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앞을 흐르는 물이 차고 희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 한벽당. 1404년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600년 가까이 되었다. 한벽당은 호남의 정자 중에서도 수일경이라 하는 곳이다. 앞으로는 작은 물고기가 노니는 맑은 물이 흐른다. 사시사철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맑았기에 한벽당이라 불렀을까?

 

전주천 맑은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벽당.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들려 사시사철 그 이름다움에 취했던 곳이라고 한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내고 새웠다. 조선조 건국시 개국공신인 월당 최담이 태종 4년에 처음으로 건립을 했다고 하니, 벌써 600년 가까이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전주천을 바라보는 정자

 

한벽당은 운치가 있다. 물빛 고운 전주천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이용해 끓여내는 오모가리 매운탕 한 그릇을 들고 한벽당 밑으로 나가면 한 여름이 훌쩍 지난다. 까마득한 지난 날 아마 우리의 선인들도 그런 맛에 취해서 한벽당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벽당 곁에 붙어지은 요월대가 있어 낮에는 한벽당에서 밤이면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요월대에서 즐겼을 것이다. 어찌 짧은 시 한수 나오지 않을 것인가? 이곳을 찾아들었던 사람들도 그런 절경에 취해 거나하게 탁주 몇 잔을 마셨을 것이다.

 

 

 

주변이 모두 절경과 볼거리

 

한벽당 주변에는 볼거리가 많다. 오랜 세월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커다란 고목이 된 은행나무들이 경내에 즐비한 전주향교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 많은 공연을 하기 때문에 즐기고 먹고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명소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전해지는 것인가 보다.

 

한벽당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봄이 되면 건너다보이는 산에 산벚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여름이면 정자 앞을 흐르는 차디찬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더위가 가신다. 정자 주변에 있는 고목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더 더욱 시원함을 더한다. 가을이면 전주천을 덮는 억새가 하늘거린다. 찬 겨울이라도 정자는 언제나 운치가 있다. 경치만 놓고 가늠하자면 가히 선계라 할 만하다.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한벽당. 맑은 물빛이 고운 정자다. 한벽당 가까운 곳에는 월당 최담의 비가 서 있어, 이곳이 유서깊은 정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멋스럽지만 난해하지 않고,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은 정자. 물빛 고운 한벽당은 그렇게 속으로 멋스러움을 감추고 있는 정자이다


요월대(邀月臺), 달을 맞이한다는 누각이란 뜻이다. 전주 한벽당 옆에 조그맣게 자리한 이 정자는 흡사 한벽당의 부속건물처럼 나란히 서 있다. 이 요월대를 보면 문득 세상사가 생각이 난다. 잘난 사람 곁에서 늘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렇고 작고 보잘것없는 요월대가 있기에, 한벽당이 더 돋보이는 것이다.

한낮의 기온이 32도를 훌쩍 넘겼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이 흐르는데, 요월대의 여름 경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한옥마을 이목대 길을 한 바퀴 돌아 전주천으로 접어들어 찾아간 한벽당. 한벽당에는 사람들이 무더위를 피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바닥을 윤이 나게 닦아 반들거린다.


겸손을 일러주는 요월대

그 옆에 요월대는 흙발로 돌아다녔는지, 흙이 마루바닥에 그득하다. 한벽당을 치울 때 같이 좀 치워주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이 요월대를 돌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남들보다 잘난 사람들이 거드름을 피워서는 안될 것이란 생각 말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요월대가 있어, 한벽당이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그렇듯 사람들도 못난 사람이 있어야 상대적으로 잘난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세상살이가 그렇다.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조금 뒤처지고 부족한 듯해도, 그 사람들을 나무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로 인해 잘난 사람을 구별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세상 사람이 잘날 수는 없지 않은가?




전라북도 유형문호재 제15호인 한벽당(맨 위)과 사방 한 칸으로 지어진 요월대.
굴다리쪽에서 본 요월대와 한벽당 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요월대.
 

이런 점을 보면 난 항시 한벽당보다 그 옆에 요월대가 더 소중한다는 생각을 한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한벽당과는 달리, 요월대는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정말 작은 정자이다. 그러나 누구랴 알았으랴, 왜 한벽당이 있는데, 굳이 그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달을 맞이했겠는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라고 깨우치는 요월대

밖으로 나가 다리를 건너 요월대를 바라다본다. 전주천 맑은 물에 그림자를 내리 놓는 한벽당과는 달리, 요월대는 나뭇가지 속에 가려 보이자가 않는다. 요월대에서 맞이하는 달은 어떠할까? 저 멀리 동고산성의 동고사가 보인다. 그 밑으로 흐르는 전주천은 한벽당 앞을 지난다. 한벽당은 조선조 태정 4년인 1404년에 최담이 지은 정자로, 그 역사가 600년이나 되었다.




반향으로 본 요월대(맨 위), 한벽당과 달리 흙먼지가 가득한 요월대,
현판과 요월대에서 바라본 한벽당(맨 아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한벽당에 올라 시를 읊었다. 하지만 그 옆에 그저 있는 듯 마는 듯, 숨죽이고 있는 요월대에는 누가 다녀갔을까? 그러나 그 작은 정자에서 맞이하는 달오름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따로 요월대란 이름을 붙인 것일까? 멀리서 보아도 숨어잇는 요월대. 한벽당을 올라야 들어갈 수 있는 요월대. 요월대는 우리에게 고개를 들지 말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요월대 앞 바위에 음각한 글씨와 다리 건너편에서 본 요월대. 한벽당과 달리 밖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스스로 감춰버린 정자 요월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한벽당 보다 이곳에서 달맞이를 더 즐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여주지 않는 구중궁궐의 규수와 같은 자태로 숨어있다. 그래서 오늘 요월대가 더 소중해 보인다.


요즈음 사람들은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길은 어디나 있다. 하지만 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건강을 위한 길도 있지만, 역사와 문화적인 뜻을 가진 길도 있다. 그런가 하면 경치가 아름다운 곳도 있고, 때로는 걷기조차 마음이 편치 않은 길도 있을 수가 있다.

그 많은 길 중에서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길은 역시 경치도 좋고, 역사와 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길이라면 더욱 좋다. 난 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을 한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건강과 문화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길을 두고, 악다구니 같이 답답한 도심으로 몰려드는지 모르겠다고.


꼬부랑 소나무와 고깔바위들이 널린 길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9-1에 소재한 견훤왕궁지는, 전주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306m의 승암산 동편에 있는 동고산성에 위치해 있다. 이 왕궁터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아름다운 길을 만날 수가 있다.

꼬부랑 소나무길. 아마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곳이다. 높이 10m 정도의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꼬부라졌다. 흡사 춤을 추듯 제멋대로 휘어진 소나무들은 200여 평 정도에 멋스럽게 자리를 하고 있다. 왜 이곳의 소나무들만 이렇게 휘어진 것일까? 나야 나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왜 이런 나무들이 집단으로 서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50여m 떨어진 곳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지가 있고 보면,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만 같다.


요술할매가 요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소나무들이 모두 휘어져 있다.

꼬부랑 소나무 길을 지나 서쪽으로 조금 길을 걸으면 나무계단이 나온다. 이 산 꼭대기에 무슨 나무계단이냐고 투덜거려보지만, 위로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조금 앞으로 보이는 바위들과,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주 시가지 때문이다.

마치 중이 고깔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승암산. 높지 않은 산이지만, 승암산에는 역사와 슬픔이 함께 한다. 동고사를 비롯해 동고산성과 세계 유일한 동정부부 순교자가 묻혔다는 치명자천주교성지 등이 있다. 그래서 이산의 명칭은 승암산이지만 중바위산, 치명자산이라고도 한다. 치명자성지로 인해 치명자산이라고 한다지만, 그보다는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고, 그 이름 또한 이유가 있어 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바위 꽃이 아름다운 중바위

정상에 오르면 마치 고깔을 엎어놓은 듯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산마루에 칼끝처럼 뾰족한 바위들이 등성이를 따라 솟아나 있다. 바위에는 꽃이 핀 것처럼 화려한 문양이 돋아나 있다. ‘석화(石花)’라고 한다는 바위 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하나하나가 꽃처럼 아름답다.


중바위에 피어난 석화가 아름다운 문양을 자랑한다.

중바위의 앞으로는 전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한 눈에 전주 시가지와 전주천, 한옥마을 등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땀을 흘리면서 이곳까지 걸었지만, 그 시간이 오히려 즐거운 것은 이런 경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있는 아름다운 길 중 가장 걷고 싶은 길이다.

무더위로 인해 흐른 땀을 산봉우리에 부는 바람에 식히며 다시 길을 걷는다. 동고사 방향으로 길을 내려가면, 가파르기는 해도 운치가 있다. 흡사 예전 꿈속에서나 보던 숲속의 요정이 다니던 길과 같은 곳을 지나야 한다. 조금은 미끄럽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즐겁다. 산이 높지가 않아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는 승암산길. 산이 있어 산에 오른다고 하지만, 난 길이 있어 길을 걷는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주 시가지와 견훤왕궁지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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