 생각을 해본다. 이곳 청련암도 어찌 보면 역사의 아픈 현장인지도 모르겠다.

 

 

나라가 더 오래 지속이 되었다면 영친왕 이은이 왕위에 올랐을 태고, 그렇다면 청련암을 지금보다 몇 배 더 큰 사찰로 중창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저 역사란 지금 이대로 떡 그만큼만 만드는 것인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상광교에서 올랐던 창성사지가 그랬고, 광교산 여기저기에 곳곳에 찾아볼 수 있는 절터들이 그랬다. 한세상을 풍미하던 많은 선사들이 기거를 했지만,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많은 암자들. 세상이란 내로랄 것도 없고, 집착을 할 것도 없는 곳이라고 했던가? 내일은 광교산 창성사지를 다시 올라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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