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년은 됨직하다. 이곳을 다녀온 지가.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산 68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용덕사는 창건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절은 명당 중에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지만, 도선사를 들어가는 입구로 걸어 올라가면 우이동 먹거리촌이 나온다.

 

이 먹거리촌 오크밸리 앞에 용덕사 이정표가 하나 서 있다. 용덕사는 걸어 올라가는 길이 아름답다. 먹거리촌까지 차를 이용해서 간다고 하면, 걷는 길은 차에서 내려 10~15분 거리이다. 그저 마음 편하게 뒷짐을 지고 걸어도 15분이면 넉넉하다. 가다가보면 우측으로 펜스를 쳐 놓은 곳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낮은 산길을 걷게 된다.

 

 

암벽에 조성한 마애불이 일품

 

용덕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찰의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산사의 분위기는 한껏 느낄 수가 있다. 한편으로 흐르는 맑은 개울이 있어, 물소리까지 정겨운 곳이다. 용덕사의 샘물인 감로수는 도봉산의 약수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전한다. 한 모금 마시면 폐부 깊숙이 시원함이 전해온다.

 

주변에 온통 바위투성이이다. 그런 곳에 어떻게 절을 중창한 것인지. 절 경내라고 해보아야 돌아볼 것도 없다.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위가 하나는 가히 절경이라는 생각이다. 바위 한 면에 조각된 마애불은 압권이다. 100여 년 전에 이 곳에서 시봉을 들던 동자가 바위에 밝은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조각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곳곳의 비경에 조각한 마애불들은 모두 전설 한 자리씩 갖고 있다. 그만큼 지금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만난다. 어떤 마애불은 자연 굴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용덕사 마애불도 동자가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큰 바위면을 어떻게 갈아내고 조성을 한 것일까?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용의 입에 마련한 산신각

 

절이라는 곳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안에 무슨 사연인들 없을 것인가? 용덕사의 경내를 돌다가 보면 커다란 바위굴 입구 문 위에 산신각이라고 음각한 글을 볼 수 있다. 산신각을 자연적인 바위에 조성을 한 것이다. 이 바위는 바로 용이 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둥근 바위가 바로 여의주라는 것이다.

 

용이 입을 벌리고 여의주를 무는 형상이라고 하니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은 많은 분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건강발원이나 진급, 혹은 자녀의 입시 등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사실 사찰이라는 곳이 차를 타고 경내까지 들어간다면, 아무리 열심히 공을 들인들 무슨 덕을 볼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물론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마음부터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발원심이 날 것인가? 차도가 없어 잠시 동안이라도 걸어야 하는 용덕사는 그런 점에서는 정말 좋은 절이란 생각이다. 벌써 다녀온 지가 깨 되었지만, 이제야 숨어있던 자료를 발견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참으로 좋은 절 한 곳을 잊을 뻔했다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55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이 불상은 이동면 천리 75번지 적동저수지 입구 저수지 하단 제방 좌측 안쪽에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좌측으로 옮겨 정측 1칸의 전각을 짓고 안치 했었다. 후에 용덕사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수가 좋은 절 용덕사

 

용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인시 이동면의 성륜산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용인에서 45번 도로를 이용해 이동면에서 318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찾아갈 수가 있다. 용덕사 뒤편 산언덕으로 오른 곳에 있는 극락전 뒤 바위에, 암굴이 있어 일명 굴암절이라고도 한다.

 

용덕사가 위치한 성륜산은 용인의 남쪽, 안성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은 높은 산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는 높고 깊은 산이다. 절은 이 산의 중턱에 위치하여 맑고 깨끗한 공기와 탁 트인 시원한 풍광, 그리고 맑은 약수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절 안 곳곳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축과 유물들이 있어 유서 깊은 사찰임을 보여준다.

 

절에 전해지는 기록에는 용덕사가 신라 문성왕 때 염거(廉居)화상에 의해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절에 전하는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번창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 아래 이동면 일대의 땅 대부분이, 용덕사에 속해 있었을 정도의 사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입상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육계의 흔적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아있다. 가슴 앞에서 둥글게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文)이 길게 처지면서 하반신에서 양 다리에서 타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흐른다. 도식화된 이러한 형태의 옷주름 표현은 8세기 이후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결은 시무외여원으로 보이나 오른손에는 보주를 쥐고 있다. 수인과 옷주름 등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옷주름이 도식화된 경향을 일부 보이고, 신체는 부피감 없이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이 이채로워

 

용덕사의 석조여래입상은 미륵전 안에 모셔져 있다. 예전 신라시대에는 거밀현의 관아에 모셔졌던 석조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 예천 동본동 석불입상에서 나타나는 장신화 경행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속조여래입상은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까지 끌어올려 만개하지 못한 꽃봉오리를 잡고 있다. 이 불상은 미륵도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왜 관아에 있었을까?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문화재답사는 늘 궁금증이 커 간.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