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지역에 구전되는 전설의 남사당패 꼭두쇠인 바우덕이의 노래 사설이다. 바우덕이의 이름은 박우덕, 또는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전해진다. 남사당패는 여사당패와 구별을 하기 위해 조직된 과거의 유랑집단의 한 유파이다. 굳이 ‘남사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남자들로 연희패가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의 근원지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 일대이다. 이곳에는 칠사당, 혹은 팔사당이라고 하여서, 예전 유랑집단인 남사당패들이 한 겨울을 나곤 했던 곳이다. 유랑집단은 봄서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순회하며 기예를 보여주는 대가로, 돈이나 곡물들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청룡사 인근으로 돌아와 기예를 연마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남사당패 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있는 ‘개다리패’였다. 안성 남사당의 풍물패는 기(旗)에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 이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에 안성의 남사당패들이 참여를 하여 노역자들을 위로한데서, 대원군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늘 풍물패의 위에 있었다.

 

피지도 못한 채 숨져간 바우덕이

 

당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였다. 그 자태가 남자들을 녹일 만큼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노역장에 들어서면 당연히 뭇 사내들의 눈길이 바우덕이에게 꽂혔을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바우덕이가 이끄는 개다리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육덕패, 복만이패, 이원보패 등도 바우덕이와 비슷한 연대에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자태와 기예에 출중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바우덕이는 남다른 존재이다. 1987년인가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라는 소책자를 쓰기위해, 안성에서 오랜 시간을 기거하면서 청룡사를 20여 회나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안타까운 것은 바우덕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였다. 다행히 바우덕이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진 토민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작은 서책이지만 하나하나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바우덕이, 안성을 들릴 때마다 늘 마음 한편이 짠한 이유였다.

 

오랜만에 다시 안성을 찾다

 

한참이나 안성을 찾지 못했다. 9월 7일,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의 공연장이 있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를 찾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에 들렸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실내 공연장이 새로 자리를 틀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는 테마공원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민속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공연장 앞으로 가보니 남사당패의 자랑인 칠무동 상이 서있고, 그 뒤편으로는 각 잽이들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이 줄을 지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바우덕이 상을 보고 훔칫 놀랐다. 이 바우덕이의 상과 닮은 여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영란(여, 36세. 바우덕이 풍물단 상임단원), 바로 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바우덕이의 환생, 하영란

 

하영란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0살에 안성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했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 당연히 무동을 맡았다. 하영란이 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서운면은 바로 남사당패들의 근거지가 있던 청룡사가 있는 곳이다. 그곳 서운초등학교에 다니던 하영란은 풍물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풍물패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그 풍물패를 따라 다닌 것이다. 그들을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전날 끝까지 따라가 보아둔 풍물패들의 모이는 곳으로 달려가, 그날부터 남사당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것이 벌서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바우덕이의 동상과 참 많이도 닮았다. 장고를 메고 마당에 나와 장고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당시의 바우덕이의 모습도 저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딸 둘을 둔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마치 새털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30년 가까이 속 앓이를 하던 바우덕이에 대한 아픔이 조금은 가실 것만 같다.

 

풍물단 상임단원 하영란 대담

 

- 25년이란 오랜 시간 풍물단에 속해 있으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생업을 위해 출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 와서 나의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섭니다. 풍물을 하는 것은 나의 일상입니다.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과 같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25년 동안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공연을 할 때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렇게 시립 풍물단이 된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공연을 하면서 팬들도 생겨났죠. 그분들이 늘 ‘다시 보러 오겠다’거나 혹은 ‘정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커다란 사진을 빼다가 직접 갖다 주시기도 하시고,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기도 하십니다. 그런 교감이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처음에 아버님의 반대가 심하셨을 때, 몰래 배우면서 공연 등을 하느라 애를 먹은 일이 힘들었죠.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매일 안성서부터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차 시간에 쫓겨 다녔을 때인 듯합니다. 차를 놓치면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와서 다시 안성으로 오면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새벽 5시면 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학교를 가야 했으니까요.

 

- 아이 둘을 키우면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개는 아이가 둘이면 이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란 생각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애를 낳고나서 몸무게가 15kg이나 쪘는데,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2시간을 먼저 출근해 걷고 또 뛰고는 했죠. 나를 이기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요. 아마도 그런 열정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동안 해외공연도 많이 했을 텐데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는지?

일 년이면 3~4회 정도 해외공연을 하니까, 그동안 30~40회 정도 해외공연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에 헝가리 세계민속축제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를 해, 대상을 받고 월계관을 썼죠. 아마 그것이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서운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전교생이 다 합니다. 도시처럼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할 수 없는 일이죠. 실내 연습장이 없어 무더위에 운동장에서 하는데, 이 남사당풍물 만은 꼭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올해 제가 풍물을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라서 작은 공연이라도 무대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둘째를 낳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죠. 그래서 착실히 준비를 해 30년이 되는 해 개인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렀네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저희 남편(강규원, 46세. 건축 감리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공연을 보고 늘 서포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항상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 고맙습니다. 30년 기념무대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부끄럽지 않은 바우덕이의 후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길에서도 저만큼 커다란 석등 한 기가 보인다. 석등의 전체 높이가 5.18m나 되는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187에 소재한, 보물 267호인 용암리 석등. 그 규모만큼이나 대단한 크기에 뛰어난 조각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용암리 석등은 우리나라에서도 크기나 아름답기로 손 꼽힐만한 대단한 석조미술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임실군 신평면 소재지에서 좌측 운암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길가에 보물인 용암리 석등이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석등은 아마도 예전에 사지가 있었던 곳 같다. 축대 위에는 몸돌은 사라진 채 덮개석만 남은 탑이 남아있고, 축대 위로 오르는 돌계단의 한편 난간과, 돌계단의 밑 부분도 예전의 석재를 이용해 복원을 해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커다란 용암리 석등이 서 있다.


뛰어난 조각이 돋보이는 석등

이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곳을 몇 번이고 들려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버스를 이용해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한 가지 문화재를 보기 위해 하루를 소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결정이다. 마침 겨울철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를 하여 길을 나섰다. 이 석등을 보는 순간 어렵게 나선 답사길이지만, 이것 하나만 갖고도 아깝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석등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용암리 석등. 크기가 크면서도 절대로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 앞에서면 6m에 가까운 이 큰 석조미술품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발목까지 눈이 빠지는 것도 모른 체, 석등 가까이 다가간다. 눈밭에는 발자국이 찍히면서 소리를 내지만,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길 틈이 없다.
        


귀꽃을 아름답게 장신한 덮개석 밑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놓고, 그 밑으로는 3단의 받침돌로 구성이 되었다. 이 용암리 석등은 아래 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기고, 윗면에는 커다란 꽃 장식을 두었다. 위에는 구름을 새겨 넣었으며, 간주석인 가운데 기둥은 장고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연꽃을 새긴 마디를 둘렀다. 이와 같은 모양의 석등은 보물 제35호인 남원 실상사 석등 등에서도 보이는 제작기법이다.

보면 볼 수록 석등에 빠져들다.

한참이나 석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과연 이것이 장비조차 변변치 않던 통일신라 시대에 인간이 만들어낸 조형물일까? 많은 석등을 보앗지만,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석등은 흔하지가 않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장방형의 창을 내었다. 이러한 조형기법은 실상사 석등이나 보물 제111호인 개선사지 석등 등에서 보이는 제작기법이다.



화사석의 위에 올린 지붕돌은 경사가 급한편이다. 그 각 모서리에는 커다란 귀꽃을 조각하였는데, 그 귀꽃의 아름다움도 예사롭지가 않다. 그리고 덮개석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다.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이 놓여있다. 화사석에는 별다른 조각은 하지 않았으나, 8면에 낸 창이 시원하게 보인다. 세상을 밝히는데 있어, 좀 더 밝은 빛을 발하도록 한 마음이 엿보인다.

석등 주변을 떠나지 못하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용암리 석등이다. 이 석등이 서 있는 곳은 '진구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구사에 대한 기록이 없는 편이다. 다만 고승 보덕화상에게는 법륜이 높은 11명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적멸과 의융 2인이 임실에 진구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용암리 석등'은 2010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명칭을 변경할 때 '진구사지 석등'으로 바꾸었다. 지붕에 하얀 눈을고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등. 도대체 그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은 석등을 조형을 할 수가 있었을까?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것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이렇게 조각을 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디 한 곳 부족함이 없다. 어디 한 곳 더 지나치지도 않는다. 당연히 그 자리에 그런 조각을 해 놓아야 할 것같은 자리에,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돌로만든 조형물이지만 딱딱하지가 않다. 그저 흙으로 잘 빚어놓은 것처럼 부드러움이 있다. 하얀 눈밭에 서 있는 석등의 모습이, 마치 이곳이 천상인양 착각을 하게 만든다. 길을 떠나야 하지만,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아마도 이대로 이 석등 곁에서서 못난 돌미륵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옛 사지인 선림원지에 소재한 네 기의 보물 중 보물 제445호인 석등은 사지 안에 자리한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림원은 발굴 당시  출토된 신라 범종에 의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기단과 상,중, 하대석을 놓는다. 위로는 덮개석인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리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보물 제445호인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 팔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받침돌과 머릿돌에 귀꽃을 장식해

선림원지 석등은 아래받침돌과 머릿돌에 같은 형태의 귀꽃을 장식하고 있다. 받침돌인 지대석은 4매의 네모난 돌을 받쳐놓고 그 위에 팔각의 하대를 올려놓았다. 하대의 각 면에는 안싱을 음각하였으며,그 위의 복련에는 팔각에 앙증맞은 귀꽃이 돌출되어 아름답다. 그 위로는 가운데 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이 허리가 잘록해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렀다. 간석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이 석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석등의 간석과 화사석은 색깔이 달라 보는이로 하여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에 파손된 부분을 보수 한 것은 아닌지.


받침돌의 뛰어난 조각과 음각한 안상(아래)

귀꽃이 조형미의 극치

전국에 있는 많은 석등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팔각으로 조형을 한 석등에 받침돌과 머릿돌에 함께 귀꽃을 장식한 예는 흔하지가 않은 듯하다. 화사석은 사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장방형의 액을 마련하고 그 안에 한 구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형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다.


장고통처럼 조성한 간석

화사석을 덮은 몸돌은 팔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일부가 깨어져 나간 지붕돌의 귀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다는 인도감 때문인가 보다. 처마의 선은 부드럽게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귀꽃조각과의 만남이 자연스러워 이 석등의 조각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석등의 맨 위에 올린 상륜부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일 이 파손이 된 귀꽃과 상륜부만 온전하다면, 아마도 국보로 지정이 될만한 걸작이다. 장고통처럼 조형한 간석 상, 하의 권운문이나 상대석에 조각한 겹잎앙련 또한 이 석등이 갖는 아름다움이다.


귀꽃을 장식한 머릿돌과 화시석

신라 시대의 석조미술 품 중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훌륭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림원지 석등.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나라의 뛰어난 예술세계를 느낄 수가 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문화사대주의자들이 우리 문화를 폄하하는 일만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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