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앞두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저마다 국회로 입성을 하겠다고 난리들을 치는 사람들. 그 중에는 참으로 국회로 보내 국민들의 살림을 맡길만 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건 머 턱도 아닌 사람들조차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보면 한 마디로 가관이다.

저마다 자신만이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난리법석을 치는 사람들. 그들에게 꼭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바로 고택에서 좀 배우라는 것이다. 그 안에 정말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올바로 끌고 갈만한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증평에 있는 연병호 선생 생가. 선생은 제헌국회의원과 2대 국회에서 활동을 하셨다. 집은 모두 네 칸으로 아랫방과 윗방을 연결하는 문에는 문짝도 없는 집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의 집을 보라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의병 이인영 팔도의병 총대장의 집. 이런 집에서 나라를 위해 떨치고 일어난 의병총대장이 살았다.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보성 이용욱 가옥의 담장에 난 소리통.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이 소리통을 통해 듣고 아픔을 달래주었다 


고택에는 국회의원이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다. 나라의 독립은 위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루면서도, 정작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4월 11일이 제19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다. 제발 이번에 의원이 될 사람들은 연병호 선생의 백분지 1이라도 닮은 사람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병호 선생뿐이 아니다. 정말로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수많은 일을 하다가 간 선조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 국회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을 보면 먼저 답답해진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자리한 의병 총 대장 이인영의 생가,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의 생가 등을 보면, 이 분들이 진정 이 나라를 살피기 위해 어떻게 살았나를 알 수가 있다.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말로 남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전남 보성군에 이용욱의 고택에 가면 담장에 소리통이 있다. 그 밖은 마을 공동우물이다. 땅의 한편을 담을 들여쌓고 우물을 마련해, 그 우물가에서 들리는 동네의 모든 소리를 소리통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마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을사람들의 작은 고민까지도 일일이 소리통을 통해 듣고 해결을 했다니 놀랍기만 하다. 이런 소리통이 되어야한다.

구례에 가면 운조루가 있다. 알만한 사람은 이 운조루 안에 타인능해가 있다는 것을 다 안다. 타인능해는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식량창고이다. 누구나 다 먹을 것이 없으면 이곳에 와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다. 엄청난 재산을 갖고 해마다 이런저런 일로 재산을 늘리는 것을 자랑삼지 말고, 타인능해가 되어 남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아야 한다.

의원나리들. 저마다 잘났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바보스럽게 국민들이 넘어가 주지 않는다. 스스로 소리통이 되고, 타인능해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연병호 선생의 생가, 전봉준 선생의 생가, 이인영 대장의 생가에서 좀 보고 느껴라. 국회의원은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전남 구례에 유명한 집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운조루일 것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사랑채에 붙어 있던 현판이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운조루란 명칭으로 부른다. 이 운조루를 다녀 온 것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나가는 도로 좌측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며 토지면 오미리에 해당한다.

고택 기행을 하면서 많은 집들을 찾아다녔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물론 일인당 1,000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 집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일 테고.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계시는 운조루는, 한 때는 우리나라의 최고 명당에 자리한 집으로 유명했다. 남한 3대 길지 중 한곳이라는 운조루. 금환낙지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조선조 영조 52년인 1776년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집이다.



T 자로 구성된 사랑채(위)와 대문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집

운조루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집이다. 처음 질 때와는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18칸이나 되는 문간채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가운데 솟을대문을 둔 운조루는 좌우로 - 자형으로 길게 대문채와 행랑채가 자리를 한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T자형으로 마련한 사랑채가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이 큰사랑이고, 우측이 작은사랑이 된다.

운조루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집이란 생각이다. 이집을 둘러보면 참으로 사람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 작은 사랑에서 중문을 들어서려면 길이 비탈이 져있다. 혹여 그런 비탈에 사람이라도 다칠까봐, 널빤지를 이용해 비탈을 바로 잡았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나무로 만든 통이 있다. 통 밑에는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기관을 장치했는데, 이 나무독이 바로 그 유명한 ‘타인능해’이다.



큰사랑의 툇마루와 괴임돌. 작은 사랑에 비탈길을 바로잡는 널판(가운데)와 없는 사람들을 구호하는 쌀독인 타인능해

타인능해는 쌀 두가마가 들어간다고 한다. 이곳에 쌀을 넣어놓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이 와서 쌀을 가져가도록 만든 것이다. 나눔의 미학을 이루는 곳 운조루. 민도리집으로 지은 이집은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이 연이어져 있다.

대문 위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의 솟을대문 위에는 호랑이 뼈를 걸어놓았다. 아마 집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집안에서 태어나는 남자들이 호랑이와 같은 용맹을 떨치기를 바라서 였거나. 큰사랑채는 앞에 놓인 툇마루가 이집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듯, 나무마루를 두텁게 놓고, 마루를 받치고 있는 고임돌도 각이 진 것을 사용하였다. 사랑채 끝에는 개방을 한 누정을 만들어 멋을 더했다.


대문 위에 걸린 호랑이 뼈(위) 와 안채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는 ㄷ 자형이다,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광이 있고, 방과 대청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 쪽은 이층으로 꾸며놓아 멋을 더했다. 수많은 한옥을 찾아다녔지만, 운조루 만큼 멋을 보이는 집은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다락방의 형태로 꾸며진 부엌의 위에도, 난간을 둘러놓아 밋밋함을 피해 멋을 부렸다.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운조루의 건축기법이 색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명당에 집을 지었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명당도 퇴색이 되는 것일까? 집안의 내력을 들어보면 아픔이 있는 집이다. 큰사랑 뒤편에 있었다는 별당은 사라지고, 이제는 연세가 많은 노마님이 집을 지키고 있다.


광채와 부엌을 모두 이층으로 꾸며 놓았다. 운조루에서 볼 수 있는 멋이다.

한때는 사랑 누정에서 긴 장죽을 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노심초사했을 이 운조루의 주인은, 이야기로만 남아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이곳을 들리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갈 것이니, 아직도 운조루의 명성은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5호인 운조루가 자리한다. 이 집은 조선 영조 때 심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세운,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표적인 집 중 한곳이다. 원래 ‘운조루’란 현판이 사랑채에 걸려있던 것으로 보아. 사랑채의 누정명칭을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3대 길지의 한곳에 지은 집이라고 하는 운조루는, '금환락지'의 명당이라고 한다. 금환락질한 지리사의 선녀가 섬진강 물에 머리를 감다가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빠트린 형상이라는 말이란다. 이 마을은 용두마을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의 지맥이 마을로 뻗어내려 그 기운이 이 마을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운조루에 가면 꼭 눈여겨보아야 할 것들.

1. 솟을대문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를 찾아가면 정말 ‘이런 집도 있었나.’하고 감탄을 하게 된다. 그저 휑하니 둘러보고 나올 집이 아니다. 솟을대문을 가운데 놓은 행랑은 동, 서로 길게 뻗어 있다. 그 솟을대문의 살창에 보면 양편으로 짐승의 뼈 같은 것이 걸려있다. 바로 호랑이 뼈이다. 아마 이집의 가세를 알리는 이유도 있겠으나, 호랑이 뼈를 대문에 걸어 액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2. 3개월간 시신을 안치하는 가빈터

예전에 가풍이 있는 집들을 보면 99일장을 지내기도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장례를 치루는 집들은 대개 초분을 마련한다. 운조루의 서행랑 끝에 보면 광과 같은 두 칸이 있다. 바로 ‘가빈터’ 혹은 ‘초빈’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사람이 운명 후 3일이 지나면 입관을 한 후, 이곳에 석 달 동안 안치하였다가 출상을 하는 곳이다. 안치 기간 중에는 아침에 상식을 올리고, 삭망에는 제례를 지낸다.



3. 경사가 진 곳에 놓은 널마루

운조루의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사랑채와 부엌으로 연결을 하여 꺾인 작은 사랑채가 보인다. 이 작은 사랑채의 방문 앞에는 넓적한 널판 두 개를 놓았다. 나무를 말리고 있는 듯한, 이 널판이 사실은 방문 앞에 놓은 툇마루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널판은 경사가 진 건물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건물 끝의 툇마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운조루에서 만 볼 수 있는 여유의 멋이다.


4. 나눔의 아름다움 ‘타인능해(他人能解)’

지금은 사랑채의 부엌에 큰 뒤주와 함께 놓인 이 목독은 사실은 구제를 하기 위한 도구였다. 둥근 나무를 속을 파내고 만든 나무 독은, 쌀이 두 가마 반이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밑에는 구멍이 나 있는데 마개가 닫혀있다. 이 마개를 빼면 통 안에 들어있는 쌀이 쏟아져 나온다. 가난한 이웃사람들이 쌀을 가져다가 굶주리지 않게 한 장치이다. 나눔의 아름다움을 실천한 이 집의 가풍을 엿볼 수가 있다.


5. 나무로 만든 툇돌

마루나 방문 앞에 놓는 툇돌은 대개 돌로 만든다. 그러나 온조루의 안채를 들어가면 툇돌이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두터운 나무를 흔들이지 않도록 괴어, 그 위에 시발을 벗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돌이 없어서 그랬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돌로 만든 툇돌은 오래가기는 하지만, 겨울철에는 신발을 더 차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철에는 비라도 내리면 돌은 미끄러진다. 하지만 나무는 그런 것이 없으니, 나무를 사용하여 툇돌대신으로 한 것 같다.


6. 그 외에 운조루에서 눈여겨 볼 것

현재 사랑의 뒤편에는 별당채가 있었다. 지금은 안채로 들어가는 후원이 되어있지만, 이 별당채의 자리를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또 사랑채 누정의 마루밑에는 옛날에 사용하던 우마차의 바퀴가 놓여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나무로 만든 우마차의 바퀴와 멍석등도 아이들에게 옛 풍습을 알려줄 수가 있다.

안채의 기단 위에는 돌로 만든 구조물이 하나 보인다. 아래편에는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것은 바로 돌로 만든 대야이다.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한 다음, 구멍의 마개를 열면 물이 빠져나간다.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운조루는 대가답게 여기저기 숨은 재미가 많은 곳이다. 여행길에 이곳을 지나게 되면 한 번 들려보면 좋을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역사와 함께, 아름다운 나눔의 마음을 알려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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