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것은 제각각이다. 어느 누구는 치부를 자랑으로 사는가 하면, 어느 누구는 청빈한 삶을 살기도 한다. 명성을 찾는 이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할 일만 죽어라 하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인생이 성공을 했는가는 후세의 사가들이 기록을 한다고 하니, 사람마다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녹녹치가 않다는 생각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1420 ~ 1489)의 생가가 있다. 단종의 폐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이곳에 내려와 은거를 하면서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다. 건물이 그 때에 지은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지만, 아마도 그 집 자리에서 몇 번은 보수를 한 듯하다.


청빈한 생활 그대로

울안에는 수령 500년의 보호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어계 조려선생이 이곳으로 낙향한 시기와 흡사하다. 아마 집을 짓고 난 뒤, 이 은행나무를 심었는지도 모르겠다. 높이 20m에 둘레가 3,4m나 되는 적지 않은 나무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 그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룬 분이 바로 어계 선생이다.

당시 사약을 받고 청령포에 시신을 버렸다고 일설에 전하고 있다. 그 시신을 수습하고 위폐를 동학사에 모신 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어계선생은 일체 좋은 음식을 먹지를 않고, 고사리와 풀만 먹었다고 전한다.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 숙제와 같은 생활을 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 뒤편 산의 명칭도 백이산이라고 한다.




어계선생의 생가는 단출하다. 당시 벼슬을 한 사람들의 집이 고래등 같은데 비하면, 기와집이라고는 하지만 초막과 다를 바가 없다. 현재 전하는 집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은 대문채와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원북재, 그리고 뒤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졌다.

대문 위에 걸린 충신지려

어계생가를 들어가려고 솟을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 위에 현판이 걸려있다. 충신지려이다. <충신 증 이조참판 조려지려>라 적혀있다. 생육신의 한분이었으니, 충신이었음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원북재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 원북재를 재실로 보고 있다. 살림집이 아닌 재실로 보는 까닭은 부엌 등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실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양편에 한 칸씩의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두 칸 대청을 놓았다. 별난 것도 없는 검소한 고옥이다. 이 원북재는 사랑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두 단의 축대 위에 지은 원북재. 그 집에서 조려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조금의 화려함도 찾아볼 수가 없는 집이다.

원북재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대나무 숲을 뒤로 한 사당이다. 사당은 세 칸으로 되어있으며, 주변을 돌담으로 둘렀다. 사당에서는 조려선생과 부인의 항례가 행해진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당에서 제를 올리기 위한 집이기에, 원북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담장에 붙어있는 집, 안채가 아닐까?

조려선생 생가 곁에는 또 한 채의 집이 있다. 따로 담장을 쌓고 문을 내었는데, 주추 등으로 보아 조려선생 생가와 년대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집에 대해서는 자세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집은 네 칸으로 지어진 팔작집이다. 기단은 시멘트로 발라놓아 정확한 모습을 알기는 어렵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진 이 집은 우측 한 칸을 내달았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부엌방과 안방, 한 칸의 대청, 그리고 높임마루를 둔 건넌방이 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부엌이 딸린 방 벽 밑에는 창불을 때는 아궁이가 보인다. 주추도 마름모꼴로 조성을 하였다. 여느 일반집 같지는 않다. 아마도 조려선생 생가의 안채는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려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어계 조려선생의 생가는 일반적인 집 구조와는 다르다. 선생의 평소에 청빈한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아마도 사랑채가 없는 것은, 바람 부는 청풍대를 사랑채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따라 어계선생에게 죄스런 마음이 든다. 날마다 커져가는 집들을 자랑하는 세상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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