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구절이 있다. 이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의 정의처럼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이 글은 세상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째는 종교적인 사랑인 ‘아가페’이고, 둘째는 광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필리아’이다. 필리아는 이성, 삶, 자연 등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 사랑은 ‘에로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뜻한다. 네 번째는 ‘스토르게’로 혈육의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세상을 좀 보시지.

사람들은 곧잘 ‘사랑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과연 사랑은 영원한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이 네 가지의 사랑 중에 스토르게는 영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속을 뒤집어 보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식을 추행하고, 부모를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하듯 내다 버리고 있는데,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는 없다.

이성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같아야 한다. 그러나 사랑이 어찌 그럴까? 사랑은 물이 흐르듯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을 종교에서는 영원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세상이 변해가면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사랑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사랑의 대한 정의를 내리려면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리 해야 한다. 적어도 2500년 전 석가모니불의 시대나, 2000년 전 예수의 시대에는 이런 보편적인 사랑이 통했을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사랑이 과연 통하는 것일까?

사랑은 흐른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길이 가는 데로 흐른다. 그 길이라는 것이 늘 같은 곳이 아니다. 시간이 가면 물길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을 흐르는 물에 비유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 사랑을 보면, 이건 물도 아니다. 마구잡이식으로 파헤친 무엇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드는 것 말이다.

결국 보편적인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랑의 정의가 사라졌다는 뜻일 게다. 위 네 가지 사랑 중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 중 한 가지를 비유로 들어도 좋다. 과연 이 시대에 그런 사랑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들이 공존한다.

이제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한계에 다달았다. 예전처럼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부모, 부모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내던 자식도 볼 수가 없다. 성인들이 베풀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조차 개 같은 짓을 하기가 일쑤인 세상이다. 과연 이 세상에 사랑의 정의는 존재하는지 의문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인간이 공존한다. 하나는 그래도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사람의 탈을 쓴 ‘개만도 못한 인간’이다. 이렇게 두 가지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수위가 달라졌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오늘 곰곰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느 사람이 정말 인간답지 못한 짓을 하다가, 배우자에게 걸려 길거리로 내쫓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세상은 이제 사랑태령도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왕 쾌락을 추구하려면 표시 안나게 잘했어야지. 하긴 내놓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세상 참. 이런 사람들도 자신들은 '사랑'이라고 표현을 한단다. 그래도 영원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흔히 연애이야기를 한다. 모두가 박사인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남자들은 술자리에서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는) ‘자칭 연애박사’라고 하는 녀석을 만났다. 글쎄다, 이 녀석이 언제부터 그렇게 연애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야 세상을 조금 살았으니, 경험이야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야 많겠지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경청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서, 참 이 나이에 이런 이야기가 당치나 한 말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랬더니 자칭 박사 이 녀석, 아주 정색을 하고 덤벼든다. 자신이 정말 많이 연구를 했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한 마디의 질문이 입을 다물게 하는데는 최고란 생각이다. 질문을 했다.


“연애에 정석이 있는 것이여?”

“연애의 정석이라, 글쎄”
“그것도 답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칭 박사라고 하냐?”
“내가 보기엔 그렇다. 연애에는 정석이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을 해봐라. 연애에 어떻게 정석이 있을 수가 있나.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연애의 방식이 다르다. 그리고 또한 상대방의 마음도 다 다르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것이 정석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있겠나. 정석이란 말 그대로 표준이요, 모든 사람에게 통용이 되어야 하는데 연애에 어떻게 그런 정석이 있을 수가 있나”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하다. 사람마다 연애를 하는 방법이 틀리고, 상대를 대하는 성격도 틀리다. 거기다가 연애를 하는 당사자들의 마음가짐도 다 다르다. 그렇다고 연애담을 이야기하는 녀석이 정석이 없다고 하니, 이 녀석 박사가 아닌가 보다.

“연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냐?”

두 번 째 질문을 퍼부었다. 녀석은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아마도 자신이 한 대답이 스스로 흡족한 듯하다. 뜸을 드리지도 않고 바로 대답을 한다. 녀석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연애는 먼저 상대를 파악하라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상대방의 성격, 외모, 가정 등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 사람마다 개성이 달라 자칫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기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상대의 모습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상대의 아픈 곳을 건드릴 수도 있다 것. 더구나 내가 연애를 하는 상대방 가정이 남보다 못하다고 할 때는 ‘누구 네는 어떻다’ 등의 이야기는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기호를 먼저 파악하라
연애를 할 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기호를 파악하랴 한다는 것. 음식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는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은 기본적으로 파악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을 모르는 체 상대방을 위한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기본이란다.

이 외에도 녀석이 이야기를 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듣고만 있어도 머리가 아프다. 연애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를 진작 알았더라면.


“그럼 연애를 할 때 최고의 상대는 어떻게 알 수 있냐?”

“참 이제 와서 네가 그것을 알아 무엇 하려고?”
“그래도 알아두어야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하긴 그래,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은 달라지니 알아서 들어”

상대방을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방법은 약간의 허점을 보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못을 저질러 보라는 것. 그것을 못 본체 넘기는 상대는 50점, 꼬치꼬치 따지되 이해를 하는 사람은 70점, 그리고 못 본 체 하면서 농담 삼아 웃으면서 자기의 주장을 피력하는 사람은 90점 짜리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수긍이 간다.

자칭 연애박사에게서 듣는 연애특강. 술자리에서 하는 특강은 늘 즐겁게 마련이다. 맞거나 말거나 항상 연애는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성간의 연애이고,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란다. 하기에 연애는 나이에 관계없이 가슴 설레게 만든다는 것. 오늘 한 번 연애를 시작해 봐. 나이께나 먹은 사람들의 연애 중에 가장 좋은 상대는 바로 자신의 곁지기라는 것. 늘 연애를 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가 않다. 국어사전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1.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 2.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3.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4.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5. 열렬히 좋아하는 이성의 상대」를 말한다고 적고 있다.

많은 사랑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랑은 역시 이성간의 애틋한 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를 한다. 이성에 대한 감정표현을 사랑이라고 볼 때, 그 사랑이란 것이 과연 나 하나만의 감정표현으로 끝나는 것일까?

옥에 갇힌 춘향이를 찾아간 이몽룡(남원 춘향 테마파크에서) 


사랑이 첫 눈에 반해 생기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첫눈에 반했어’ 라는 말을 쓴다. 물론 첫눈에 반할만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꿈꾸는 이성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느낀다면 첫눈에 반할만하다. 하지만 이 ‘첫눈에 반했어’는 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나중에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더 많은 후회할 일을 만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은 책임을 배제한 감정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책임을 함께 수반해야 하는 감정이다. 좋아하는 것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내 맘대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과 좋음의 차이는 엄청난 것인데도,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 많은 불상사를 야기하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 것’은 사랑이 아닌 좋아하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 첫눈에 반한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이성에게 다가갔다가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가 일쑤이다.


젊은이, 사랑을 할 준비는 돼 있나?

지금은 세상이 변해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구별을 하지 않는다. 그저 당장 좋으면 ‘하룻밤 풋사랑’이라도 즐기려고 한다니.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성간에 사랑이란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말을 하면 일부의 식자인체 하는 사람들은 ‘대충 좋아하면 서로를 원하는 것이지, 개고 같은 마음의 준비는 해 필요한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성간의 사랑이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와 내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고, 내가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저 ‘나도 이성이 있다’라는 정도로 자랑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서로간의 신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기에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남녀 서로가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라는 것은 물론 마음의 상태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 사랑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의 이성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관계를 갖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좋았다는. 그래서 ‘쿨하게 헤어졌다’는.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요즘 시쳇말로 쿨하게 헤어짐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노장 한 분이 사랑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질문을 하신다. “너는 사랑할 준비는 돼 있느냐?” 준비가 필요하냐고 반문을 했다. 당연히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요즘 사랑은 사랑이 아닌 탐닉에 불과하다. 정말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울 것도 없다. 사랑은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상대를 충분히 알아야 비로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알아감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다. 너무 빨리 탐닉을 한다면, 그 탐닉이 끝나면 서로에게 실망을 하게 되고, 그 다음은 헤어짐이란 아픔이 기다리게 된다. 하긴 그런 탐닉을 전제로 했다면 아픔도 없겠지만. 그래서 사랑은 준비가 필요하다. 적어도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사랑이란다.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사랑을 할 준비는 돼있냐?”

남녀사이만큼 아리송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알고도 모를 것이 사람의 속이라고 한다지만, 그것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성이라면 더 더욱 어렵다. 오늘 이야기는 좀 색다른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몹쓸 이야기에 속한다.

예전에 한 사람을 사귄 적이 있다. 살아가면서 몇 사람이나 사귄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냥 웃고 만다. 사귀는 것도 다 정도가 있으니 말이다. 그저 요즘 젊은이들 생각대로라면 밥 먹고 차 마시는 정도라고 해두자.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래도 우리 때는 그런 사이라고 해도 상당히 진전된 관계쯤으로 여길 때였다.


다투고 난 뒤 달라지는 행동 눈여겨보아야

아무리 사이가 좋은 사이라도 사귀다가 보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부부사이는 아니라고 한다지만, 남녀사이의 싸움 역시 오래가지 못하는 법. 그저 조금 머쓱하기는 해도 곧 풀어지고 만다. 오래 끌어보았자 서로 상처만 커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다투고 나서 더 사이가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한다나.

그런데 이렇게 다툴 때도 상대방은 ‘이성’을 들먹이지를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자,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리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성간에 이성이 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마음이 달라진다면, 그때부터 사람은 돌변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금 다툼이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말은 가급적 하지 않던 사이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이성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을 문란한 사람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강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성을 들먹이고 연락이 끊긴다면, 그것은 새사람이 생겼다는 신호

그렇게 이성을 들먹이기 시작한 사람이, 이번에는 연락이 끊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엉뚱한 핑계를 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말에 친구가 같이 어디 가자고 하는데 갔다 올게”
“날이 안 좋다고 하는데 꼭 가야 하나?”
“약속을 한 것이라, 지켜야지”

이런 친구 핑계가 잦아진다거나, 집안사람들을 끌어들여 핑계를 대기 시작한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못 살겠다던 친구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일 집안에 일이 있어서 못 만나”
“엄마가 내일 같이 어디 좀 같이 가재”

평범한 대화 같다. 하지만 이 친구 이때쯤에는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하는 날, 내내 연락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다 늦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모르고 전화를 차에 두고 숙소로 들어갔다거나, 배터리가 떨어진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열 명 중 아홉은 이미 마음이 떠났다고 보면 된다. 그런 사람에게 구차하게 매달릴 필요는 없다. 하루라도 빨리 마음의 정리를 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다. 그만큼 나중에 받아야 할 상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한다. 딴 사람과 함께 돌아다니는 사람의 마음이 돌아올까? 아마도 거의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갑자기 돌변하는 친구,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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