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는데 창문으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그것도 활짝 열린 창문이 아니라, 커튼이 드리워진 사이로 조금만 커튼을 젖히고 보고 있다.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그와는 반대로 내가 남의 방안을 누가 들여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괜히 무엇인가 잘못한 것만 같아서 움찔한다.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24번 길 40에 소재한 행궁동 주민센터. 민원실 벽면은 정월행궁나라 갤러리이다. 정월은 나혜석의 호이다. 그 벽면 갤러리에 그렇게 커튼을 조금 열어젖힌 눈망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임진실의 초대전 나도 모르게 보려고 해는 지나가다 창문 틈 사이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보려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보려고 해

 

91일부터 30일까지 정월 행궁나라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작가 임진실의 나도 모르게 보려고 해전은 한 마디로 상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시회이다. 벽에 걸린 몇 점 안되는 작품들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는 벽걸이 장식인줄 알았다고 한 주민은 이야기를 한다.

 

저 작품 전시회 걸개가 없었다면 그냥 벽을 치장한 것인 줄로만 알겠어요. 그런데 작품전시라고 해서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니 참 묘한 느낌이 들어요. 마치 제가 남의 집 창문을 들여다보다가 주인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요. 아마 작가분도 그런 느낌으로 세상을 본 것은 아닐까요?”

 

 

작가 임진실은 한남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꿈과 마주치다(임호갤러리)’외 다수의 그룹전을 열었고, 개인전은 세 차례를 열었다. 2010년 서로 몰랐던 일들(대안공간 게이트), 2010년 너를 위한 동화(All Souls cafe), 2014년 임진실 개인전(갤러리 자인제노)과 이번에 네 번째 전시회가 된다.

 

장난감이 영혼이 있다면?

 

작가노트에서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동네 안을 걷다가 보면 시선은 건물과 창문에 늘 머물게 된다.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다. 언제나 그렇듯 이미지 파일은 창문과 건물들로 가득하다. 오래된 양옥집과 두꺼운 페인트가 발린 대문과 낡은 창문들을 보며 저 집은 곰돌이네 집이라고 상상해본다. 문을 두드리면 곰돌이가 조금은 망설이다가 현관으로 나와 문을 열고 쑥스러운 얼굴로 맞이해줄 것이다.

 

 

그랬다. 어린 시절 사람들은 누구나 인형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이 영상으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간혹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지금도 그 침대 맡에 놓여있는 곰 인형이 영혼이 깃들었다고 생각을 한단다. 작가들의 상상의 그 모든 것이 결국 작품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작가는 그 곰 인형과 이야기를 할 수 없어 안타까움을 작품에 그려 넣었는지도 모른다. 창문 커튼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는 곰 인형이 눈과 마주쳤다. 순간 저 곰 인형이 내 생각을 다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보다야 저 인형과 생각을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행궁나라 갤러리에 가면 임진실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그리고 창문 틈으로 얼굴을 내민 곰 인형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을 즐길 수 있는 전시회에 발길을 돌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정월에 드는 액은 이월 영등으로 막아내고

이월에 드는 액은 삼월 삼짇날 막아내고

삼월에 드는 액은 사월초파일에 막아내고

사월에 드는 액은 오월 단오로 막아내고

오월에 드는 액은 유월 유두날 막아내고

유월에 드는 액은 칠월 칠석에 막아내고

 

정월 초사흘부터 대보름까지 수원의 각 가정에서는 홍수막이라는 의식을 치렀다. 물론 지금에야 이런 광경을 보기가 쉽지가 않다. 홍수막이는 일 년 간 사람에게 드는 나쁜 일들을 막아내는 일종의 제의식이다.

 

수원은 일찍 팔달문 안과 밖으로 장시가 섰던 곳이다. 자연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장거리가 활성화되면서 한양에서 축출을 당한 무격(巫覡)들이 노들나루를 건너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장시가 활성화 된 수원은 딴 곳보다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을 테고, 그만큼 장사를 함에 있어서 궁금증도 많이 일어났을 것이다.

 

 

영동시장은 아예 거북산당을 섬겨

 

영동 거북산당 도당굿은 200여 년간이나 유서 깊게 전해 내려 온 지역의 전통굿으로, 경기도 수원 팔달문 인근의 영동시장 내에 신당이 있다. 시장의 역사는 1790년경 수원성 건립과 함께 하며, 그 때부터 터주가리 형태의 제당이 있었다고 한다.

 

영동 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축조된 이유를 보면 화성 건립을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남문밖에 상포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인 시장의 형태를 갖추고 되면서 당이 선 것으로 보인다. 거북산당은 상인들을 주축으로 상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도당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시장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시장에서 터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없어도 당제는 올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영동 거북산당 도당굿은 영동시장 상인들을 주축으로 근 200년이 넘는 시간을 전승이 되어 온 것이다.

 

 

당의 명칭이 거북도당 으로 불리는 것은 원래 이 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도 하며, 또 인근의 구천동과 가깝고 주위에 물이 많은 곳이며 풍수지리적으로 불을 제압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처에 거북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구릉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 거북산당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정월에 홍수막이를 해야 안심이 돼

 

칠월에 드는 액은 팔월 한가위에 막아내고

팔월에 드는 액은 구월 중구절로 막아내고

구월에 드는 액은 시월 상당 무시루떡으로 막아내고

시월에 드는 액은 동지달 동지 팥죽으로 막아내고

동지에 드는 액은 섣달 악귀 쫓던 방포로 막아내고

섣달에 드는 액은 정월 방망이 맞은 북어 한 마리

소지에 둘둘말아 원주 원강에 던져 막아내고

 

예전에는 거북산당에서도 홍수막이를 하였다. 원래 홍수막이는 각 가정에서 대청과 부엌, 안방등에 고사상을 마련해 놓고 무격이 징을 치면서 달거리라고 하는 홍수막이 축원을 하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집안에서 하는 경우는 드물고, 거의가 전문적인 무업(巫業)을 하는 무격의 전안을 찾아가 홍수막이를 한다.

 

 

정초에 이렇게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무엇인가 든든한 것이 있어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이 든든하죠. 그래서 홍수막이는 빠트리지 않고 합니다. 벌써 저희는 수십 년을 이렇게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어요.”

 

연무동에 산다는 이모씨는 정월에 홍수막이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한다.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일이 터져도 자신이 생겨 쉽게 넘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네의 풍습인 홍수막이. 단순히 우상숭배로 치부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부터 전해지는 풍속으로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정월 대보름이 된다. 정월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절기 이상의 의미가 있는 날이다. 정초부터 시작한 정월의 각종 놀이가 이 날로 인해 대부분 끝이 나기 때문이다.예전에는 정월달에 각 마을에서 지신밟기 등을 하다가 서로 이웃의 기를 만나게 되면 힘을 겨루는 '두레싸움'을 하고는 했다. '

 

두레'란 농촌에서 농사일을 함에 있어서, 공동으로 같은 연배의 구성원끼리 공동작업으로 노동력의 배가를 위한 공동체 조직이다. 예전에는 이 두레마다 풍물패와 두레를 상징하는 기가 있었는데, 대개는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고 두레명칭을 적는다.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러 나갈 때는, 이 두레기를 앞장세우고 풍장을 치면서 이동을 한다.

 


 

두레에 농기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풍장이 꼭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 두레 성원들이 자신들의 농사일을 마치고나면, 공동으로 두레 성원이 아닌 집의 농사일을 해주고, 그 삯으로 받은 돈을 이용해 풍장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레조직은 마을마다 있었으며, 그 두레조직을 상징하는 두레기는 각별한 위함을 받는다.

 

두레조직의 상징 두레기

 

막고 밀치면서 서로 먼저 장목을 뺏는 두레싸움

서로가 기를 뺏기위해 밀치다가 넘어지기도. 보는 사람들도 난리다.


두레기는 두레조직이 이동을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세운다. 이 두레기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만일 마을에 지체가 높은 양반이 살고 있으면, 그 마을의 두레기를 만나면 가를 숙여 먼저 인사를 하기도 한다. '안성 남사당'의 농기에는 옥관자를 달고 다녔다. 이는 바우덕이 패가 경복궁을 중수 할 때 참가를 하여, 많은 노역자를 위한 즐거움을 주었다고 해서 대원군이 특별히 옥관자를 내린 것이다.

 

안성 남사당의 기를 '옥관자 기'라고 불렀으며, 모든 기는 안성 남사당 기를 만나면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했다. 두레기는 농사일을 할 때는 논두렁에 꽂아 놓는다. 만일 이 기를 쓰러트리면 마을이 불상사가 생긴다고 하여, 여간 조심을 하지 않았다. 두레기를 함붕로 다루거나 눕힌다던가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정월 곳곳에서 벌어지는 두레싸움

 

심하게 서로가 몸을 부딪기 때문에 때로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정월이 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기를 앞세우고, 풍장을 치고 나간다. 지신밟기며 정월 보름을 기해서 하는 많은 민속놀이에는 풍장을 곁들이게 되고, 그 풍물패의 앞에는 두레기가 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두레기를 앞세우고 길놀이를 하던 마을의 풍장패들이 서로 만나면, 먼저 상대방에게 길을 비키고 기수를 숙이라고 난리를 피운다.

 

길을 먼저 비켜주고 자신들의 기를 먼저 숙이며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한 치의 양보가 없다. 이렇게 승강이를 하다가 급기야는 상대방의 두레기에 달려들어, 두레기의 맨 위에 달린 꿩 장목을 뺏는다. 장목은 두레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이 장목을 뺏기면, 큰 수치로 안다. 한번 꿩 장목을 뺏기면 그 해 일 년 동안은, 장목을 뺏어간 마을기에 먼저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한강 둔치에서 재현된 두레싸움

 

보는 이들은 생동감이 있다. 두레기의 맨 위에 달린 장목을 뺏기면 일 년동안 뺏어간 기에 먼저 인사를 해야한다.


두레싸움을 할 때는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기에 달라붙어 기를 쓰러트려야 하기 때문이다. 막는 자와 뺏으려는 자가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보면, 부상자가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월 27일 오후 여주 남한강 둔치에서 열린 대보름 한마당. 이곳에서는 군인들이 시범을 보인 두레싸움이 벌어졌다.

 

양편에 황룡기와 흑룡기가 서고, 그 앞에 각 마을 20명의 군인들이 서로 상대방 기에 꽂힌 장목을 뺏기 위해 두레싸움을 벌인 것이다. 젊은 군인들이라 서로 상대방의 기에 쫒아가고 막는 두레싸움은 보는 사람들조차 함성을 지르고 난리를 편다. 다칠 것을 염려해 손은 뒷짐을 지고 어깨로만 상대방을 밀고 들어가도록 했으나, 서로 부대가 달라서인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보는 사람들까지 열광케 한다.

 

기를 지키려고 막다가 내동댕이쳐지는 병사. 얼른 쫒아가 장목을 뺏어 승리를 하겠다고 달려가다가 제풀에 미끄러지는 병사. 거기다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두레기마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젊은 병사들이 보여 준 우리 전통 민속 한마당으로 인해, 대보름 한마당은 흥이 최고조에 달했다.

 

정월이 되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두레싸움. 이제는 그러한 아름다운 놀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전통은 구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하면서 발전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던 놀이들. 이제는 새롭게 조명이 되어야 할 때이다.

수원은 예부터 무자(巫子)들이 많던 곳이다. 아무래도 화성이 건립된 전후로 팔달문 앞에 장이 형성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상권이 형성되었다는 소리는 그만큼 재물이 풍부했다는 이야기이다. 하기에 도성에서 쫓겨난 많은 무격(巫覡)들이 수원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월 초사흘(음력 1월 3일) 이 되면, 무자의 집에서는 일 년의 액을 막는 ‘홍수맥이’를 시작한다. ‘홍수’란 ‘횡수(橫數)’를 말하는 것이다. 즉 나쁜 일이 닥치는 운세를 ‘횡래지액(橫來之厄)’이라 하였는데, 그것을 홍수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홍수막이는 전문적인 무격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무격의 힘을 빌려 정월 초사흘부터 보름까지, 일 년 간의 나쁜 수를 막아내는 것이다. ‘홍수를 막는다.’ 라는 뜻을 지닌 홍수막이를 사람들은 ‘홍수맥이’라고 한다.


홍수막이를 정월 초사흘부터 정월 보름까지 하는 것도, 지신밟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날 시작해서 같은 날 끝나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모드 일 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정월에 이루어지는 우리네의 모습. 이런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쉽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네 마음까지 달라진다고 해서야. 지킬 것은 지켜가는 것이 도리란 생각이다.

줄을 이어 기다리는 사람들

홍수막이를 하는 현장은 늘 분주하다. 남들보다 먼저 축원을 해야 더 좋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심성 때문이다. 쌀말에 초를 꽂고 축원을 하는 동안,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기원을 한다. 자손들이 한 해 동안 탈 없이 잘 자라고, 집안에 흉사가 없도록 비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한결 같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 고성주(남. 56세)는 벌써 신내림을 받고 이 길로 들어선지 40년 가까이 되었다.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정초만 되면 신자들을 위한 축원을 하느라 목이 쉰다. 그래도 남들처럼 커다란 물질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연히 신을 모시고 있는 무자로써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정월 초사흘에 시작하는 홍수막이는 보름이 되어야 끝이 난다.

대물림으로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울에서 왔다는 이모씨(여, 46세)는 “이렇게 정초에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일 년 동안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딴 곳처럼 큰 돈 안 부르고 일 년 간의 축원을 해주는 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저희는 지금 대물림 단골이에요. 아이들도 앞으로 계속 이렇게 정초가 되면 와서 축원을 받을 테죠”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집의 신자들은 모두 대물림 단골들이다. 할머니가 다니던 집을 며느리가 다닌다. 그리고 벌써 그 다음대가 물려받기 시작한은 집들도 있다. 전안(신을 모신 신당)에 반드시 앉아 징을 치면서 축원을 하고 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을 모른다고 한다. 축원을 하는 고성주나, 하루 종일 자신의 순서를 가다리는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이다. 이 한 해도 오직 편안하게 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4대째 전통방법으로 진행하는 홍수막이

고성주의 홍수막이는 벌써 4대 째 내려오는 무가(巫家)의 독특한 방법으로 진행을 한다. 할머니에 이어 고모와 고모의 신딸인 최씨, 그리고 고성주로 이어지는 무가의 전래집안이다. 지금의 단골들도 내개 3~4대를 이어오는 단골들이라, 집안 내력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이집을 찾는 사람들은 혼란이 오기도 한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모두가 ‘아범’이나 ‘어멈’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신도들은 고성주를 나이에 관계없이 ‘아버지’라고 호칭을 한다. 모두가 신과 인간의 고리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옛날 ‘단골네’들의 유풍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딴 곳 같았으면 벌써 문화재로 지정을 하고도 남을법한 전통이다.

정월에 이루어지는 홍수막이. 일 년을 편안하게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축원을 마치고 오방신장기를 뽑게 해 일년의 공수(신탁)를 준다. 아마 홍수막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이 공수대목을 일 것이다. 어느 달에 조심을 하라고 일일이 일러주고 난 후, 홍수막이를 하고 나오는 시림들의 얼굴에는 안도감 때문인지, 엷은 웃음이 보인다. 

10월 1일 남원 요천가 '사랑의 광장'에서 열리는 '제63주년 군군의 날 기념 남원 민군 한마당큰잔치'에서 선 보이는 놀이 중 '기싸움'이라는 종목이 있다. 기싸움이란 기를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용대기 위에 꽂혀있는 '꿩장목'을 먼저 빼앗는 부대가 이기는 승부성 민속놀이이다.

원래 기싸움이란 마을마다 <두레기>가 있어, 그 두레기들이 농사 일을 하러 길을 나가다가, 서로 꿩장목을 빼앗는데서 유래를 한 것이다. 예전에 마을에는 농사를 지을 때 품앗이를 하던 두레조직이 있었다. 이 두레조직에는 두레를 상징하는 기(旗)인 '두레기'가 있었다.공동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두레패들이 길을 가다보면 이웃의 두레패들과 길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두레패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 벌이던 기싸움

길에서 마주친 두레패들은 서로가 자신들이 '형님'이라고 상대방에서 먼저 기수를 숙이거니 길을 비켜서라고 난리들을 친다. 그러다가 기싸움을 벌이게 된다. 기싸움은 상대방의 두레기 위에 꽂힌 꿩장목을 먼저 빼앗는 마을이 형님 노릇을 하게 된다. 

장목를 빼앗긴 마을에서는 꿩장목을 찾기 위해 술을 대접하거나 아니면 깍듯이 형님으로 모셔, 길에서 마주치면 기수를 숙여 먼저 인사를 하게 된다. 이러한 기싸움은 정월에 농사가 시작될 때 나타나는 것을, 군장병들이 승부성놀이로 펼치게 되는 것이다.


서로 등을 지고 공격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병사들(위) 징소리가 나면 상대방의 기에 달려든다. 수비군은 이를 저지한다.

기싸움은 이렇게 한다.

1. 먼저 양편에 20명 씩의 인원을 차출한다.
2. 한 명은 기수이고 9명은 자신의 기를 지키는 수비군이 된다. 남은 10명은 상대방의 기에 꽂힌 꿩장목을 빼앗는 공격군이 된다.
3. 양편의 공격군들은 상대편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서로 반대편으로 가서 등을 지고 선다.
4. 징소리를 신호로 상대방의 기에 달려들어 기를 쓰러트린 후 꿩장목을 뺐는다. 수비군은 자신들의 기를 지켜내야 한다.
5. 자칫 과격하게 몸싸움을 벌이다가 보면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기에 수비수나 공격수나 손 이외의 부분은 사용할 수가 없다.
6. 기수는 기를 들고 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경기장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7. 장목을 먼저 빼앗는 부대가 이기게 된다. 징을 세번 울리면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8. 자칫 과열이 되는 것을 막기위해 다음과 같은 금칙을 둔다. 기수는 경기장 내에서만 이동을 할 수가 있다. 수비군은 상대방을 손으로 밀쳐낼 수는 있다. 또한 신체 부위 어디고 가격을 해서는 안된다. 공격군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을 발로차거나 땅에서 뛰어오르거나 하면 안된다.

   

양편이 서로 상대방의 용대기에 달려들어 기를 쓰러 트린 후 위에 꽂힌 <꿩장목을> 먼저 빼앗아야 한다.

 


서로 장목을 먼저 뺏기위해 쫓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넘어질 수도 있다. 부상을 막기위해 가급적 용대기를 가진 기수는 일정장소 밖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용대기의 무게는 상당하다. 장대길이 5m에 기폭의 길이가 3m나 되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군장병들이 시연을 하기 때문에 자칫 용대기를 쓰러트리다가 다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 이외의 어떤 부위도 사용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을 가격하거나 발로 차거나, 혹은 잡아서 넘어트리는 행위도 해서는 안된다. 서로 손을 이용해 밀쳐내기만을 허용한다. 수비군을 밀쳐낸 후 기를 쓰러트려 상단에 꽂힌 꿩장목을 먼저 빼앗는 부대가 이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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