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이미경, 그녀가 전시기획자가 된 까닭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내가 지금의 각 학교에서 교과서를 쓰는 역사를 보건대, 가치 있는 역사가 거의 없도다.”라고 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채호 선생의 명언처럼 아픔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의미있는 전시가 열린다. 광복회 경기도지부(지부장 황의형)이 마련한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 - 그날의 기억 1919’1126일부터 121일까지 경기도문화의 전당 빛나는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런 그날의 기억 1919’의 공동기획자인 이미경씨를 13일 오후, 영동시장 2층 청년몰 한편 카페에서 만났다. 지난해(2018) 115일 행궁동에 소재한 대안공간 눈에서 이미경 개인전 상처가 아물지 읺았다전을 열고 난후 1년 만의 만남이다. 당시 이미경씨의 전시는 지인의 갑작스런 죽음이 몰고 온 공포를 그대로 사진으로 옮겨 놓았던 상징적 전시였다.

 

 

1년 만에 기획자가 되어 나타난 이미경씨

 

그 전에도 이미경 작가의 전시를 찾아보고 기사화 한 적이 있어 낯이 익은 사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기획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년이라는 의미있는 해(1919)그날의 기억 1919’라는 전시제목을 갖고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관련행사가 열렸다.

 

그런 행사가 한 해의 막바지에 들기 시작한 11월 말에 또 다시 ‘3·1온동 및 임시정부수립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진작가가 아닌 전시기획자로 나타났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1919년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안양에서 사진전을 여는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지금은 생존해 계시지 않는 독립운동가를 모티브로 사진전을 열었어요. 그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사진작업을 하다가 우리가 그날(191931)의 역사나 독립운동가 들에게 너무 홀대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광복회 경기도지부에서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계획을 갖고 있는데 기획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런 전시라면 힘들어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시기획을 맡았다고 한다. 그동안 3·1운동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화성 제암리, 천안 유관순 열사 생가지 등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한다. 기획을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힘들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1919년의 역사를 조명하고 싶다는 것이 이미경씨의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하고 싶어

 

이미경씨가 기획을 하게 된 것은 8,15 광복절을 맞이해 아이들이 그린 태극기를 한 곳 지하도에 전시회를 열고, 그곳에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놓은 후 지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느낀 바를 글로 적는 전시를 연 것이 기획의 시작이라고 한다. 전시는 생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고, 그 전시를 통해 기획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저는 중앙대학교 평생교육원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국립한경대학교 일반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에 재학하고 있어요. 이번에 석사논문이 나왔는데 논문제목이 <내면심리의 사진적형상화를 통한 불안극복 -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를 중심으로> 였죠. 개인적인 불안의 문제를 예술활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선행작가를 기반으로 살펴본 작품 논문예요

 

이미경씨가 건네주는 석사학위 논문집을 받아들고 사진작가가 기획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모르고 있던 내면의 세계까지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고 그동안의 용기를 격려해주었다. 이미경씨는 기획을 하다보니 그동안 사진작가로서 모르고 있었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면서 이번 그날의 기억 1919’9명의 작가가 동참했으며(깅동우, 김희곤, 류엘리, 염동균, 이혜정, 조정호, 최순옥, 한영숙, 한희준) 작가들은 모두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은 이미경씨와 장기택씨가 공동 전시기획을 맡았다.

 

 

기획자는 단순히 나에게 주어진 모티브만을 갖고 전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티브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고민해야 참다운 기획자가 될 수 있다라는 말로 전시를 하는 이미경씨에게 도움을 주었다. “앞으로는 우리 문화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그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와 국가,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겠다고 하는 이미경씨. 이번 그녀가 기획한 그날의 기억 1919’전이 기대되는 것은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기획자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또한 참여작가들이 생각하는 조선의열단 백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수원 전통시장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하는 책자가 발간이 된다. ‘수원전통시장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자는, 186쪽에 달하는 소개책자로 수원시에 소재하고 있는 22개 시장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수원시에서 발행을 할 이 전통시장 이야기는 수원박물관의 한동민 학예팀장과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의 집필로 이루어졌다.

 

1편 한국의 장시, 2편 수원의 시장, 3편 수원의 전통시장, 4편 전통시장의 주변이야기로 꾸며진 이 전통시장 이야기는, 각 시장마다 역사 및 개관, 상인회장 인터뷰, 전통시장의 특징 등으로 꾸며졌다. 김소라, 심춘자, 윤주은, 하주성 등 4명의 시민기자가 일일이 전통시장을 방문하여 그 시장에 갖고 있는 특징을 구분하여 집필한 것이다.

 

수원의 시장 역사 한 눈에

 

한국의 장시에서는 한국의 장의 역사와 변화를 다루면서 전통시장의 의미와 역사, 기능 등을 다루었다.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의 기고로 받은 수원의 시장편에서는, 수원장의 전통과 특성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소개를 하고 있다. 삼남대로의 길목 수원, 경기남부 상권을 거머쥐다, 수원장의 특성 문안장과 문밖장, 수원경제를 이끌었던 수원우시장, 수원에 전통시장이 많은 이유 등으로 소개되었다.

 

각 시장의 소개는 그 시장의 역사와 개관 등이 소개되어 있다. 시장이 언제 생겼으며 회원 수는 몇 명인지, 그리고 그 시장의 주력상품은 무엇인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상인회장의 인터뷰에서는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을 하는 상인회장과 상인회의 노력 등을 적어나갔다.

 

 

각 전통시장을 소개하는 종목에서는 상인회마다 펼치고 있는 사업과 그 사업의 성과, 그리고 변화하는 시장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세세하게 소개하였다. 각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발로 뛰어 쓴 소개이기 때문에, 시장의 정서를 파악하는데도 일조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원의 각 전통시장의 주 판매상품 등을 알 수가 있어, 시장보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원에 전통시장이 많은 이유

 

수원에는 전통시장이 다른 도시보다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수원이 갖는 또 다른 자랑이라 할 수 있다. 역사 문화적 전통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이라는 것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원이라는 도시가 사람들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신도시의 높다랗게 들어선 소수자본의 힘으로 세워진 쇼핑몰과 백화점 류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있다는 것이다.

 

 

수원박물관 한동민 학예팀장은 수원이 전통시장이 많은 이유를 정조 이래 경기남부 상권을 주도했던 역사적 전통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도시가 확장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수원의 문화적 저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원은 도시변천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적고 있다.

 

수원 전통시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길

 

수원 전통시장 이야기의 발간소식을 접한 수원상인연합회 최극렬 상인회장은

수원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당시부터 장을 형성한 역사가 깊은 곳이다. 지금은 비록 수원 전역에 22개의 인정시장이 분산이 되어 있지만, 예전 팔달문 안팎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원전통시장을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가 책으로 꾸며졌다고 하니, 고맙고 반갑다. 이 책이 22개 전통시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전통시장이야기가 책으로 발간된다는 소식을 들은 전통시장의 한 관계자는

대형쇼핑몰과 백호점 등의 입점으로 인해 전통시장이 받는 피해가 클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에 이렇게 전통시장에 대한 책자가 발간이 된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다. 아무쪼록 이 전통시장이야기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시장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많은 이용이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

 

산책로에서 만난 홍성관 장안구청장 밝혀

 

진도 세월호의 참사로 인해 사람들 모두가 우울한 분위기이다. 나라는 3류 국가로 전락해 세계적인 망신살이 뻗쳤고, 사람들은 웃음을 잃은 지가 꽤 되었다. 채 피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수많은 생명들은 오늘도 차디찬 진도 앞 바다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팽목항에는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는 등 굽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처절하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광교산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는 찾을 수 없지만, 열심히 살겠다고 부지런히 걷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광교저수지 둘레길. 목책으로 조성한 테크길과 산자락을 끼고 조성이 된 수변길은 영 딴판이다.

 

 

3.4km의 수변 산책로, 걷기에 최고

 

광교저수지 수변 산책로는 지난 해 새로 마련한 도로와 인접한 테크길이 1.5km, 그리고 산자락을 끼고 걷는 길이 수변길이 1.9km이다. 모두 3.4km의 이 길은 빨리 걸으면 50분이면 족하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급할 것인가? 어차피 그동안 세월호에 젖어버린 마음도 함께 말리려고 걷는 길이다. 지난 해 6월 장안구청장실에서 만난 홍성관 장안구청장은

 

광교저수지 수변 테크 산책로는 총 1.496m에 폭 2.7m입니다. 이 구간 안에 전망테크 3개소와 테마테크 1개소, 목교 1개소가 조성되었습니다. 수변산책로는 광교저수지와 산책로가 어우러져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광교산을 찾는 많은 분들이 이 자연과 함께 한 산책로를, 후손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도록 함께 지켜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광교산 입구 반딧불이 화장실 건너편 저수지 방죽에서부터 시작하는 데크 산책로에는 중간 중간 작은 공연을 할 수 있게 공연장도 마련해놓았다. 데크와 도로 사이에 난 꽃밭에는 맥문동, 옥잠화, 비비추, 섬기린초, 조팝나무, 바위취, 털머위 등 다양한 꽃들을 심어 놓았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사람들을 반긴다.

 

사람들의 편의가 우선, 최고의 명품길 조성한다.

 

광교저수지 길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찾아가던 날. 이날은 수원시 공보관실(공보관 이경우) SNS(팀장 한준수)이 주관한 전국 파워소셜러 팸투어일정으로 10명의 전국에서 모인 블로거들이 광교저수지를 찾았다. 그 자리에는 홍성관 장안구청장이 반딧불이 화장실 앞에서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홍성관 장안구청장과 블로거들이 인사를 나누고 나자, 장안구청장의 광교저수지 수변길 자랑이 시작된다. 전국에서 모인 블로거들이니 이 길을 홍보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광교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 반딧불이 화장실이 여성 칸이 부족하다는 민원이 제기 돼, 어떻게 하면 편의를 제공할 수 있을까 하고 관계자들과 들러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미 유명해진 이 산책로를 전국 최고의 명품 길로 조성하기 위해 이곳에 조형물도 설치하려고 합니다. 우리 광교저수지 산책로 많이 홍보 좀 부탁합니다.”

 

장안구에 대해서, 그리고 광교저수지 산책로에 대해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홍성관 장안구청장이다.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 광교저수지 산책로에 대해서 설명을 마친 후에 기념촬영까지 하고서야 블로거들이 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광교저수지 산책로는 이미 명품길이다.

 

데크길을 걸어본다. 이 길은 조성한지 일 년도 채 안되었지만 이미 명품길이다.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주말이면 많은 공연이 펼쳐진다. 그리고 세월호의 아픔도 그대로 이곳에 반영이 되어있다. 공연을 하는 곳에는 수원문화재단이 세월호 참사로 인해 거리로 나온 예술이 잠정 중단되었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테크길에는 수원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세월호의 아픔이 이곳에 걸려있다. 산책로 가에 세워진 목책을 연결한 붉은 끈에는, 노랑천이 수도 없이 묶여져 있다. 고앙교저수지 산책로는 이미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명품길이 된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월의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치유까지 곁들일 수 있는 광교저수지 산책로. 앞으로 이 길이 전국 최고의 산책로가 될 것이란 확신을 갖는 것은, 모두가 이 길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과 접하는 가장 자연스런 길이기 때문이다.

 

1130()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과 함께 떠난 답사. 보령 성주사지와 남포읍성, 서산 부석사를 돌아오는 당일 코스로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백제 때의 절 오합사가 나중에 낭혜화상이 중창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성주사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 3점이 있는 곳이다.

 

금당이란 절의 중심부요,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곳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옛 성주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전날 눈이 내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성주사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금당터였다.

 

금당터의 석불좌 설명이 이상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금당터에는 사면으로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중앙오층석탑 뒤로 오르는 계단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옛 사진을 토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자상의 설명을 듣고 나서 계단을 올라 석불좌 앞에 모여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해설사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금당터는 사방이 트였던 것으로 보여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석불좌 사방에 주초가 놓여있고, 북쪽으로 또 하나의 주초가 있다. 이렇게 석불좌와 주초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당터 가까이만 전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높게 조성을 한 금당터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중앙에만 주초가 있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이 금당터를 올라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금당터 사방이 트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사의 해설이 못 미더워

 

그런데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설명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석불좌 위에 신라시대에 조성한 철불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철불을 조각내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이 석불좌는 깨진 것이다. 이 위에 철불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여기 이렇게 녹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석불좌가 깨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석불좌는 거대한 돌을 구할 수 없을 때, 몇 조각으로 나누어 조성을 한다. 대개는 두 조각이나 네 조각으로 조성을 하는데, 깨진 석조각이 4조각으로 칼로 그은 듯 깨질 수가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석불좌는 하단부이다. 그 위에 커다란 네모난 돌을 앉고 앙련을 하단부에 새겨진 조각의 반대형으로 조각을 한다.

 

철불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석불좌가 깨졌다거나, 그 위에 바로 철불을 올려 그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영 미덥지가 않다. 거기다가 국보인 낭혜화상 탑비를 70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업고 다녔다는 설명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비 몸돌의 높이가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나 되기 때문이다. 장정 몇 사람이 들어도 힘든 비를 노인네가 업고 다녔다는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화재 해설이란 정확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하는 문화재 해설. 참 웃지도 못하겠다. 문화재 답사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해설사들이 입증이 안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기에 내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재 해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하는 가정의 해설, 또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추정하는 문화재 해설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문화재 해설이란 가장 정확한 내용, 가급적이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된 내용을 관람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1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제일교회 1층 세미나실에서는 지동 주민들과 이재준 수원시 제1부시장과의 간담회가 열렸었다. 이 자리에서 지동 마을계획단의 유지현 14통장은

“우리 지동에는 530년 정도가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런데 이 느티나무가 지금 고사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 나무들은 수원에서도 가장 오래 된 느티나무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느티나무 주변을 쌈지공원으로 조성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재준 제2부시장은

“좋은 지적이다. 그런 오래된 나무들을 이용해 공원을 조성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마을르네상스 사업이 된다. 먼저 주민들이 선도적으로 무엇인가 시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을만들기 추진단에 수시공모로 신청을 해서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오래 된 보호수가 있다면 당연히 살려내야만 한다.”라면서 주민들이 먼저 시작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바 있다.

 

 

마을계획단 느티나무 살리기 위해 노력

 

팔달구 지동 465 도에 소재한 수령 530년의 할아버지 나무와, 지동 230에 소재한 수령 480년의 두 그루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로 부른다. 이 나무들은 화성 축성 이전인 조선 초부터 이곳에서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살아 온 노거수들이다.

 

할아버지나무는 높이가 12m에 나무의 둘레는 4.7m에 이른다. 할머니나무 역시 높이 13m에 이르는 노거수이다. 이 나무들은 화성 축성의 역사를 보았고, 한국전쟁 때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때 마을에서 위하기도 했던 이 나무들이, 현재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동마을계획단에서는 모임을 통해 이 나무들을 살려낼 방안을 모색 중에 있다. 수원시에서는 가장 오래 된 느티나무로 알려진 지동의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를 자칫 고사라도 시킨다면, 수원의 관광자원 하나가 사라진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쓰레기적치장, 전선줄로 몸살을 앓아

 

장맛비가 아침부터 내린다. 중부지방에는 호후경보가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세찬 빗줄기가 아니기에 못골 느티나무를 보기 위해 13일(토) 10시 경에 찾아가 보았다. 그동안 몇 번이고 이 나무들을 지켜보았지만, 이 나무가 과연 보호수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수령 530년이 되었다는 할아버지나무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위로 뻗은 큰 줄기 하나는 고사해서 잎도 달지 못한 체 그렇게 서 있다. 주변에는 담배꽁초와 빈 담배갑 등이 지저분하게 나뒹굴고 있고, 한편에는 쓰레기들이 쌓여있다. 전국 어디를 가보아도 보호수 옆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은 이곳밖에는 없는 듯하다. 어떻게 보호수 곁에 쓰레기 적치장을 마련했을까? 몇 번이고 찾아가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다. 곁에는 차들까지 주차를 해놓아 이 할아버지나무의 환경이 최악임을 알려준다. 수령이 오래 된 노거수의 경우 매연에 약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실하게 잎을 달고 있는 할머니나무는, 할아버지나무보다는 상태가 나은 편이다. 하지만 이 할머니나무 역시 곤욕을 치루기는 마찬가지. 가지 사이로 숱한 전선들이 지나고 있다. 도대체 이 전깃줄을 가지사이로 보낸 사람들은, 보호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대로는 두 그루 다 성장 제대로 못해

 

주변의 환경이 가장 열악하다.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를 이렇게 방치를 해도 좋은 것인지. 관계당국에서는 보호수 지정 이후 이곳을 들려는 보았는지, 그리고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 두 그루의 보호수인 느티나무들은 제대로 생육하기가 힘들다. 오죽하면 마을계획단의 회의에서 이 나무들을 살려야한다고 하소연일까?

 

 

보호수란 ‘보존 및 증식(增殖)의 가치가 있어 보호하는 나무.’를 말한다. 보호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이 되거나, 훼손이 될 수 있는 나쁜 환경 속에 놓아두면 안 된다. 하지만 지동의 두 그루 느티나무는 이러한 보호수로써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보호수를 관리해야 하는 담당부서에서는, 이 두 그루 보호수의 현장을 조속히 답사한 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은 당부한다.

 

500년 역사의 이야기를 간직한 지동의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 이 두 나무는 과거 득남을 기원하고, 가내의 안과태평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나무였다. 하기에 보호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보호수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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