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사’, 이름 그대로 팔달산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다. 팔달산 기슭에 자리한 팔달사는, 전통사찰 제75호로 198810월에 지정이 되었다. 팔달산의 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전각을 조성한 팔달사는, 도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힐링장소이기도 하다. 1031일 오후 찾아간 팔달사는, 가을이 한창 깊게 물들고 있었다.

 

팔달사를 찾는 것은 가끔 용화전 벽에 그려진 벽화 때문이기도 하다. 거만하게 생긴 호랑이 한 마리가 장죽을 물고 있고, 두 마리의 토끼가 시중을 들고 있는 벽화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 중 한 소재인 이 그림을 왜 용화전 벽에 그렸는지, 그 내력이 궁금해서이다. 하지만 언제나 들려보아도 속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1922년 흥법 비구니가 설립

 

팔달사는 흥법(윤흥자) 비구니가 1922년 토지와 건물을 합쳐 114평 정도를 구입하여 팔달암을 건립한 것이 현 팔달사의 불사내력이다. 정확한 사록(寺錄)이 없어 자세한 팔달사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이채순(평등월) 보살이 일본 조동종 사찰에 입산하여 비구니계(불명 묘심)를 받은 후, 승려생활을 해 오던 중 피부병이 생겨 승려생활을 할 수 없자 환속을 했다고 전한다.

 

그 후 흥법 비구니의 셋째아들인 김용기와 결혼을 해, 1934년에 사찰운영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19406월에 현 재단법인 선학원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에 팔달사 재산 전부를 증여한 후 제1대 창건주가 되었다. 이채순 보살의 남동생 범행스님이 1952~2003년까지 주지로 소임을 맡았다.

 

 

당시 주지 범행스님은 1987~20036월까지 제2대 창건주로 승계를 받았으며, 이채순 보살과 범행스님의 노력으로 주변의 토지와 가옥을 사들여 1,200평의 도량에 지금과 같은 팔달사를 이룩하였다. 20066월에는 범행스님의 상좌인 혜광스님이 제3대 창건주로 팔달사를 승계 받은 후, 주지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절 팔달사

 

팔달산의 비탈을 이용하여 대웅전, 범종각, 용화전, 요사, 산신각 등을 배치한 팔달사. 그저 누구나 편히 들어가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다. 1,500평의 대지에 각종 나무들과 꽃들이 가꿔져 있어, 가을이 되면 팔달산의 단풍과 함께 눈이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안에 자리하고 있어, 외국의 관람객들도 심심찮게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10월의 끝에 찾아간 팔달사.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용화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벽화를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용화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 범종각이 머리 위에 있다. 팔달사의 범종각은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다. 늘 이 범종각을 볼 때마다 구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도심 속의 힐링공간 팔달사

 

그리 오래된 절은 아니라고 해도, 팔달사는 언제나 옛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특히 가을에 찾아가면 팔달산의 단풍과 함께, 대웅전 뒤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면 더욱 고풍스럽다. 팔달사를 즐겨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아직도 뒤편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옆으로 난 소로 길을 걸어 석탑 앞으로 다가선다. 계단 옆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층석탑은 불사리를 모셔 놓았다고 한다. 잠시 머리를 숙인다. 고개를 드니 용화전 옆 향나무와 석탑 앞에 심은 꽃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을 팔달사 경내에서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고 해도 잠시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고, 더욱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도심 속에 산사(山寺)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절이 있을까? 내가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때 팔달사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런 산사의 가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평 사나사를 찾아가다

 

천년의 숨결이 배어있는 사나사(舍那寺)’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48호이다.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절에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특이해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있고, 대적광전, 극락전, 삼성각, 조사전, 함씨각, 요사채등의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절 한편으로 용문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하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나사에 전하는 함왕에 대한 또 다른 설이 있어, 그 설을 정리해 본다.

 

 

함규(왕규)를 함왕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바위굴에서 나왔다는 분도 함규가 아니다. 함왕이라 함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함혁(함왕주악)은 함씨 시조로 알평과 동시대 인물이다. 함씨 세보에 의하면 당나라 때 대사마대장군(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으로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입동국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세력으로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운 후 세대를 이어오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라에 복속된다. 그가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웠을 때 함왕주악은 왕()이었다. 하기에 함왕성, 함왕골, 함왕혈, 함왕계곡등의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라에 복속된 후 문성왕으로부터 문간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함씨들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승승장구한 호족가문이다.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함왕성을 쌓고 강력한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세대를 이어오다가, 그의 21대 후손인 함규가 고려 왕건을 도와 개국 공신이 되었다.

 

왕건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호족세력 함규를 얻음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다. 왕건은 함규의 두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함규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왕건이 함규에게 성을 하사한다. 그는 왕규로 고려사에 기록되어지는데, 함왕은 함규(왕규)의 시조인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알평이 구봉 함혁과 경주 표암봉 밑에서 같이 지냈다는 기록이, 경주 이씨 세보에 전해진다. 알평이 신라를 개국하기 전에 촌장이었듯, 함혁 즉, 함왕주악도 마한의 부족국가 왕이었다. 사나사 함씨각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의 영정을 모신 각이며 함혁을 함씨 시조로 보아야 한다. 함왕은 함규(왕규)와는 다름 선대의 함혁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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