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에는 수열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이름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으니, 바로 열녀 해주오씨 부인의 이야기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수열마을 입구에는 작은 구능 위에 비각이 서 있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으로 된 이 비각은, 장수군의 여인들이 얼마나 절개가 곧고 충정스러운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장수는 의녀(義女)’의 고장이다. 1593729,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 푸른 물로 뛰어든 의녀 주논개를 비롯하여, 많은 여인들이 꿋꿋하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고장이다. 장수군을 답사하면서 보면 이러한 열녀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을 수가 있다.

 

 

 

의녀의 고장 장수를 가다.

 

전주를 출발해 장수로 향했다. 20번 고속도로를 이용해 장수IC 나들목을 나서, 장수읍 방향으로 19번 도로를 타고가다 보면 수열비란 문화재 안내판이 보인다.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서면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에 비각이 서 있다. 이 비각은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비각 안에는 수열평(樹烈坪)’이라 쓴 비석 한 기가 서 있다.

 

이 비를 수열비라고 하는데, 그 뒤편에는 세임진위양사순처오씨열행립(歲壬辰爲梁思舜妻吳氏烈行立)’이라고 내리쓰기로 하였다. 임진년에 양사순의 처 열녀 오씨의 덕행을 세운다는 뜻이다. 앞에 쓴 수열평이라는 글씨는 조선조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우가 쓴 것이다. 이 비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수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놈들 더러운 이 유방을 가져가라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다. 전라도로 침입한 왜병들은 남원성을 무너트리고, 금산, 장수 등 내륙으로 들어와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 수열마을에도 왜병들이 들어와 마을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산 중에 있던 이 마을에는 아마도 그런 난리가 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가 보다.

 

방에서 삼베를 짜고 있던 양사순의 처 해주오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왜병들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왜병들은 양사순의 집 방으로 들어와 해주오씨의 유방을 강제로 만지며 희롱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양사순의 처 해주오씨는 부엌으로 들어가, 왜병들이 만진 유방을 부엌칼로 잘라내었다.

 

더러운 놈들이 만진 이 유방을 가지고 가라

 

고 일갈을 하는 해주오씨의 호령에, 왜병들은 혼이 나가 문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길로 해주오씨는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해주오씨의 행동이 그 마을에 위엄 있는 정신을 심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수열(樹烈)’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수열평에 부는 바람

 

마을에서는 지금도 수열비가 서 있는 앞뜰을 수열평이라 부른다. 전각 앞에 서서 비를 바라다본다. 단 석자의 글씨가 쓰여 있는 비석이지만, 그 안에 얼마나 장한 뜻이 숨어있는 것일까? 감히 누가 그 기세등등한 왜병들 앞에서, 스스로 유방을 도려내고 호통을 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의 여인들 중에도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수열평에 바람이 분다. 아침에는 쌀쌀하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올랐다. 수열비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장한 행동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죽음으로 자신을 지킨 해주오씨의 행동에, 어떠한 말로 위로를 할 수가 있을까? 비록 장중하지 않고 초라한 비이기는 하지만, 그 비석 안에 담긴 뜻은 어떤 화려한 것들보다도 더 아름답지 않은가? 오늘 여인이긴 하나, 해주오씨의 당당함을 배워 돌아간다.

11만 명이나 되는 왜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군관민은 서로가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호남을 범하지 못하면 승전하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전주성과 남원성을 공격한 것이다. 우군은 전주성을 공략하고, 좌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병사 1천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군사로 남원성을 지키게 히였다. 1597년 8월 12일, 왜군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13일부터 16일까지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남원성에는 성 안에 6천여 명의 백성들이 살았다. 군관민 등 이들 1만여 명은 중과부족으로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남원성을 지키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만여 명의 군관민을 모신 만인의총과(위) 선조 30년인 1597년 8월 12일 1천여명의 아군 병사들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위용을 떨치면서 행차를 하고 있다.(가운데) 그리고 1597년 8월 16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아래)

만인의총, 그 역사의 현장

남원시 향교동에 자리한 만인의총. 사적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이전으로 인해 해제가 되었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이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에도 수많은 폐해를 당한 만인의총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597년 9월에 용성관 동편에 유택을 조성하였다. 그 후 광해 4년인 1612년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다.

효종 4년인 1653년에는 ‘충렬의사 액’이 하사되었고, 숙종 원년인 1675년에는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고종 8년인 1897년 사우를 철폐하고 단을 설치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단소를 파괴하고 칠백의총 재산을 압수하는가 하면, 제사를 금지시키고 관련자들을 투옥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인의총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와 충의문, 그리도 성인문과 위폐를 모신 전각(위로부터)

만인의총, 역사의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분들이 영면을 하고 있는 곳이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한낮의 따가운 햇볕은 땀을 솟게 만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 대문인 충의문을 지나 성인문으로 들어섰다. 전각이 보인다. 충렬사다. 만인의 위폐를 모신 전각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오른다. 만인의총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다.

묘역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그 한편에 만인의총이란 비가 서 있다. 앞으로 다가간다. 갑자기 목에 메인다.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의 봉문만 덩그러니 남겨놓았다. 당시 얼마나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것일까? 변변한 무기도 없는 성내의 백성들은 곡괭이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항전을 했을 것이다.

고작 4천명의 군은 총으로 무장한 왜병을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을 것이다. 그렇게 4일 밤낮을 성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만인의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참 편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선조님들의 이런 죽음으로 지켜낸 이 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구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겠는가?




경내에 세워진 순의탑과 만인의총 옆에 세워진 비, 그리고 팔충신 사적비와 기념관 내부(위로부터)

이렇게 9월의 한낮에 고요하기만한 봉분 한기. 저 안에 만 명이나 되는 나라를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한 우리 선조님들이 계시다. 지금 우리는 저분들에게 어떤 후손들일까? 과연 저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오늘 이 자리에 고개를 숙인 또 하나의 모자라는 후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땅, 단 한 뙤기라도 빼앗기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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