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3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1척이다.

 

옹의 높이는 9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각각 길이 85촌 직경 1]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매 첩마다 3개의 구멍 또 북쪽 끝 가로 첩에는 2개의 구멍] 14기를 뚫었다.

 

 

밤에 돌아 본 옹성, 이게 웬일이지

 

위에 설명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 설명이다. 19일 밤 8시부터 두 시간여 동안 화성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장안문에서 창룡문을 거쳐 남수문까지 걸었다. 장안문에서 화홍문까지는 성 밖으로, 그리고 화홍문에서 창룡문까지는 성 안으로 돌았다.

 

그리고 창룡문에서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남수문까지 걸었다. 그런데 창룡문을 촬영하고 옹성을 살펴보니 군데군데 벽돌이 깨어져 나갔다. 밤이라 음영이 생겨 보기에도 흉측한 모습이다. 옹성에서 성벽으로 오르는 적들을 위해 끓는물과 기름을 붓던 현안은 벽돌이 파여져 나가고, 오물까지 쌓인 곳도 있다.

 

지난 해 10월에 이곳을 돌았을 때보다 더 많이 쪼개져 나간 듯하다. 겨울동안 얼어 있던 것이 날이 풀리면서 벽돌이 쪼개져 나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에 밤이 되어 음영이 생기면서 더욱 심각해 보인다. 이제 곧 많은 사람들이 화성을 찾아올 텐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할까?

 

 

봉돈의 외벽 벽돌도 훼손돼

 

창룡문의 옹성 외벽 벽돌을 돌아본 후 천천히 걸어 남수문 방향으로 향했다. 19일의 계획은 남수문까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마치는 것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가다가보니 밤의 광경이 마치 외국의 어느 고성처럼 보이는 웅장한 봉돈이 보인다. 전쟁 시에 봉화를 올려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봉돈 역시 외벽이 벽돌로 쌓여있다. 그런데 봉돈 외벽의 벽돌 역시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흉물스럽다. 곧 사람들이 화성을 관람하기 위해 수원 화성으로 몰려들 계절이다. 그런데 이렇게 벽돌이 떨어져 나간 모습들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이요, 수원의 대표적인 관광 동선이 아니던가?

 

훼손이 된 이유가 어려가지가 있다. 화성 창룡문의 옹성 외벽이나 봉돈 외벽의 벽돌의 훼손은 풍화작용에 의해 자연적인 훼손이다. 하지만 보기에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벽돌들이 보기에도 흉하다. 하루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화성이기도 하지만, 수원의 상징인 화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성을 구분할 때는 산성과 평산성, 그리고 읍성 등으로 구분을 한다. 산성이란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의 성을 말하며 대개의 경우 이런 형태의 성곽이 많다. 평산성이란 평지와 산을 연결하는 성으로 수원 화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읍성은 평지에 쌓은 성을 말하며 흔히 평성이라고 한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인 남포읍성은 예전 남포읍에 설치된 성으로 길이 900m에 넓이는 105,283정도이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원래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인 1390년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군데군데 복원을 한 남포읍성

 

남포읍성은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남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성을 한 바퀴 따라 돌아보면 남포읍성이 꽤 단단히 지어진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시설을 해놓았다. 현재 성 안에는 3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현청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물이 세 군데 있었다고 한다.

 

 

이 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남포는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 현 보령시내를 통과해서 한양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또한 서해가 가깝다 보니 늘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눈 쌓인 남포읍성을 돌아보다.

 

남포읍성을 몇 번이고 돌아본 곳이다. 보령시에는 생각 밖으로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하루에 그 많은 문화재를 다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몇 번에 나누어 답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남포읍성을 들렸던 것 같다. 성은 후에 별도로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싶어, 성이 있는 곳은 그냥 지나치지를 않기 때문이다.

 

 

먼저 관아를 둘러보고 난 후 성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한 편에는 성 밖으로 축성의 흔적이 보인다. 이 곳이 바로 남포읍성에 있었던 3곳의 문 중 한 곳이며, 농로를 낸 밖으로 쌓인 돌은 문을 보호하던 옹성의 흔적이다. 옹성은 큰 돌로 쌓아 견고하게 축성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성밖으로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무너져 읍성, 복원 서둘러야

 

고려 우왕 때 석성으로 축성을 하고, 공양왕 2년인 1390년에 축성을 완성하고 군영을 둔 남포읍성. 조선 태조 6년인 1398년에는 병마첨절제사를 두어 현사를 겸하게 하였다. 성벽 위에는 미석과 여장을 두었으며, 곳곳에 치를 조성해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은 큰 돌로 쌓아 외부에서 성문을 찾기가 어렵도록 조성을 하였다.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하자 곳곳에 잡풀이 드러난다. 성벽 인근에도 수많은 잡풀더미에 성벽이 가려져 있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성돌이 구르고 있다. 어느 집은 성벽에 붙여 집을 지어, 읍성의 성벽이 집 뒤 축대처럼도 보인다. 곳곳에 복원을 한 곳도 있지만, 900m 전체를 복원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성은 복원이 될 때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개 지형을 이용해 축성을 하기 때문에, 일부 복원만 갖고는 그 성의 진가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포읍성의 경우 현재 보존이 된 성벽만 갖고도 그 진가를 능히 가늠할 수가 있다. 하지만 완전한 복원이 되면 얼마나 중요한 시설이었는가를 한 눈에 느낄 수가 있을 것을.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이다. 성서(城書)에는 옹성의 크기는 정성(正城)의 대소에 따르며 모양은 옹기를 반으로 나눈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문 위에 적루를 세우지 않는 것은 정성이 가로 세워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중략)

오성지(五星池)[<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 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낼 수 있다]를 설치하였는데, 오성지 전체 길이는 14척 너비는 5척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옹성 문 위에 보면 구멍 5개가 나란히 뚫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성지로 일종의 소화를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는 시설이다. 이 오성지는 장안문과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팔달문의 옹성문에도 조성을 했다.

 

이 오성지가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있는데, 왜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는 없는 것일까? 눈이 쌓인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나름 생각해본다. 물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옹성의 형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렬로 선 옹성의 문은 군왕의 위용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문 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장안문의 앞으로는 북옹성을 쌓았는데, 그 중앙에 옹성의 문을 달았다. 옹성의 문과 장안문은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이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의 문이, 성문의 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것은 위용을 보이기 위함이란 생각이다.

 

평산성인 화성에는 해자가 없다. 주변이 모두 논밭이어서 해자가 없어도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오기가 쉽지가 않았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으로 이어를 한다거나, 행궁에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인 융건릉으로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행차를 한다면 이렇게 일직선상에 문이 나 있지 않았으면 위용이 있겠는가?

 

 

하기에 그 옹성의 문 위에 적의 공략시에 화재를 대비해 오성지를 조성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꼭 오성지가 없다고 해도 장안문이나 팔달문을 공략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장안문의 양 편에는 적대를 두어 포를 설치하고 있고, 팔달문에도 남포루와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이 있어 막강한 화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을 튼 창룡문과 화서문

 

동쪽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옹의 형태는 문의 오른쪽 63척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문의 왼쪽 6 3 척 되는 곳에서 끝난다. 성과 이어지지 않는 곳은 그 사이가 41척이다.

 

옹의 높이는 9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각각 직경 5]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 14기를 뚫었다. 옹성 위에는 회다짐을 하고, 그 남쪽 끝에는 돌층계를 설치하여 위로 원성과 통하게 하였다.

 

 

창룡문의 옹성에 대한 설명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의 옹성에는 성문이 없다. 그리고 한 편을 튼 형태로 조성을 했다. 옹성의 문이 없으니 당연히 오성지도 없다. 그런데 이곳은 왜 문을 달지 않고 한편으로 성을 튼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옹성의 문이 없다면 적의 공략을 막아내는 대는 어렵지 않을까?

 

창룡문과 화서문이 공략하기가 더 어렵다

 

15일 아침. 이른 시간에 화성으로 나갔다. 1박 2일로 여행을 할 계획이었으나 여기저기 취재 요청이 들어오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가 되었다. 눈이 쌓인 화성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추운 날씨에도 줄을 지어 지나간다. 요즈음 화성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창룡문을 꼼꼼히 따져본다. 굳이 오성지를 마련하지 않고, 한편을 튼 상태로 옹성을 축성했는가를.

 

창룡문을 돌아보면서 수긍이 간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은 옹성의 형태가 같다. 창룡문의 앞은 내리막이다. 공성무기를 끌고 올라가기가 쉽지가 않다. 거기다가 파문(破門)을 하기 위해 공성무기를 옮긴다고 해도, 옹성을 거쳐 성문을 깨기란 날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우선은 옹성의 양편이 치와 같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곳을 통과하는 것만도 어렵다. 어렵게 그곳을 지나 옹성안으로 들어가면,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거기다가 옹성과 성문 사이가 불과 12보 정도이다. 그 안에서 성문을 깰 수 있는 공성무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은 축성과 구조물을 조성한 화성. 그 문 하나에도 일일이 지형과 쓰임새를 보고 축성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옹성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왔다. 저편 동장대와의 사이에 동북공심돈과 동북노대가 보인다. 창룡문을 취하기 위해서 성문으로 다가간다면, 그곳에서 쏘아대는 화력을 당해내기도 어려울 듯하다. 화서문의 곁에도 서북공심돈이 자리를 하고 있지 않던가? 문루나 옹성에 오성지가 없어 행여 화를 미치지 않을까를 생각해 낸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괜한 걱정 떨쳐내고, 눈길을 걸어 화성의 설경에나 취해보아야겠다.

2년 여 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친 팔달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우진각 지붕으로 꾸민 팔달문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414일 오후에 팔달문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공사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 미루고는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일요일 오후였지만, 그 바람으로 인해 기가 나부끼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가 좋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촬영을 하느라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팔달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공사 실명제 석판이 가장 뚜렷해

 

196493일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그동안 갑갑하게 공사 때문에 가려져 있던 팔달문이, 모든 공사를 다 마치고 말끔하게 새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을 지나 옹성 쪽으로 나가다가 문의 겉 벽면에 있을 공사실명제 판을 찾아보았다. 이 실명제 판은 4개문에 다 있지만, 장안문은 6.25 때 폭격을 맞는 바람에 깨어졌다고 한다. 대신 그 내용을 적어 옹성 안에 비로 제작을 해두었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문 벽에 있는 실명제 판에는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등 85의 기술자가 팔달문의 조성에 참여를 했다고 적고 있다.

 

 

꿀이 흘렀다는 팔달문

 

문 안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다. 바로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를 때 사용하는 비녀이다. 그 크기만 해도 팔달문의 장엄함을 알 수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옹성의 벽을 바라다본다. 참 단단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양편의 성곽이 끊어져 아픔을 더하고 있지만, 그 문 하나만으로도 대단하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어 옹성의 문이 삐그닥거린다. 만일 그 소리를 과거에 적들이 들었다고 하면, 그 소리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만 같다. 함께 팔달문의 구경에 나섰던 김우영 e수원뉴스 주간이 이야기를 한다.

 

 

여기 어디쯤인가 성문 벽에서 무엇이 흘러 내렸데요.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달았다는 거예요. 성돌을 들어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고 해요

 

팔달문은 생명을 살리는 문이라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장사를 시작했던 곳. 팔달문 앞의 장시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장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흥청거림이 있어, 꿀벌조차도 그 안에 집을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공사를 마치고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팔달문. 주변을 돌아보다가 보니, 성문 벽 밑에 풀 한포기가 자라고 있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 있는 동안도 생명이 그것에서 움튼 것이다. 비록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흥을 불러온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팔달문, 팔달문을 자랑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은, 새롭게 치장을 한 팔달문을 만났다는 감흥 때문이다.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에는 세 곳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서북공심돈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보물 제403호인 화서문이다.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에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문이기도 하다. 화서문의 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 화서문은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져 있다.

 

화서문은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좌우의 문루 위 전각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옹성의 제도는 어떠했나?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으로,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옹성의 제도는 고제에서 한 쪽만을 연다는 뜻을 취하여 옹성을 쌓았다.

 

성문의 왼쪽에 이르러서는 원성과 연결되지 않고, 외문을 설치하지 않아서 경성의 흥인문 옹성의 제도와 같게 하였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정문과 거리는 28척이다.

 

 

외면은 벽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1척이고 아래 두께는 11척 5촌이며 위의 두께는 줄어서 10척 5촌이다. 내면은 벽돌로 된 누조 4개를 설치하였다. 평평한 여장으로 둘렀는데 높이는 3척 두께는 2척 5촌이다. 바깥 면은 현안 셋을 뚫었다. 여장 4첩을 설치하였는데 높이는 4척 5촌이고 원총안과 근총안 14기를 뚫었다.

 

적에게 어떤 공격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적과 교전이 벌어졌다고 하면, 화서문의 화력을 어느 정도였을까를 유추해 보자. 우선은 화서문 자체의 화력만 갖고도 섣불리 접근을 할 수가 없다. 멀리서 오는 적은 원총안에서 쏟아지는 조총의 총탄을 피하기도 어려운데, 많은 인원이 몰려 가까이 접근을 한다고 해도 활을 쏘는 구멍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가 어렵다.

 

 

 

또한 용케 성벽 가까이 다가온다고 하면 가까운 거리의 적을 쏠 수 있는 근총안(근총안은 밑으로 비스듬히 뚫려있다)에서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기가 어렵다. 거기다가 화서문을 지키는 장용영의 군사들은 여장이 보호를 하고 있어, 적에게 노출이 되지 않아 손을 쓸 수가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성문을 벗어난 성벽에도 무수히 많은 군사들이 여장 뒤에 몸을 숨기고 총과 활을 쏘아댄다. 우리의 전통 활인 각궁은 그 사거리가 145m에 이른다, 가까이 오기도 전에 화살을 맞거나 원총안에서 쏟아지는 화력을 당할 수가 없다. 또한 화서문의 바로 곁에는 소라각이라 부르는 서북공심돈이 자리한다.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의 병사들이 함께 적을 향해 공격을 한다고 하면, 당시를 생각하면 그 화력이 엄청났을 것이다.

 

 

 

적이 공격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의 열린 부분이 없다. 다만 옹성 중앙에도 철갑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화서문과 창룡문은 고제에서 언급했듯, 한편을 틔어놓았다. 그러나 그 트인 부분으로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오기는 어렵다. 더구나 힘을 받기 위해서는 적당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데, 옹성 안은 그렇게 넓은 공간이 아니다.

 

만일 옹성의 터진 부분의 성벽을 깨고 들어오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옹성은 외벽은 전돌이지만, 내벽은 단단한 돌을 이용해 쌓았다. 또한 옹성의 열린 부분의 일부는 크고 단단한 돌로 쌓아, 공성무기 등으로 무너트릴 수가 없다. 공성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은 사면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그 안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이다. 이렇게 철통같은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는 화서문이다. 거기다가 성벽위에는 쇠뇌와 불랑기포로 무장한 장용영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불랑기포는 1호에서 5호까지 있었는데, 1호의 길이는 9척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큰 것으로 보아 이것은 대형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먼 거리에 있는 적도 사살할 수 있는 쇠뇌와 불랑기포, 불랑기포는 세 곳의 공심돈에서 사용하는 주력무기였다. 화서문 바로 옆에 자리한 서북공심돈에도 대형 화포인 불랑기포가 있었다는 것이다. 쇠뇌는 긴 창을 이용한 화살이다. 강력한 힘으로 날아가는 쇠뇌에, 조총과 활로 무장을 한 화성의 주둔 병사들이었다.

 

결국 당시의 화력으로는 화성을 범접할 수가 없었다는 결론이다. 화서문 하나로만 보아도 화성이 얼마나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었는가를 유추할 수가 있다. 우리가 화성을 막강한 군주의 위엄을 보이는, 최고의 성곽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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