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공존을 하고 있다. 이런 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다. 15일 일찍 오산을 찾았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보고 난 후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성한 오산금암리 지석묘군을 찾아보았다.

 

이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 일대는 주변에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도로가 뚫려있지만, 아파트까지 인 듯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돌 공원이라고 명명한 공원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누구나 돌아보기 좋게 조성을 하였다.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이곳을 나와 한 바퀴 돌아보고 갑니다. 공기도 좋고 아이에게 잘 모르는 것이지만 자료를 보고라도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기도 하죠. 우선은 역사적인 곳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뒤편 휴먼시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아무개(, 38)씨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 하는 말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돌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고인돌공원

 

고인돌을 촬영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낮은 목책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아 밖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개석식 고인돌이라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촬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작 외형만 촬영을 할 것을 안으로 들어가 공원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사람들을 그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공원을 와도 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가 무슨 큰일이나 치르는 양 덮개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꼭 저렇게 촬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왔을 때는 모두 11기의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덮개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9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여기저기 만들어진 정자, 그리고 수로와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경관 등 참 좋은 공원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오산 금암동 고인돌공원.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원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이 공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지석묘군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 혹 이 바위로 인해 금암리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서면서 초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오마이뉴스)

지난 해 처음으로 파워 소셜러 수원 12일 팸투어를 하고 난 후, 상당히 효과를 보았다. 결국 그러한 글들이 모여 KBS-2TV’12까지 수원을 찾은 결과를 나았으니. 12일의 홍보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화성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늘었는가 하면, 화성행궁의 입장객들도 매주 갈아치우니 말이다.

 

거기다가 재래시장까지 더불어 호황을 맞고 있다. 지동 순대타운은 주말은 물론, 일요일까지 사람들도 북적이고 있다. 그런 여세를 더 끌고 가자는 생각이 바로, 이번 3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수원에서 다시 팸투어를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 해 다음에 치우쳐 있던 블로거들을, 네이버 블로거들을 늘려 양쪽에서 모두 검색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팸투어 첫번째 방문지인 팔달산 고인돌군과 화성 축성시 돌을 떼어낸 부석소. 부석소에 모여있는 팸투어 관련자들.(위) 돌을 떼어낸 흔적을 촬영하고 있는 보라미랑님(아래)

 

지난해와는 다른 올해 팸투어

 

이번에 파워소셜러로 초대를 한 블로거들은 참교육님(김용택), 보라미랑님(장유근), 한사님(정덕수), 김천령님(김종길), 지우재님(김원주) 등과 네이버에서 여행블로거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갠디님(최명희), 행복물결님(박금화), 마리안님(안명희), 초희님(조윤희) 등이었다. 12일의 수원 팸투어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주최하고 수원시가 후원을 한 이번 파워소셜러 팸투어는, 지난해와는 다르게 작은 것 하나라도 더 보여주자고 노력했다. 팔달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부터, 화성을 쌓을 때 돌을 떼어낸 흔적이 있는 부석소. 그리고 화성의 안이 아닌 소나무가 우거진 성 밖을 돌면서 화성의 이모저모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걷고, 찍고, 또 걷고..... 지난해와는 반대로 돌아 본 화성관람 

 

과거 정조시대 쌓은 화성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서삼치 곁에서 성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서남암문과 용도를 거쳐 화양루까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화성을 신을 모신 성신사를 거쳐 행궁까지 두 시간 정도를 걸어, 행궁 앞에서 오후 3시에 시작하는 무예24기 관람을 시작했다.

 

이번 무에24기 시연을 할 때는 블로거들을 중앙 앞자리에 앉아서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행궁 안으로 들어가 10곳에 있는 스탬프 찍기도 하는 등 재미도 더해주었다. 특히 가장 먼저 다 찍어 온 두 사람에게는 수원문화재단 라수홍 이사장이 직접 기념품을 건네주기도 하였다.

 

행궁 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를 관람하는 블러거들. 특별히 사진을 찍기위해 앞자리를 마련했다

 

야경에 정신 빼앗긴 블로거들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블로거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40분 정도.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시장 구경에 재미를 붙였단다. 크지 않은 시장인데도 갖가지 물건들이 있어서 좋았다고 다시 시간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제일교회 노을빛 전망대에서 바라본 수원. 그저 이렇게 재미있는 팸투어는 처음이라고 한다.

 

저녁을 마친 후 돌아본 방화수류정의 야경. 네이버 여행 블로거들인 4명의 여인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사진을 찍어댄다.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배정된 숙소인 수원유스텔. 라비에 있는 안내판에서는 블러거들을 환영한다고 나온다. 그것을 보고 정말 수원의 팸투어는 딴 곳과는 비교를 할 수 없다고 한 마디씩 한다.

 

 

스탬프 찍기를 마친 종이와(위) 수원문화재단 이사장실에 모인 블로거들과(가운데) 라수홍 수원문화재단 이사장 

 

하루 종일 일정을 모두 마치고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밤길을 걸어 서장대로 향했다. 아름다운 수원의 야경을 보기 위함이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그 시간까지 화성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12일의 야경을 그대로 따라해 보는 관광객들이다. 그리고 정신없이 야경을 촬영하는 블로거들. 화성을 따라 켜진 조명이 아름답다.

 

그렇게 파워소셜러 팸투어의 첫날이 끝났다. 공식 일정은 마쳤지만, 이 짧은 만남을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다. 통닭거리로 나가, 다시 그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그렇게 밤 12시가 디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의 일정이 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야경.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위), 방화수류정에 오르는 블러거들(두번째),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수원 야경(세번째) 밤늦은 시간에 화성을 돌아보는 관광객들. 1박 2일 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20131월 첫 번째 답사는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군 현내면으로 정했다. 이곳은 아름다운 화진포를 비롯하여 김일성별장과 전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 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인근에 건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바로 화진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들 들이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일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인 이 지석묘들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이 일대에서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대단위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선사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분포 해

 

화진포 일대에는 패총과 마제석기 등 유물이 주변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고대 집단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산재한 지석묘를 찾아보기 위해 화진포 콘도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만난 지석묘는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있는,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긴 각진 타원형인데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2.5m×2,4m 정도이고 두께는 30~40cm 정도이다.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이승만 별장 기념관 주변에 3기가 있어

 

화진포 앞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진포 콘도 옆에 1. 그리고 이승만 별장 기념관 위편 도로 양편에 3,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화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3기가 있는 이승만 별장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확인하고도 정확하게 어디에 지석묘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이승만 별장 기념관 앞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가끔 사람들이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그분들도 찾아보다가 없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어디에도 이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뒤져보는 수밖에.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돌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고인돌의 윗돌이다. 차에서 내려 올라가 보았더니 두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 기는 길 건너편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에 고인돌을 찾지 못했을까? 아마도 여름철이라면 풀이 자라 고인돌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1월에는 다행히 풀이 마르고 쓰러져 있어 고인돌이 들어나 있는 것이다. 세 기의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의 고인돌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비지정문화재는 이렇게 관리해도 되나?

 

매표소를 지나 길 좌측 위에 있는 두 기를 돌아보고 건너편 비탈 위에 있는 고인돌로 향했다. 길 좌측에 있는 고인돌은 밑에 굄돌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비탈 위에 고인돌은 그보다는 굄돌이 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고인돌 사이에는 불을 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이곳에 와서 술을 따라놓고 치성이라도 들인 것일까? 아니면 술을 먹으며 날이 추우니까 군불이라도 지핀 것일까? 고성군 지역은 유난히 선사유적인 지석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화진포 주변 다섯 기의 고인돌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인 고인돌이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이제라도 이 옛것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일깨 울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만 같다. 첫 번 째 답사에서 만난 불쾌함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팔달산 고인돌길'.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난 이 길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이 길은 지방유형문화재인 팔달산 ‘지석묘군’을 답사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우연히 붙인 이름이다. 그저 뒷짐을 지고 몇 바퀴를 돌기에 적당한 길이고, 아이들과 함께라면 자연과 문화를 벗 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도심에서 이런 길을 만난다는 것도, 알고 보면 행운이란 생각이다.

 

그저 혼자 40분 정도를 걷다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냈다. 용도길, 화양루길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적당한 이름이 '팔달산 고인돌길'이란 생각이다. 이런 이름을 붙여놓고 혼자서 싱글거린다. 지나는 사람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뒷짐을 지고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팔달산 고인돌길', 이름 어때요?

 

나름대로 이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즈음 조금만 경치가 좋아도 사람들은 길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나야 길 전문가도 아니니, 구태여 길에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이 길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를 소개하는 사람의 본이 바로서질 않는다는 생각이다.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9월 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작은 손 카메라 하나만을 주머니에 넣고 산을 오른다. 비가 내리는 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두둑’ 소리를 낸다면, 그 또한 자연의 소리일진데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구태여 산이라고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을 듯한 경사이다. 조금만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지석묘군.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지석묘를 비켜나면, 팔달산의 남쪽 능선을 따라 쌓은 화성의 용도 방향으로 오르게 된다.

 

그보다는 지석묘를 알 수 있는 이름이 좋다

 

이 길을 걸으면서 '용도길'이나 '화양루 길'이라고 생각을 한 것도, 이 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화양루와 그 옆에 용도 곁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 안으로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성의 이름을 붙이기보다는, 그저 '고인돌길'이란 명칭이 더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지석묘군을 지나면 용도의 끝에 마련한 화양루가 보인다. 이 길은 온통 암반이다. 이곳의 돌들은 과거에 화성을 쌓기 위해 성돌을 채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바위를 잘 살펴보면 돌을 쪼아낸 흔적도 보이고, 성돌로 사용함직한 크기의 돌도 보인다. 그 바위와 소나무들이 어우러진 길 위에 화양루와 용도가 보인다.

 

소나무와 암반이 어우러진 길

 

용도의 성벽을 우측으로 두고 천천히 걷는다. 용도 안에서는 용도가 꽤 높이 쌓은 줄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용도를 끼고 걸어보니, 이렇게 낮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에전에는 성벽 밑이 가파른 비탈이었을 텐데,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렇게 길이 생겨났다. 조금 걷다보면 용도서치를 지나고, 잠시 후 서남암문 위에 올려 진 서남포사가 보인다.

 

 

서남포사를 지나 조금만 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은 노송 숲이다. 비가 내리는 날 숲속에서 맡아보는 솔 향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누군가 돌탑을 쌓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는 지석묘. 두어 바퀴를 더 돌았는데도 시간이 40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번 그 길을 반복해서 지나는 분에게 몇 바퀴나 도느냐고 물었다. 그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단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 길'. 그것이 바로 팔달산 고인돌길의 멋이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 수 있나? 괜히 그 길에 취해 멈춰 선다. 저만큼 비에 젖은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외롭게 앉아있다. 그 또한 자연이란 생각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지고, 화성을 손으로 느껴가면서 걸을 수 있는 길.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길이 나는 좋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구암마을.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707번지인 이곳에는 사적 제103호인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다.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그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한다. 북방식은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을 말하며, 남방식은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바둑판식을 말한다.

 


 

10기의 지석묘가 남아

 

구암리에는 1956년 조사 때 고인돌이 총 13기가 있었다고 하나, 1982년 사적으로 지정이 될 당시에는 민가의 울타리 안에 있던 것인데 현재는 10기만 남아있다. 구암리에는 여러 곳에 고인돌 무덤떼가 있는데, 고인돌은 대체로 자연암석을 떼어내 덮개돌로 사용한 바둑판식 지석묘이다.

 

이곳 고인돌의 뚜껑돌인 상석은 큰 것이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 ∼ 100㎝에 달하며 받침돌 8개가 이를 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보통 4개의 받침돌을 이용하는데 반해, 8개의 받침돌을 받쳐 다른 지역 고인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작은 것들은 길이 3 ~ 4m에 너비가 2 ~ 3m 정도이다.

 

남방식 지석묘인 바둑판식이다. 상석을 작은 몇 개의 굄돌 위에 올려 놓았다.

 

독특한 구암리 지석묘군

 

구암리 지석묘군은 딴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부안의 딴 곳에 있는 지석묘를 보아도 구암리 지석묘와는 형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이곳을 문화재 보호지역으로 정하고 울타리를 쳐놓고 보존을 하고 있다. 가장 큰 것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첫 눈에 보기에도 그 크기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주변을 돌면서 굄돌을 살펴보니 굄돌의 크기도 모두 다르다. 가장 큰 고인돌은 8개의 굄돌로 받치고 있는데, 주변의 고인돌의 굄돌보다 크다. 아마 위에 올린 뚜껑돌인 상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듯하다. 굄돌의 개수도 다 다르다. 큰 것은 8개, 그 외에는 6개, 5개, 4개 등 다양하다. 아마 그 돌의 무게에 따라 적당한 굄돌을 받쳐 놓은 것인가 보다.  


 

 

이 구암리 지석묘의 밑에서는 돌칼과 돌화살촉 등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고창지역과 부안지역은 북방식 고인돌인 탁자식 고인돌이 군데군데 분포하고 있는데 비해,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모두 남방식 지석묘이다.   

 

거북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구암리 지석묘의 뚜껑돌인 상석의 형태는 다양하다. 거북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도 있고, 어느 것은 막돌을 갖다 올린 듯한 것들도 있다. 굄돌을 받친 형태도 일정하지가 않다. 이렇게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은, 당시 이 지석묘의 주인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고인돌의 형태가, 이곳 주변에 살던 부족 중에서 나름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하다.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들을 잘라낼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이 무거운 상석을 어떻게 올려놓은 것일까? 지석묘를 볼 때마다 늘 궁금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에, 이렇게 큰 돌을 이용해 지석묘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뚜껑돌인 상석이 큰 것은,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 ∼ 100㎝에 받침돌 8개를 돌려 세웠다.

 

그 가운데 작은 것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띈다. 길이는 1.5m 정도일까? 저런 지석묘는 혹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쓴 지석묘였을까? 구암리 지석묘를 보면서 쉽게 뒤돌아 설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의문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힘이 들기는 하지만, 수많은 해답을 얻어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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