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수원시 팔달구청 신청사 업무시작

 

여기 살리

여기 살리

여기, 팔달에 살리

 

팔달산 밑, 팔달문 밖

사방팔방 다 오가는

여기 두고 어디런가

새벽 같이

대낮 같이

2백년의 꿈 여기 살리

수원 팔달 여기 살리

 

2014년 봄 고은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3(매향동)에 새로 자리를 잡은 팔달구청(구청장 김찬영)의 입구에 서 있는 시비에 적힌 고은 시인의 시 팔달에 살리이다. 팔달구청은 시청사에서 31일부터 신청사에서 일제히 업무를 시작했다. 아직 주변 경관은 마무리 되지가 않았지만 구민들의 편의를 위해 행정업무는 개청식을 하기 전에 시작을 한 것이다. 이 신청사는 화성박물관과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다.

 

팔달구의 신청사는 수원의 중심이자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 성곽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는 화성행궁과 연무대, 창룡문과 방화수류정, 봉돈 등과, 화홍문에서 유입되어 남수문으로 흐르는 수원천을 끼고 있기 때문에, 수변, 문화, 역사, 행정이 하나로 융합되는 상징적인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녹색환경 건물

 

팔달구 신청사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면적 12628.11로 단순한 관공서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평이다. 주변에는 충분한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전시공간과 북카페, 소통의 공간과 저탄소 녹색환경의 수도 수원에 걸 맞는 태양광 발전, 옥상녹화, 자연환기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신청사 1층에는 종합민원과, 세무과, 기업은행, 당직실, 어린이집이 자리를 잡고 있고, 2층에는 구청장실을 비롯해 행정지원과, 안전주민자치과, 건설과, 건축과, 정보화교육장 및 의원실이 자리하고 있다. 3층에는 대회의실을 비롯해 사회복지과 경제교통과 환경위생과 교통상황실과 휴게실, 매점, 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민들에게 최상의 서비스 제공할 것

 

김찬영 팔달구청장은 팔달구민의 오랜 숙원이 비로소 해결되어 구청이 구민들 곁으로 가게되었다. 이번 신청사는 구민들에게 최고의 행정서비스와 더불어 문화와 휴게공간, 녹색공간을 제공하여 구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종합민원실에 일을 보러왔다고 하는 한 구민은 그동안 수원의 딴 구들이 모두 단독 청사를 갖고 있는데 우리 팔달구만 월드컵경기장에 세를 들어있어 많이 불편했다. 오늘 이렇게 신청사에 와보니 우리 팔달구 청사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기쁘다고 한다. 한편 팔달구청의 개청식은 45일 오전 11시에 열릴 예정이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번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서 있는 보물 제928호는,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사리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여러 사리장치들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사리탑 1기와 탑 안에서 발견이 된 6물 6점을 지정하였다. 이 사리탑은 영원히 우리 땅에서 볼 수 없었던 것 중 하나이다.

 

보물의 공식 지정 명칭은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이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사리를 모셔 둔 탑으로, 광해군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부처의 보호를 바라며 봉인사의 부도암이라는 암자에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다. 사리탑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보물 사리탑

 

이 사리탑은 1620년경 봉인사 부도암(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소재)에 세워졌던 것이다. 일제시대인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고베로 반출되고 그 뒤 대판 시립미술관에 보관되었다가, 1987년 2월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봉인사 사리탑은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유물연구에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높이 3.08m의 사리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은 상·중·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위로 북처럼 둥근 탑 몸돌을 올려 사리를 모셔 두었다. 8각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린 뒤 꼭대기에는 길쭉한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보기에도 조선시대의 사리탑 중 걸작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사리탑의 전형

 

이 탑의 뛰어난 조형은 기중돌인 중대석에 새겨진 구름과 당초문양, 꽃잎과 여의주무늬, 상대석 옆면 테두리 속의 당초무늬, 탑신부의 운룡무늬 등에서 새로운 조형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사가 급한 지붕에 처마 밑으로 서까래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거나, 윗면에 용머리를 새긴 수법 등은 기존의 사리탑과는 다른 형태이다.

 

상륜부가 길쭉하게 올라간 형태나 왕릉의 호석처럼 주위에 난간과 궁판석을 돌린 방식 등은 이 탑이 곧 조선 초기에 제작된 중원의 청룡사의 사리탑이나, 양주의 회암사의 사리탑을 모방하여 조선 초기 사리탑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작연대가 밝혀진 사리탑

 

이 탑의 발견 당시 외합 속에는 명주실과 비단, 향이 남아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내합의 뚜껑에는 마름모형의 무늬를 볼록 눌러새김의 수법으로 낸 후 그 안에 역동적인 운룡무늬를 장식하고 금박을 입혔다. 그리고 이 합의 밑바닥에는 네 줄의 명기와 함께 '만력 48년 경신 5월(萬曆四十八年庚申五月)의 글귀가 새겨져, 이 유물이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봉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사카시립미술관에 전시가 되어있던 이 사리탑은, 1987년 소유자인 이와다 센소의 자발적인 기증 반환으로 되돌아 오게 된 것이다. 이는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유네스코 협약정신에 의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수많은 누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찬탈해 간 일본인 중에, 이런 양심적인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놀랍기만 하다.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문화유산들. 그 역사 속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했던 문화재들이, 언제나 돌아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인지.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들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답답함만 더해간다.

옛 고택 중에는 한데 부엌이라고 부르는 구조물이 있다. 한데 부엌이라고 하면 건물 안에 속한 부엌이 아닌 밖으로 노출이 된 부엌을 말한다. 이런 부엌은 비가 많이 내리거나 습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옥의 구조이다. 충북 제천 청풍 후산리 고가에는 이 한데 부엌이 있다. 한데 부엌은 기존의 가옥 건물 한편을 안으로 집어넣어 그곳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후산리 고가는 툇간을 달아낸 한데 부엌이다.

 

대청에 재실을 배열한 후산리 고가

 

 

현재 청풍문화재단지 안에 소재한 후산리 고가는 원래 제천시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던 조선 말기의 가옥이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문화재단지 안으로 1985년에 이건했으며,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ㄱ 자 팔작집으로 지어진 후산리 고가는 좌측으로 부엌과 2칸 크기의 윗방이 있고, 꺾어진 곳에 두 칸 대청이 두었다. 이 대청의 윗방과 접한 부분을 안쪽으로 돌출을 시켜 재실을 배열했다. 이러한 경우는 드문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집 뒤쪽으로 돌출을 시켜 재실 등을 배열하고 대청을 넓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넓지 않은 후산리 고가의 조금은 답답한 듯한 구성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부엌에 특별함이 있다

 

후산리 고가의 부엌은 남다르다. 그저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만한 것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엌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엌이라는 것이 부녀자들의 공간이다 보니 나름대로 세사한 부분까지 정성을 쏟은 듯하다. 우선 부엌에 난 까치구멍이 색다르다. 일반적으로 살창으로 구성하는 까치구멍이지만, 윗방의 다락 아랫부분에도 까치구멍이 나 있다. 그럼에도 부엌문 위에는 창처럼 끝을 만든 살창을 내고 있다.

 

부엌의 뒤편으로 나 있는 퇴칸 위로도 칸이 넓은 살창을 내어 놓았다. 또한 뒤편의 벽을 밖으로 돌출을 시켜 문을 달아 부엌의 기물들을 넣어 놓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그런가하면 후산리 고가의 부엌 천정은 나무를 가로, 세로로 가로질러 '정(井)'자 모양의 문양이 드러나게 했다. 작은 것 하나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부엌이다.

 

 

한데 부엌과 툇마루의 용도, 감탄을 하다

 

한데 부엌이란 말 그대로 밖으로 노출이 되어있는 부엌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한편 위를 돌출시키고, 그 아래쪽에 아궁이를 들이는 것이 한데 부엌의 모습이다. 그러나 후산리 고가의 한데 부엌은 툇간을 달아냈다. 후산리 고가는 대청에서 오른쪽으로 건넌방과 사랑방을 두고 있다. 건넌방과 사랑방의 툇마루를 높이하고, 그 밑에 함실아궁이를 드렸다.

 

한데 부엌은 한 칸 정도의 규모로 달아냈는데, 사랑방의 앞쪽으로만 툇간을 달아냈다. 이는 사랑방에 손님들이 찾아들 것을 대비해, 불을 자주 땔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즉 건넌방은 윗방이 있어 겨울철에는 불을 자주 땔 필요가 없지만, 사랑방의 경우는 다르다. 겨울철에도 사랑방에 손님이 찾아들면, 방을 뜨듯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데 부엌을 툇간으로 달아낸 것이 후산리 고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

 

사랑채를 별도로 구성하지 못한 후산리 고가는 나름대로 사랑채의 용도를 꾸며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의 옆으로 두 곳의 문을 내고, 그 앞에 넓은 툇마루를 놓았다는 점이 색다르다. 툇마루는 처마를 길게 빼어 마루 끝과 처마 끝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였다. 툇마루는 사랑방의 옆면 전체를 모두 낮게 깔아, 이곳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넓은 툇마루에 앉아 술 한 잔에 시 한수를 읊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이리라.

 

 

 

이 사랑방의 툇마루만이 아니고 후산리 고가의 툇마루들은 일반 가옥마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는 비교적 넓지 않은 후산리 고가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활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인 듯하다.

 

집은 그리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사용하기에 편안하게 구성한 후산리 고가. 조선조 말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민가 가옥의 구성을 보이고 있는 후산리 고가는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좁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그 공간의 구성을 적절히 하여, 집안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볼수록 정감이 가는 가옥이

 


전북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에 소재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운산리 삼층석탑. 이 탑을 찾아들어갔다가 고생을 어지간히 했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산등성이까지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길을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안내자이다.

탑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내후사동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운산리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이다. 그러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탑의 모습을 보니 옮긴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다. 탑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탑에는 앞면이라고 먹물로 쓴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이 탑을 옮긴 것일까?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탑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울어 

원래 운산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서있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 탑을 진안읍으로 옮겨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는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울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치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꿈도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되자, 마을에서는 이 탑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탑을 ‘신들린 탑’ 이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촛불을 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는데,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평범한 삼층석탑, 찾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천연기념물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를 찾아가다가 보니 ‘운산리 삼층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나무를 답사하고 난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운산리 삼층석탑을 찾아들어갔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니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할까? 안내판 하나가 없다. 이럴 때는 대개 직진을 하면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직진을 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 길이 좁아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물을 집 한 채도 없는 눈길을 아무리 가도 탑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계속 간 것이 결국엔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답사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한데, 마음이 조금해진다. 기던 길을 급히 돌아 나오다가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이 아니고, 들어오기 전 마을이라는 것이다.


처마는 약간 위로 올려졌다. 받침돌에는 기둥을 상징하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내후사동으로 들어갔다. 마을입구에 서 있다는 삼층석탑은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안내를 하는 표시 하나만 길이 바뀌는 곳에 세워주었어도, 이런 고생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마을주민에게 물어볼 수밖에. 바로 앞에 탑을 두고 찾아다닌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탑이 보인다. 그러나 길에서는 안쪽에 숨겨진 듯한 탑을 찾기란 수월하지가 않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이층의 가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몸돌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일층 몸돌의 한 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평면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탑의 머리부에는 꼭대기에 동그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일층의 몸돌에 비해 이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떨어진다.


1층 몸돌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고, 받침돌 하단에는 안상이 음각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변형된 모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두 시간이나 소비를 했다. 하지만 이 탑 하나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 어찌하랴.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흙이 아직도 묻어있는 운산리 석탑이 주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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