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1-1, 합천 해인사를 들어서다가 보면 좌측으로 탑과 비 등이 서 있다.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이 유물 중 유난히 눈에 띠는 탑이 한 기 서 있다. ‘길상탑’이라 하는 탑이다. 이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로 짜인 이 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것으로, 부처님과 동일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길상탑은 그런 용도로 세우진 것이 아니다. 길상탑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세워진 것일까?


1966년 탑에서 나온 복장물로 밝혀진 탑의 내용

길상탑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아오던 탑과는 다르다. 신라 때의 탑이면서도 크기가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현재 보물 제124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길상탑은,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 해인사에 거주하던 훈혁스님이 조성을 했다고 한다. 벌써 이 탑을 세운지가 1,120년 가까이 된 고탑이다.

1966년 길상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을 하고 있다. 탑에서는 작은 157개의 소탑과 함께 탑에 대한 기록을 적은 ‘탑지(塔誌)’가 발견이 되었는데, 모두 4장으로 된 이 탑지는 당시 신라의 대문호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탑지의 내용을 보면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서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축조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탑 옆에 그 내용 중 일부라도 적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이렇게 탑의 외형만 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어떻게 길상탑의 탑지를 쓸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서울(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라고 적고 있다. 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진골이 아닌 육두품임을 뜻한다.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으로 당시 신라의 진골제도로 인해 출세를 하지 못하게 되자, 당으로 유학을 떠난다.

12세에 당으로 건너간 최치원은 유학 6년 만인 18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당에서 관직을 두루 거치던 최치원은 늘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그의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는지 가늠이 간다.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 삼경에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외로운 마음 고향을 달리네.
(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신라로 돌아 온 최치원은 당에서 배운 정치와 행정경험을 토대로 신라를 개혁하려 했다. 그러나 진골세력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은둔의 길을 택했다. 40여 살 장년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경주 남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방랑을 하던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 들어온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치가 않다. 다만 해인사에 최치원이 거닐던 ‘학사대’ 등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그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진성여왕 8년인 895년에는 최치원이 합천 해인사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 마침 도적의 무리가 보물을 갈취하려고 하자, 스님들이 보물을 지키겠다고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이를 보고 탑지를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적은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단아한 자태를 보이는 길상탑

길상탑은 신라 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모두 다 없어진 상태로, 현재는 석재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크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인 옥개석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쌓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은 형식이다. 위층의 기단은 하나의 돌로 조성을 해, 다른 탑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로 조성이 되어있다. 몸돌이 기단부보다 갑자기 좁아져 균형이 깨어진 듯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스님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해인사 길상탑. 어쩌면 그 안에서 나온 유물들이 있어 더욱 귀하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길가에 서서 해인사를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길상탑의 탑지를 적은 최치원은 이 시대를 동경하고 있지나 않을까? 정작 주인인 스님들보다 최치원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학사대에 꽂힌 지팡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6월 18일 토요일, 아침 일찍 남원을 출발하여 전북 순창과 전남 담양의 문화재 답사에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서부터 공사중이라 헛걸음을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려운 답사. 길도 없는 산길을 몇 번이고 올라야 했던 답사 길. 오늘처럼 힘들게 답사를 한 날은 아마도 없었던 것만 같다.

순창이나 담양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담양의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보물 제111호 개선사지 석등. 담양군 남면 학선리에 소재한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석등이다. 이 석등을 담양에서 찾아가려면 광주호를 끼고 돌기 때문에, 광주광역시를 거쳐야만 찾아갈 수가 있다.


진성여왕이 공주였을 때 주관을 하다

일제시대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에 보면, 이 석등의 간주석 부분까지 묻힌 채로 있었다. 1960년에 간행된 『국보도록(國寶圖錄)』에는 이미 지대석 부근까지 드러나 있고, 그 후 1965년에 주변을 정리하면서 석등의 묻혔던 부분을 파내고, 이를 노출시켰다고 한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재관리국의 고증을 받아 지대석과 하대석, 간주석 일부를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는 복원공사를 하였다.

이 개선사지 석등은 고복형 석등이다. 간주석이 장고통 형태로 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팔각형을 기본으로 삼는 개선사지 석등의 높이는 3.5m이다.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하대석을 올렸는데, 이는 1992년에 새로운 석재로 교체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의 복련은 복판팔엽의 양련으로 새겨 넣어 하대석의 복련과 대칭을 이룬다.




상대갑석 위에는 둥그런 굄을 마련하였고, 팔각으로 된 화사석은 각 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내어놓았다. 화사석의 간주 양쪽을 이용하여 석등을 만들게 된 내력을 적은 ’조등기’를 음각하였다. 이 조등기에 보면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등기의 기록으로 제작 년대를 알 수 있는 석등

개산사지 석등은 그 세운 년대가 신라 때로 확실하다는 점과, 그 석등을 세우게 된 내력을 간주에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를 받고 있다. 팔각지붕의 마루 끝에 귀꽃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깨져버리고 한 면의 귀꽃만 남아있다. 옥개석 정상은 상륜 받침을 놓고 앙화, 보륜, 보주 등의 상륜부를 차례로 놓았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이 개산사지 석등의 조등기는, 한 기둥에 각기 두 줄씩 기록되어 있다. 1행부터 6행까지는 경문왕과 왕비, 공주가 석등을 만들기를 주관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7행부터 10행까지의 내용은 이 사찰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을 적어 놓았다.

이 ’조등기’에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어 석등의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데 1행에서 6행까지는 함통 9년인 868년이, 7행부터 10행까지는 용기 3년인 891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조등기’는 총 10행 136자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景文大王主 ② 文懿皇后主大郞主願石燈 ③ 炷唐咸通九年戊子中春夕 ④ 繼月光前國子監卿沙干金 ⑤ 中庸途上油糧業租三百碩 ⑥ 僧靈(判 ?) 建立石燈 ⑦ 龍紀三年辛亥十月日僧入雲京租 ⑧ 一百碩烏乎比所里公書俊休二人 ⑨ 常買其分石保坪大業渚沓四結 五畦 ⑩ 東令行土北同 奧沓十結 八 東令行土西北同 上南池宅土西川 畦 上南池宅土

「경문대왕과 문의황후, 그리고 큰 공주님(후에 진성여왕)께서는 불을 밝힐 석등을 세우기를 바라셨다. 함통 9년(경문왕 7년, 868) 무자해 음력 2월 저녁에 달빛을 잇고자 전임 국자감경인 사간 김중용이 (등을 밝힐) 기름의 경비로 3백 석을 날라 오니, 승려 영판(?)이 석등을 건립하였다. 용기 3년(실은 대순(大順) 2년, 진성여왕 5년(891) 신해년 10월 어느 날 승려 입운은 서울에서 보내준 조 1백 석으로 오호비소리의 공서와 준휴에게서 그 몫의 석보평대업에 있는 물가에 있는 논 4결과 물가로부터 멀리 있는 논 10결을 영구히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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