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표현기법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형체조차 식별이 어려운 까닭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마음 한편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충남 보령시 내항동 767-10에 소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317호인 ‘대천 왕대사 마애불’은 그렇게 바위 암벽에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바위 암벽에 음각을 한 왕대사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왕대사가 있는 산을 ‘왕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운 날씨에 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땀도 땀이지만 걸음걸음이 천군만근이기 때문이다. 미쳐 물이라도 준비하지 못하면, 이것은 답사가 아닌 극기훈련에 속한다. 그 정도로 한 여름철의 답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왕대사 마애불은 왕대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바위에 조성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 형체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하게 절집을 찾았다고 하면,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바위에 새겨진 거대마애불이 속하는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선각으로 조성한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마애불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암벽의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전체에 차게 조성을 하였는데, 안면의 윤곽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륵불로 조성을 한 이 왕대사 마애불은 법의의 형태와 몸의 뒤에 새겨진 신광 등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용화세상의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왕대사 마애불. 나발과 두광, 상호 등은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목에는 희미하지만 투박하게 표현한 삼도가 보이고,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로 보인다.


이 왕대사 마애불은 경순왕과의 관계로 인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거대마애불인 점 등으로 볼 때, 오히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대사 경내에서 한 숨을 돌리다.


 

 

마애불을 돌아보고 난 뒤, 왕대사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 대웅전에 들어가 참례라도 한다면, 대웅전 마루에 땀방울로 흥건히 젖을 듯하다. 그저 어간문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앞을 바라본다.


잘 조성이 된 논에는 한 여름의 열기에도 벼들이 파랗게 자라있다. 아마도 저 논에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이 물이 되어 흘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땀을 식힌다. 그저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남들은 피서를 간다고 난리들인데, 어쩌자고 이 무더위에 답사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팔자려니 하면, 무엇이 더 행복할 것인가? 바람 길을 따라 또 길을 나서보련다.

 

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는 날은 비가 참 많이도 뿌려댔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인해 답사를 그만둘까도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비를 맞고도 강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인가 비가 내리는 날 답사치고는, 상당한 양을 일궈낼 수 있었다. 이 날의 답사 중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금원산에서 만난 마애여래삼존입상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산 6 - 2에 소재한 보물 제530호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금원산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 안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바위면 전체를 배 모양으로 판 후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 입상을 부조로 얇게 새기고 있다.

보물 제530호 거창군 위천면 금원산 바위 암벽 굴에 새겨진 마애여래삼존입상


마애불까지 오르는 길, 평탄치가 않다.

금원산은 차량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장사치들이 각종 음식을 판다치고 시끄럽게 만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까지 차들이 들어와 있다. 마애불이 있다는 산으로 오르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비로 인해 늘어난 물이 도로 위로 흐르고 있다. 그 양이 많아 물을 건너기가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오르는 길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신발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후 건너간다. 그런데 이렇게 도로 위로 흐르는 물을 건너야 하는 곳이 세 곳이나 된다. 그렇게 오른 금원산. 마애불의 있는 바위벽 입구라는 곳에는 ‘문바위’라는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우리나라의 바위 중 한 개의 바위로는 가장 큰 바위라고 한다.(이 문바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한다)


마애불을 찾아 오르는 금원산 산길에는 계곡물이 길 위로 흐르게 되어있다. 몇 군데나 이런 곳이 있어 바짓가랑이를 걷어부쳐야 했다.(위) 단일 바위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문바위이다


훼손되지 않은 마애부처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문바위 뒤편으로 돌아가니 산 위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계단 입구에는 50m만 올라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위를 본다. 역시 커다란 바위가 서 있고, 그 바위 사이로 좁은 계단이 나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 계단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 비좁은 사이로 들어갈 수가 있었을까?

계단을 오르면 안에 의외로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남향을 한 바위에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은 위로 삼각형으로 획을 그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보주형으로 다듬어 중앙에는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을 새긴 듯하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이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형태이다.



마애불로 오르는 게단 입구부터 마애불로 오르는 계단이다. 맨 위에는 좁은 바위틈으로 계단이 이어진다


삼존불은 굴 안에 자리를 해서인가 훼손이 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상태가 좋지만, 조각을 한 형태를 보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넓적하게 표현을 하였다. 얼굴에 비하여 눈과 코, 입은 작고 밋밋하다. 긴 귀 등을 보면 약간은 둔탁한 것이 토속적인 맛을 풍긴다. 어깨는 굴곡이 없이 각이 지게 표현이 되었으며,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가슴부분에서 타원형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 지역의 불상들이 잦은 주름을 보이는데 비해, 주름 역시 도식화된 느낌이다.

흡사 막대 같은 다리와 좌우로 벌린 발은 고려시대의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었지만,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다.

마애불은 바위가 겹쳐진 안에 조성이 되어있다. 커다란 바위가 비바람을 막아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와 새의 날개깃처럼 옆으로 삐죽이 뻗어 나온 옷자락 등은, 그동안 보아 온 삼존불이나 마애불 등에서 본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모습이 형식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삼존불의 곁에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고 글을 새겼는데, 이 마애여래삼존입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 16대 예종 6년인 1111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의문

결국 이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불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적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애불을 보고 난 후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는 이곳을 어떻게 올랐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이야 계단을 놓았지만 당시는 비좁은 바위틈일 뿐이다. 그러데 높디높은 이 바위틈을 어떻게 오를 수가 있었을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두 번 째는 마애불을 조성한 방법이다. 굴속은 한낮인데도 밝지가 않다. 그런데 바위 아랫부분도 아니고, 바위의 중앙부분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 그 당시 지금처럼 암벽에 그림을 새겨 넣기가 쉽지가 않았을 터인데,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 저렇게 새길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어두운 이곳에서 작업을 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이 금원산 커다란 바위 굴속에 있는 세분의 부처님이 남달라 보인다. 머리 위에 광배며 옷자락이 흡사 외계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스스로가 멋쩍어 피식 헛웃음을 날린다. 산을 오르느라 더위를 먹은 것인가? 금원산 굴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세 분의 부처님을, 그렇게 해후를 했다. 더위를 먹은 채로.

전북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산130-1에 소재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4호 ‘석산리마애여래좌상(石山里磨崖如來坐像)’ 이 마애불은 이번이 두 번째 답사이다. 첫 번째는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일몰 시간이 다 되어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이 마애불은 적성면의 선돌마을을 지나, 도왕마을 쪽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번에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와서인가, 늘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던 곳이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이곳을 택해 답사 길을 잡았다. 6월 18일 아침부터 땀이 흐른다. 오늘도 어지간히 날이 찔 모양이다. 마애불이 500m 전방에 있다는 곳부터 걸어야 한다. 마애불로 인해 500m의 아픔이 있는 나이다. 예전에 500m 산 중턱에 마애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올랐다가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나서이다.


산길을 접어드니 마음만 바빠 오고

마애불은 대개가 깊은 산중에 있다. 요즈음은 교통이 좋아 차가 들어가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 마애불은 걸어 올라야 하는 곳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석산리마애여래좌상도 산을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이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숲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가끔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의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아무리 숲길이라고 해도 30도를 넘는 기온이라고 한다. 조금 오르다가 보니 목이 탄다. 그런데 물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참고 오르는 수밖에. 누군가 나무계단을 놓았다. 고마운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오르다보니, 불과 얼마 오르지 않아 나무계단이 끝이 난다. 그리고 가파른 암벽 위로 길이 나 있다. 쌓인 낙엽에 미끄러져 한 발만 실수를 해도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질 듯하다.



조심조심 바위를 지나고 보니 좌측으로 누군가 이곳에 집이라도 지으려고 했는지 돌 축대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산죽이 자라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산모기는 땀 냄새를 맡았는지 어지간히 달라붙는다. 산죽덤불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니 바위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불

바위는 약 2.5m 정도가 되는 듯하다. 몇 덩이로 나뉜 바위를 바라보니 좌측에 마애불을 새겨놓았다. 마애불은 오른쪽 대좌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수직으로 선 평평한 바위면에 두광과 신광, 불신, 대좌 등을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 위를 덮고 있어, 그 오랜 시간을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온전히 남아 있었나보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항마촉지인을 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좌상이다.



석산리 마애불의 머리 부분은 마치 두터운 모자를 쓴 듯 투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민머리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를 묘사하였다. 얼굴은 큼지막하게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눈은 마모되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큼직한 코와 두툼한 입술 등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입술은 가장자리는 쳐지게 표현하였으며, 입술과 이마 선을 따라 붉은색의 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왜 채색을 한 것일까?

삼도는 목이 짧아 몸의 상단에 걸쳐지게 표현되었으며, 몸은 얼굴에 비하여 유난히 작게 표현하였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는 편이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왼쪽 어깨에 대의 자락을 걸친 우견편단식 옷차림이다. 법의 자락은 배 부근에서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로 가는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연화대좌는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광배는 배 모양의 신광 안에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광배의 여백을 따라 당초무늬를 선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두 번째 찾아가 만난 순창 석산리마애여래좌상. 얕은 부조기법과 토속화된 얼굴 표현, 그리고 평행밀집형의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그런가,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의 불신에는 채색을 하였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고려시대 불상 조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마애불을 조성하고 채색까지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합장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말한다. 입술에 붉은 칠을 한 마애불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움직이는 듯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시원한 산바람이 산죽 잎을 흔들고 지나간다.


석굴법당, 그리고 산의 정상부에 늘어선 자연암석에 조각한 수많은 불상과 군상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소재한 벽송사를 오르다가, 맨 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서암정사가 나온다. 이 서암정사는 지리산의 한 줄기 정상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삼대명산이라는 지리산. 삼신산의 한 산인 지리산은 산세가 험해, 6.25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원혼이 떠도는 곳으로 많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응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수많은 원혼의 울부짖음을 듣고 난 뒤, 이곳에 극락정토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자연석벽에 지장보살과 아미타불 등, 무수한 불보살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벽송사를 들려 나오는 길에 찾아간 서암정사.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암벽에 조성한 절이라는 뜻인가 보다.



자연암벽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석문

자연암벽에 새긴 사천왕상에 압도당하다.

서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가파르다. 다행히 벽송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려,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차가 서암정사의 입구까지 들어갈 수가 있지만, 답사는 역시 조금은 걸어야 제 맛이 난다. 천천히 길을 잡아 서암정사 쪽으로 걷다가 보니, 불사를 하는 중인지 주변에 많은 목재가 쌓여있다.

조금 안쪽으로 걸어가니 양편에 커다란 석주가 서 있다. 그 안으로 정사를 들어가는 석굴 입구가 보인다. 그런데 벽에 무엇인가 새겨진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 자연 암벽을 이용해 그대로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그 조각 솜씨가 일품이다. 도대체 몇 년이나 걸려 이 많은 작품들을 완성한 것일까?



바위마다 새겨진 불상과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대방광문, 그리고 문의 안편

암벽의 크기 때문인가, 사천왕상은 조금씩 높낮이를 다르게 조상하였다. 힘찬 동작이 금방이라도 바위를 박차고 호령을 하며 뛰쳐나올 듯하다. 석굴로 들어가니 안으로 넓은 공지가 나온다. 종각이며 극락전 등, 전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에서는 석굴법당 공사를 하느라 부산하다.

모든 것이 자연암석을 이용해서 조성하다

경내에는 모든 조각들이 모두 자연암석을 이용해 조성을 하였다. 관계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리를 옮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있는 자리에 그대로 적당한 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작은 암반에 용을 조각하였는데, 머리는 거북이다. 그 입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저 속을 파내었을까?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경내에 마련한 연못과 용을 새긴 수각

종각도 마찬가지이다. 암석 위에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 이런 형태는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많이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산꼭대기에 이렇게 많은 석조물을 조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한 것일까? 서암정사 여기저기를 돌아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억울하게 쓰러져 간 영혼들을 위해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이용한 것이라는 데는 할 말을 잃었다. 극락전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숙이고 나도 이런 불사에 작은 마음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저쪽 한편 바위벼랑 끝에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아마 수행이라도 하는 분의 숙소인 듯. 길을 따라 눈길을 돌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바위를 파서 법당을 만든극락전과 벼랑 위에 걸친 토굴

언제 이 거대한 불사가 다 마무리가 되려는지. 아마 또 오랜 시간 또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직 조형물이 들어차지 않은 바위를 보며, 내 마음속으로 추측을 해본다. 저곳에는 무엇을 조각할 것인가를.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마애불은 바위 면에 선각을 하거나, 주변을 파내고 돋을새김을 하여 조성을 한다. 그래서 마애불을 조성하려면 대개는 편편한 바위가 있는 곳에 마애불을 조성하게 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불과 달리 마애불을 간략하게 선각 처리를 하거나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는 것도, 벽면에 붙어 작업을 하기 때문에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남원시내에서 운봉을 가다가 보면 이정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우측에 보이는 이정표에는 <호기리 마애여래좌상>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붙어있다. 이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전각이 보이고, 그 전각 안에는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자리한다. 어떻게 저렇게 모가 난 바위가 있을까 궁금하다.


바위를 옮겨온 호기리 마애불

그런데 마애불 앞에 놓인 설명문을 보면 이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가 왜 이렇게 잘라낸 것 같은지 이해가 간다. 처음에 이 마애불은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부처모퉁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동쪽을 향한 채로 3m 높이의 바위 면에 돋을새김을 하고, 그 주변을 파내어 감실에 모셔진 것처럼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마애불이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인근 사람들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 마애불을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리로 옮겨 놓았을까? 바위를 쪼개 이곳으로 옮겨올 때 그런 것인지, 바위에 많은 금이 가 있다. 그리고 마애불의 현재 모습도 많이 달라져있는 듯하다.


마치 기계로 절단한 듯 바위를 잘라냈다.

감실처럼 만들었다는 마애불은 지금은 약간의 돋을새김을 한 흔적만 보인다. 주변에 깨진 바위는 여러 조각이 나있다. 그것을 일일이 부쳐 놓은 것이다. 이 마애불의 처음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무슨 연유로 이 집채만 한 바위덩이를 50m나 옮겨 온 것일까?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조각들을 보면, 이렇게 조각을 내어 어디로 옮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고려초기의 마애불상

불상의 얼굴부분은 거의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가 표현이 되어 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졌으며,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표현을 하였다. 수인을 보면 한 손에는 무엇인가를 들고 잇는 듯한 것이 약사여래마애불 인듯 하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로 표현을 하였으나 형태가 희미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대좌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였으나, 쉽게 구별이 되질 않는다. 대좌를 제외한 좌상의 높이는 120cm 정도이다. 몸에 비하여 손발이 크고, 어깨가 좁은 점 등으로 보면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 앞에는 등을 달고, 촛불을 켜 놓았다. 주변의 정리도 말끔히 한 것으로 보면 누군가 이 마애불을 돌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빗자루 등이 보인다. 뒤편도 바위 면을 쪼개낼 때 파손이 된듯, 여기저기 금이 가 있다. 도대체 무엇으로 이 마애불을 바위 면에서 쪼개 이곳까지 옮겨온 것일까?

수많은 문화재들이 훼손을 당하고, 찬탈을 당해 나라를 떠났다. 혹 이 마애불도 그런 이유로 원래 있던 바위 면에서 떼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조차 없는 커다란 바위. 그 바위덩어리를 떼어 내 어디로 옮기고 싶었던 것일까? 입도 눈도 다 훼손이 되어 분간조차 할 수 없는 마애불은, 혹 세상의 시끄러움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호기리 마애여래좌상은 말없이 그렇게 커다란 바위를 등 뒤에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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