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돌다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이번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가비’란 말이 있다. 비가비란 양반가의 사람으로 소리꾼이 된 사람을 말한다. 이 비가비는 우리 창극사를 통 털어 몇 사람 되지 않는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가중호걸’이라 불리는 권삼득 명창이다. 권삼득명창은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났다.

 

판소리가 처음으로 생긴 후 정조, 숙종 때 활약을 한 권삼득 명창은 전기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권삼득명창에 판소리 일대기에 기억할만한 소리꾼이다. 그러나 오래전의 명창인지라, 그 명성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몇몇 마디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한 서책에는

 

 

권마성(勸馬聲) 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권삼득명창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박경리의 『토지』(솔출판사, 1993)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곳에서도 권삼득명창을 책에 기술할 만큼 뛰어난 소리꾼이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소리조를 보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를 했다.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른 것도 권삼득명창의 소리가 우렁차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하한담(하은담)과 최선달에게서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소리꾼들은 초기소리를 한 명창들로, 우리 초기 판소리는 장원을 한 사람의 사당에 가서 축원을 하는 <홍패고사>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하한담, 최선달, 우춘대 등 초기명창을 지난 후 가장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도 이런 초기소리를 했을 것이다.

 

 

권삼득명창의 흔적을 찾아가다.

 

완주군 용진면 면소재지에서 지방도를 따라 소양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마을이 보인다. 마을 길 안내판에는 <권삼득명창 출생지>란 작은 안내판에 하나 부착이 되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권삼득명창의 생가터를 알리는 비가 하나 서 있고, 그 안에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 뒤편으로는 ‘충현사’라는 제각이 보인다.

 

철책으로 담장을 친 안에 서 있는 작은 비 한 기. 비에는 <권삼득 선생 출생지>라고 머리말을 쓰고 그 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이곳은 조선 후기 판소리의 대 명창이신 권삼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1771년(영조 47년) 안동 권씨 래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41년(헌종 7년)에 별세하였다.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하여 삼득(三得)이라 불리웠으며 본명은 정이다. 양반 출신 광대로 창에 천부적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숲속에서 새가 날아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판소리사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전하는 이야기들이 기록된 문화의 거개이다. 하지만 그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가감이 되기도 한다. 하기에 많은 명창들의 이야기가 서로 중복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콩 서 말을 지고 용소로 떠나다.

 

권삼득명창은 집에서 광대 짓을 한다고 쫓겨난 후,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향한다. 조선창극사에서 정노식은 초기명창의 이름을 들면서 하한담과 최선달, 우춘대 등에 이어 ‘고송염모’라는 네 명을 지칭한다. 고수관과 송흥록, 염계달과 모흥갑이다. 연배가 높은 권삼득명창을 이 네 명의 이름밖에 놓은 것이다. 권삼득명창이 처가가 있는 남원으로 내려가 득음을 위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면,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삼득명창은 남원 지리산 자락 춘향이 묘가 자리한 맞은편, 용소폭포에서 득음을 위한 소리공부에 전념을 한 것 같다. 이곳에도 <국창 권삼득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뒤편으로는 육모정이 있고, 앞으로는 용소 푸른 물이 바위를 미끄러져 깊은 소 안으로 자맥질을 한다. 콩 서 말을 짊어지고 이곳에 온 권삼득명창은 소리 한 바탕이 끝날 때마다 콩 한 알을 소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구룡폭포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소리공부에 전념한 권삼득명창. 콩 서 말이 모두 용소로 들어가기에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을까? 대 명창으로서 명성을 얻기 위한 그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하기에는 쉽지가 않다. 오늘 이 두 곳의 소리꾼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바로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요즘처럼 반짝이는 스타가 아닌, 진정한 소리꾼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대원사는 지리산의 천왕봉 동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천년이 지난 사찰이다. 신라 제 24대 진흥왕 9년인 548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라고 했다. 그 뒤 천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것을 조선조 숙종 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창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의 강당이 되었다.

 

조선조 고종 27년에는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을 보수하였고,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설교를 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소된 대원사를 중창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殿), 누(樓), 당(當), 각(閣),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 이후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집 부근에는 옛적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과 군자정이 있다.

 

지리산 자락인 시천면의 천왕사 성모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들린 대원사는, 한창 관람을 위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대원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방장산 대원사라는 일주문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것을 둘러보고 싶어서인가 보다.

 

 

대원사와 인근 지리산 일원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만큼 자연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새로 깔아 놓은 아스팔트가 발목을 마구 잡아끈다. 아마 너무 수려한 절경이라는 대원사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가는 길을 택해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내리는 잔비로 길이 푹푹 빠져버리니 이래저래 대원사를 찾는 길은 쉽지만은 않다.

 

아름다운 계곡과 어우러진 대원사

 

절이 보이는 입구에 다다르니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계곡이 보인다. 대원사의 계곡은 대원사입구 주차장에서 대원사까지 약2km에 이르는데, 산이 높고 물이 맑을 뿐 아니라 바위틈 사이로 뿜어내는 물과 괴암은 절경이다. 용이 100년간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소, 가락국 마지막 구형왕이 이곳으로 와서 소와 말의먹이를 먹였다고 하는 소막골 등이 위치하고 있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대원사 앞에 이르니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짙은 신록을 자랑하고 있다. 빗줄기가 거세지더니 급기야는 소나기로 변했다. 우산도 없이 여정을 재촉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그래도 어찌하랴 다만 몇 장이라도 사진을 담아야겠다고 작정을 한다.

 

손으로 카메라는 덮고 사진을 몇 장 찍는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허사다. 빗방울이 금방 렌즈에 떨어져 얼룩이 져 버린다. 지난 번 대원사를 찾던 날도 봄비가 장맛비처럼 쏟아져 사진을 찍지 못하고 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번에도 또 비가 온다. 대원사와 나와는 아무래도 비로 맺어진 인연인가 보다.

 

 

초겨울에 달려가고 싶은 대원사

 

대원사는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참 아담하고 가지런한 가람이다. 이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절집이 1,500년이라는 세월을 숨어 지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수행승들이 이 절집을 찾았으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거쳤겠는가? 지리산이라는 지명도 알고 보면 이곳에 머물면 사람이 지혜로워진다고 하여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대원(大源)이니 계곡에 물이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듯 뜻을 세운 일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듯하다.

 

 

오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몇 장인가 더 사진을 찍은 후 대원사를 떠난다. 오늘 갑자기 방장산 대원사로 달려가고 싶다. 아마 그 절경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비로 인해 맺어졌던 인연이 또 다른 모습으로 맞이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이다.


전북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지리산 기슭에 있는 춘향묘. 그 앞을 흐르는 냇가에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육모정이라 부르는 이 정자는 최근에 새로 지었지만, 원래는 400년 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육모정 뒤로는 용소라 불리는 소가 있다. 이 소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던 곳이라 하였으며, 이곳에 넓은 바위가 있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 넓은 바위 위에 6각형의 정자를 지어 육모정이라 이름을 붙이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었다. 1960년 큰 비로 인해 정자가 유실 된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을 한 것이다. 육모정 뒤편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그 물이 맑은 것에 반해서일까? 한 사람의 명창이 이곳에서 목을 트였다고 한다.



명창 권삼득의 설렁제가 만들어진 곳

명창 권삼득. 명창들이 득음을 할 때는 동굴독공이나 폭포독공을 한다. 동굴독공은 동굴 안에 들어가 소리를 얻을 때까지 혼자 외로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이고, 폭포독공이란 폭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소리를 얻는 것이다. 그 폭포 독공이라는 것은 목에서 피를 몇 말을 쏟아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그 득음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이곳에 구룡폭포가 있어 권삼득이 소리를 얻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줄어 예전의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용소로 떨어지는 물이 상당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권삼득 명창은 전라북도 완주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양반가의 사람이다. 예전에는 양반이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 권삼득 명창의 소리공부는 당연히 집안에서 쫓겨 날만한 일이다.


육모정 앞에 있는 춘향묘와(위) 물가에 서있는 권삼득 명창의 득음장소를 알리는 비
 
권삼득 명창은 판소리의 효시로 알려진 하한담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했으니 판소리 초기의 명창이다. 조선조 영조 47년인 1771년에 완주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소리에 재질을 보였다. 혼자 이곳 용소 앞 넓은 바위를 찾은 권삼득 명창은, 이곳에서 소리를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보냈을까? 지금은 작은 비 하나가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칠이 벗겨져 알아 볼 수도 없다.

설렁제를 만들어 낸 권삼득 명창

더늠이란 소리의 명창들이 오랫동안 소리공부를 하다가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만들어 내는데, 그 소리를 말한다. 권삼득 명창의 설렁제는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의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이 바로 이 설렁제이다. 지금도 이 대목은 권삼득 명창의 설렁제로 부른다는 것을 말하고 설렁제로 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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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자가 서 있었다는 바위와 물길

설렁제는 높은 소리를 길게 질러 씩씩하고 경쾌하다. 듣기에도 시원한 창법이라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를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했다. 그렇기에 권삼득을 '가중호걸'이라 불렀다. 육모정 뒤편 물이 흐르는 곳에 있는 용소, 바위틈으로 물이 얼마나 오랜 시간 흐른 것일까? 암반이 파여 있다. 그 아래 소가 푸른색을 띠고 맑은 물을 받아들인다.

선비들이 지었다는 육모정. 그리고 그 곳에서 소리를 하여 득음을 한 권삼득 명창. 양반가의 자손이니 이곳 정자에 와 그 경치에 반해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소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왠지 소리 한 대목으로 들리는 것도, 이곳에서 소리를 한 한 명창의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게 무심한 세월만 흘러버렸다.

아홉마리의 용이 놀았다는 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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