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11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 팽성 객사는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객사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어가는 곳이며, 일반적인 형태는 중앙에 중대청을 놓고, 양편으로 동, 서헌을 둔다.

팽성객사는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 주택으로도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해체, 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에 솟을문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광 등을 드렸으며, 동편을 꺾어 ㄱ 자형으로 마련하였다.



관리청으로서 위엄을 보이는 팽성객사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 양 옆에 동, 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객사 본 건물의 중앙에 마련한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 달에 두 번 절을 하던 곳이다. 절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진다. 중대청의 지붕은 양 옆에 마련한 동, 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 서헌은 각각 중대청과 가까이에 한 칸의 온돌방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이 동 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팽성객사의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팽성객사는 원래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조 현종 때 크게 중창을 하였고, 영조 36년인 1760년과, 순조 1년인 1801년에 다시 중수를 했다고 한다.

문은 잠가놓고, 쓰레기는 쌓이고

2월 12일 오후 팽성객사를 찾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팽성객사를 방문한 것은 2007년 10월 21일이었다. 그 때도 문은 굳게 잠겨있고, 관리사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객사의 대문은 잠을 통으로 굳게 잠겨있다. 그리고 관리인이 묵는 관리동과 심지어 화장실까지 잠겨 있다.



화장실 앞에는 지저분하게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담장 밑에도 담배꽁초와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들이 나뒹굴고 있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동까지 지어놓고 정작 관리는 하지 않는 문화재. 관리동과 화장실이 붙어있는 이 건물은 벽도 떨어져 나가 흉물로 변하고 있다.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곳이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가만 두면 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전주객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누구나 들어가 동, 서헌 마루에 앉아 쉴 수가 있다.





문화재란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인식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무조건 문을 걸어놓고 출입을 시키지 않는다고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들여 관리사를 짓고 사용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대체 왜 혈세를 낭비하면서 문화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당 지자체의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초희’이며, 호는 ‘난설헌(蘭雪軒)’, 자는 ‘경번(景樊)’이다. 선조 22년인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난설헌은 명종 18년인 1563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허난설헌은 그 재주가 비범하여 오빠가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얼마나 재능이 뛰어났는지 선조 3년인 1570년에는, 불과 나이가 8세 밖에 안 되었지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15세 때 안동 김씨인 김성립에게로 출가를 한 허난설헌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19세에는 딸을 잃고, 20세에는 아들 희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다. 이런데다가 아버지는 상주에서, 난설헌을 가장 아끼던 둘째 오빠 허봉은 금강산에서 객사를 한다.


목포시립무용단 정기공연 창작무용인 '허난설헌'에서 안무자 정란이 허난설헌의 삶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운의 여인, 그러나 풍류 속에서 살다간 여인

그런 주변의 아픔 때문일까? 허난설헌은 1589년인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혀있다. 이러한 허난설헌이 죽음을 담보로 자유를 갈망한 조선의 여인으로 다시 조명이 되어 환생을 하였다. 당시의 기구한 삶과 오늘날의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사회적인 풍조가, ‘워킹맘’이라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인들의 기우뚱거림으로 이어진다.

지난 11월 11일(목) 목포시민문화체육센터 소공연장에서는 오후 7시 30분부터 목포시립무용단의 제28회 공연이 있었다. 1, 2부로 나누어진 이 공연은 창작과 전통이 만나는 그런 무대였다. 1부는 ‘풍류녀 허난설헌’이라는 제목으로 예술 감독인 안무자 정란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졌다.



목포시립무용단의 창작무용 '허난설헌'
 
허난설헌의 슬픔이 가득한 일생이 몸으로 다시 환생을 하는 그런 무대였다. 모두 5장으로 나누어진 40분간의 무대는, 연신 바뀌어가는 허난설헌의 삶이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숱한 군상들 속의 난설헌, 그리고 홀로 그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하는 길고 어두운 시간.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삶. 멈추고 싶지도 않고, 멈추어지지도 않는 토해버리고 싶은 가슴속의 응어리.

그러한 허난설헌의 모든 것을 4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농축하여 보여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무자 정란은 몇 년 전인가 이번 무대보다 짧은 ‘새하곡’이라는 춤을 갖고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도 보았지만, 무대에 오를 때는 이미 ‘정란’이 아닌 ‘허난설헌’ 이 되어 있었다.

정란은 이번 무대에서 ‘전폐, 희문’이라는 종묘제례악을 사용을 했다. 기존의 음악을 탈피해 허난설헌 일가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자식들의 죽음과 부모와 형제들의 죽음을 조금 더 승화시켰다. 그런 속에서 무대에 오른 정란은 허난설헌의 고통스런 일생을 풀어내 듯, 한풀이와 같은 춤을 춘다. 마치 살풀이를 현대화시킨 듯한 느낌이다.



목포시립무용단 '풍류녀 허난설헌'

춤은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은 마음의 춤이 있어야 함께 움직일 수가 있다.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어 무대에 서면, 관객들도 그 몸짓에 동화를 할 수가 있다. 이번 무대에서 정란은 스스로 허난설헌이 되어 관객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몸을 빌려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더 보완을 해 허난설헌의 일대기를 무용극화 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 무대가 기대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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