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스님’, 변산공동체 학교를 가다

 

‘짜장스님’으로 더 유명한 남원 천년고찰 선원사의 주지인 운천스님. 무슨 일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항상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랑실은 스님짜장’으로 봉사를 하고 계시는 분이기에 무슨 일인가 더 궁금하다. 그동안 ‘스님짜장’으로 봉사를 한 것이 벌써 3만 그릇이 훌쩍 넘었다.

 

말이 3만 그릇이다. 짜장 한 그릇에 가장 저렴한 가격인 2,000원씩만 계산을 한다고 해도, 6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사회에 돌려준 셈이다. 늘 주장하는 것이 ‘스님이 벼슬입니까? 아이들에게도 배울 것은 배워야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중생들의 아픔을 알고, 그들과 함께 세상 고통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라고 되묻고는 한다.

 

 

생태가 살아있는 곳, 부안 변산 공동체 학교

 

스님이 이렇게 상기가 된 것은 11월 25일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3에 소재한 ‘변산공동체 대안학교’를 다녀온 후이다. <변산공동체학교>는 주곡 중심의 농사를 유기농법만으로 고집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중, 고 과정을 가르치는 대안학교인 공동체학교는, 현재 10여 가구에 60여 명의 식구들이 모여 살고 있다.

 

1998년에 문을 연 변산공동체학교는 오전에는 일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한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모두 살림수업을 한다. 황토로 이룩한 학교는 물론, 모든 것을 스스로 짓고 해결을 한다. 먹거리 하나에서부터 땔감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을 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화학’이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을 합니다. 그곳에 짜장봉사를 나갔다가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왔죠. 저희들은 아직도 짜장봉사를 하면서 일부는 돈을 주고 물건을 사오고는 하는데. 이 학교의 학생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합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오히려 제가 더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벌써 이 학교가 문을 연지 15년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농약이나 화학비료, 제초 등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10배나 도 품을 팔아야 하는 농사법을 그대로 고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급자족을 위해 쌀농사며 보리, 밀 등은 물론 콩, 고추, 고구마 등 모든 것을 심어서 사용한다. 토종 씨앗을 구하기 위해 강원도는 물론 안 다닌 곳이 없다는 사람들이다.

 

 

짜장스님 공동체 학교를 가다.

 

11월 25일 짜장스님이 변산공동체 학교를 찾았다. 아이들에게 스님짜장을 해주기 위함이다. 아이들은 직접 짜장을 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그리고 한 사람이 2~3인 분은 기본으로 먹어치웠다.

 

“세상에 그동안 숱한 곳을 다녔지만, 이곳보다 잘 먹는 곳을 본 적이 없습니다. 60명이 살고 있고 잘 먹는다고 하기에, 150인 분을 준비했는데 거의 남은 것이 없어요.”

 

운천스님이 말을 하고 껄껄 웃는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의 식성이 좋았나보다. 하긴 운천스님이 만들어 주는 스님짜장 역시 일 년 간 농사를 짓고 걷어드려 만들고 있으니, 두 곳의 마음이 딱 들어맞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한 곳입니다. 아이들이 직접 도자기도 만들고 나무를 패고, 도대체 과거 우리네들의 농사법과 살아온 모습을 그ㄷ로 지키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정말 올곧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이 공동체지 어느 누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런 곳에서 규칙을 지키며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서 정말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부끄러울 정도였으니까요”

 

늘 그동안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을 것을, 당연히 사회에 돌려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운천스님이다. 당연히 자신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것으로 돌려준다고 시작한 ‘사랑실은 스님짜장’. 운천스님은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자매결연도 맺고 왔습니다. 저희들이 농사를 지을 때 함께 도와주기로요. 세상은 내가 남을 위해 베풀면, 그것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인연이죠. 말로만 하는 아름다운 인연이 무슨 소용입니까? 저는 이번에 공동체학교를 찾아가서 60여 분의 스승을 만나고 왔습니다.” 라며 크게 웃는다.

 


전북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에 소재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운산리 삼층석탑. 이 탑을 찾아들어갔다가 고생을 어지간히 했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산등성이까지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길을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안내자이다.

탑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내후사동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운산리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이다. 그러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탑의 모습을 보니 옮긴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다. 탑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탑에는 앞면이라고 먹물로 쓴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이 탑을 옮긴 것일까?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탑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울어 

원래 운산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서있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 탑을 진안읍으로 옮겨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는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울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치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꿈도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되자, 마을에서는 이 탑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탑을 ‘신들린 탑’ 이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촛불을 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는데,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평범한 삼층석탑, 찾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천연기념물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를 찾아가다가 보니 ‘운산리 삼층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나무를 답사하고 난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운산리 삼층석탑을 찾아들어갔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니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할까? 안내판 하나가 없다. 이럴 때는 대개 직진을 하면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직진을 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 길이 좁아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물을 집 한 채도 없는 눈길을 아무리 가도 탑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계속 간 것이 결국엔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답사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한데, 마음이 조금해진다. 기던 길을 급히 돌아 나오다가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이 아니고, 들어오기 전 마을이라는 것이다.


처마는 약간 위로 올려졌다. 받침돌에는 기둥을 상징하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내후사동으로 들어갔다. 마을입구에 서 있다는 삼층석탑은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안내를 하는 표시 하나만 길이 바뀌는 곳에 세워주었어도, 이런 고생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마을주민에게 물어볼 수밖에. 바로 앞에 탑을 두고 찾아다닌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탑이 보인다. 그러나 길에서는 안쪽에 숨겨진 듯한 탑을 찾기란 수월하지가 않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이층의 가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몸돌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일층 몸돌의 한 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평면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탑의 머리부에는 꼭대기에 동그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일층의 몸돌에 비해 이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떨어진다.


1층 몸돌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고, 받침돌 하단에는 안상이 음각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변형된 모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두 시간이나 소비를 했다. 하지만 이 탑 하나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 어찌하랴.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흙이 아직도 묻어있는 운산리 석탑이 주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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