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 출토되었다는 삼존불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는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봉녕사가 소재한다.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중기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상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조성하였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삼존불 모두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16일 오후, 봉녕사를 찾아갔다. 전날 찾아가려했지만 15일은 우란분절이라 봉녕사를 찾아오는 신도들 때문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각에는 접근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아 뒷날인 16일을 택한 것이다. 봉녕사 경내로 들어서니 사진촬영금지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촬영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현수막을 걸어 알리고 있는 것일까?

 

 

종무소를 찾아가 사진촬영 허가받아

 

먼저 봉녕사의 업무를 관장하는 종무소를 찾아갔다. 종무소 근무자에게 삼존불 촬영을 하기위해 왔다고 설명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남자 한분이 들어와 무슨 일로 삼존불 촬영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문화재소개를 하기 위해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후, 관리자의 안내를 받아 용화각으로 향했다.

 

용화각(龍華閣)의 명칭을 용화전이라고 해야 하는데 용화각에 붙인 명칭을 바꾸겠다고 했더니, 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후에는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용화전으로 고치지 못했어요.”

관리를 하는 분의 설명을 듣고 용화각 전경을 한 장 촬영하고 난 후 용화각 안으로 들어서 삼존불을 촬영했다.

 

카메라가 아닌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가보다. “카메라는 플래시를 써야하기 때문에 삼존불에 피해가 갈수도 있어 휴대폰으로 촬영을 한다고 설명을 드렸더니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기자는 처음 보았다.”며 웃는다.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은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부자연스럽게 조각하였다. 석불의 밑을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을 조성하였다.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마모가 워낙 심해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협시불은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려 중기 한 사람의 석공에 의해 조성한 듯한 삼존불,

 

용화각에 모셔진 석조삼존불은 모두 평평한 느낌을 준다.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봉녕사 삭조삼존불. 모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땅에 묻혀있던 삼존불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불자들에게는 이 삼존불이 예사삼존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 역시 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봉녕사를 찾아가 석조삼존불 앞에 머리를 조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는 백중이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용화각을 찾아와 아마 사진촬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관리자의 설명이 없다고 해도 15일이 백중일임을 알고 다음날 찾아간 것이다. 음력 715일을 우리는 흔히 백중일(百中日)’ 또는 백종일(百種日), 이라고 부른다. 백중 때가 되면 채소와 과일 등을 수확할 수 있는 시기로, 100가지 과실이 나온다고 하여 백종(百種)이라고도 했다. 이날을 망혼일, 중원일(中元日) 혹은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 부른다. 우란분절에 불가에서는 하안거를 해제하고 망자들을 위한 제를 올린다.

 

 

우란분절의 내력은 이러하다. 예전 목련존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은 백가지 과일과 꽃을 차려놓고 스님들을 청해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열어주라고 일렀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대덕스님들을 모셔 우란분회를 열어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란분절에는 모든 절에서 재를 올린다. 세상을 먼저 떠난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이다. 다음날 찾아갔지만 마음속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고개를 숙인다. 봉녕사 삼존석불을 돌아본 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먼저 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진전사지가 있다.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곳 진전사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니 8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을 일으킨 도의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인 821년에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한 곳이다.

이 진전사에서는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와 같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이 되었으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도 이곳에서 체발득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진전사는 16세기경에 폐사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국보 제122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439호인 부도탑이 있다.

양양군 강현면에 소재한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

거대사찰이었을 진전사

국보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보물인 부도탑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상당하다. 또한 둔전리를 나오다가 보면 절의 축대로 사용되었을 만한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아마 이 진전사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재 둔전리 야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현재의 진전사로 가는 길 우측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이번 답사가 4번째이다. 2004년과 2006년, 그리고 2008년 비가 오는 날과 이번 11월 14일이다. 다행히 갈 때마다 시기적으로 다르게 찾아갔는데, 가을에 찾아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가?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언제나 감탄을 하게 만든다.


하층 기단에 조각되어 있는 비천좌상

도대체 여래불의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를 하면서도, 지금 다시 찾아가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문화재를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창피스럽다. 지금처럼 문화재 한 점에 적게는 30장, 많게는 60장 정도의 사진을 담는 것이 아니고, 고작해야 5~6장의 사진만 달랑 담아왔으니 지금 생각해도 낯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지난 사진이라도 있으니 문화재의 변화를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국보 제122호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했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 위에 좌정한 비천상을 각 면에 2구씩 조성을 해, 총 8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윗 기단에는 한 면에 2구씩 8구의 팔부중상을 조각하였다. 일층 탑신에는 한 면에 한 구씩 여래좌상을 조각되어 있다. 진전사지 석탑의 특징은 모두가 좌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인이나 팔부중상의 경우에는 입상을 조각하는데, 이 석탑은 돋을새김한 모든 상이 좌상이다.


기단 상층에 조각되어 있는 팔부중상 좌상. 이 탑에는 모든 조각이 좌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이 여래좌상 중에 서편으로 앉은 여래좌상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사진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그 자료에도 여래좌상의 안면이 없다. 그저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여래좌상의 안면을 누가 떼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 땅에 소재한 문화재부터 관심을 가져야.

딴 면은 다 괜찮은데 서쪽 편의 여래좌상과 그 아래 팔부중상 중 왼편의 얼굴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만일 일부러 훼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깨끗하게 안면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안면을 일부러 떼어낸 듯하다.

기단부와 몸돌 1층에 세련된 조각들이 있어 국보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안면이 사라지다니. 혹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적으로 마모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렇다면 딴 조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한 편의 여래좌상과 팔부중상의 얼굴이 사라진 것일까?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은 안면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마치 떼어낸 것처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 세월이 지나 자연적으로 변화가 되고, 풍우에 씻겨 그 아름다움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안타까운데, 이렇게 누군가 일부러 훼손이 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내 땅에 있는 문화재부터 간수를 해야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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