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매우 잘 맞음을 비유하여 안성맞춤이란 말을 쓴다. 그 만큼 어떤 물건이나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릴 때 이런 말을 쓰는데, 안성에서 맞춘 유기는 장인정신과 뛰어난 솜씨로 정성껏 만들어 품질이나 모양 등 기교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켰기에 안성맞춤의 대명사가 되었다

 

안성시 대덕면 내리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입구에 세워진 안성맞춤 박물관은 유기를 중심으로 안성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함께 접할 수 있는 테마 박물관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기 전시실, 영상실, 기획 전시실, 농업 역사실, 향토 사료실, 세미나실, 학예연구실, 수장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기전시실은 유기의 역사, 제작 방법별 유기분류, 유기제작과정 모형, 제기, 반상기, 무구, 불기 등 생활 속에 쓰이는 다양한 유기를 전시하고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곳곳에 영상물을 설치하였다. 특히 터치스크린을 통해 안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농업역사실은 안성 농업의 역사와 계절에 따른 농경모습, 안성의 특산물이 전시되어 있어 과거와 현재의 안성농업을 알 수 있다. 향토사료실에는 안성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안성장시재현, 안성남사당, 불교문화재 등 안성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시실안내

안성맞춤유기전시실

- 유기의 역사, 제작방법별 유기분류 제기, 반상기, 무구, 불구 등의 유기제작과정, 생활 속에 쓰이는 다양한 유기를 전시하고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곳곳에 영상물을 설치하였다. 특히 터치스크린을 통해 안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농업역사실

- 안성농업의 역사와 계절에 따른 농경모습, 안성의 특산물이 전시되어 있어 과거와 현재의 안성농업을 알 수 있다.

 

 

향토사료실

- 안성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안성장시재현, 안성남사당, 불교문화재 등 안성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오픈시간 : 구분 입장시간 관람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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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절기(310) 09:0017:00 09:0018:00

동절기(112) 09:0016:00 09:0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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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관 일 : 매주 월요일은 휴관(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간단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옛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를 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청룡사 일대는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를 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과 각 절기에 절 집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룡사나 천안 광덕사 등 남사당패들이 절 주변을 택했던 것도 절 중창에 참여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삶을 영위할 목적이 앞섰을 것이라는 추측도 든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민가보다는 절집 근처가 삶에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거리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 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소리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이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으로 남사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기복옹(74,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1124). 마을의 두레에서도 그의 기량은 뛰어났다.

 

어려서 남사당패에 가담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학교도 늦게 졸업을 했어요. 17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쇠가 치고 싶어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면서 장단을 익혔죠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디서 걸립패가 떴다 하면 그 길로 집을 나서곤 했다. 20여세가 되면서 꼭두쇠의 기질을 갖고있던 김옹은 안성 풍물팀을 이끌고 이승만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쇠를 치고 걸립을 다니는 일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조직한 안성남사당 풍물놀이팀이 1988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농악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해 김옹은 남사당 풍물놀이팀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결국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한 말을 들어보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한 방인데 신발을 벗고서 들어오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모판에서 모를 뽑아내 논에 옮겨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소리다. 2030여명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선소리꾼의 메김소리를 받으면서 모를 심어 나간다. 뒤로 이동을 하면서 모를 심어나가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다. 논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 곳이 삶을 영위하는 곳이기에 논도 방이라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 소리 안에 그대로 배어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져야 삼배출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음을 일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먼저 남사당을 생각하는 김기복옹. 그는 오늘도 전수회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다.

기계로 짓는 농사말고 다랑이 논이 한 서마지기 정도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직접 손 모를 심으면서 함께 소리를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산 체험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신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길게 늘어서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모심기를 해보고 싶단다. 그것이 정녕 우리네 생활에서 배어 나오는 멋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마음이 아니면 남사당놀이를 하기가 어렵단다.

남사당은 정말 어려운 기예를 갖고 있어요, 그만큼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서운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황망히 길을 나서는 김옹에게서는 진한 토장 내음이 난다. 그 쇠가락에 남사당의 장인 정신이 배어있다고 하면, 그의 소리에는 짙은 농사꾼의 애환이 서려있다. ‘여기도 한 방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그의 소리처럼, 진정한 꾼으로서의 노옹의 삶이 오늘도 바우덕이 묘 앞길을 따라 먼 길을 떠나던 옛 남사당패들의 행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200241일자 경기일보 /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남사당은 1900년대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흔히 유랑집단(流浪集團)의 한 류파로 본다. 남사당이란 소리와 술, 몸을 팔던 여자들의 집단인 사당패에 비교하여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연희자 십 수 명이 있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일정한 거소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여자 1∼2명이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와서야 있었던 일이다.

 

남사당패들은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등 6가지 놀이로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서운면 청룡리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하였다. 안성남사당패가 유명해 진 것은 〈바우덕이〉라는 여자꼭두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성남사당패의 꼭두쇠인 바우덕이는 사내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미모와 옹골찬 소리가락, 줄타기 재주가 당내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예인 바우덕이

 

남사당 최고인 꼭두쇠 바우덕이(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는 남사당패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로 안성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온갖 남사당 기예를 익혔으며, 뛰어난 기량으로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걸판지게 떨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총기로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앙받은 바우덕이는 꼭두쇠로 활동하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남사당패의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동짐꾼 등 40~50여명으로 구성되어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놀이를 행하였다.

 

남사당패의 조직

 

꼭두쇠는 패거리에서 대내외적으로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조직된 패거리는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일사불란하고 엄격하였다.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그 충원방법으로 고아나 가출아 등을 받아들였고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부모의 승낙을 얻어 받아들이거나 유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했는데, 곰뱅이란 남사당패 은어로 <허가>란 뜻으로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 보았다. 뜬쇠는 각 연회분야의 선임자로서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의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을 두게 되며,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뜬쇠들의 판별에 의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연회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1가지씩 기예를 익힌 뒤에 가열이 되는데 이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女裝)을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노자와 이밖에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빌려주고 해우채를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다.

 

 

안성 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기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해 김복만 - 원육덕 - 이원보 - 김기복으로 이어졌고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면서 끈질긴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남사당패의 풍물놀이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하여 진풀이, 무동, 벅구놀이, 채상놀이, 선소리 등의 몸재주와 묘기에 소리(산타령, 새타령, 모찌는 소리, 논매는 소리등)까지 곁들이니 훌륭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풍물이란 우리나라 특유의 민중 음악이며, 남사당패에 의하여 떠돌이 판굿 모임에 맞게 놀이판이 풍부하게 짜인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 풍물놀이는 남도 농악에 비해 무동의 수가 많고 5무동을 비롯한 3무동, 4무동, 단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지며 최고의 기량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7무동이 있어 뛰어난 기량을 떨치고는 했다. 현재 안성의 남사당은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단장/김기복)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사당의 연희종목

 

남사당 놀이판에는 놀이 전에 줄타기의 줄을 매고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마당 한가운데에 버나․살판․덧뵈기 등을 연희할 멍석을 5∼6장 깐다. 여기서 벌어지는 <남사당놀이> 6종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⑴ 풍물 :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무동(새미)․채상(열두발 상모) 등을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더하였다. 인사굿부터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터․당산벌림․양상치기․허튼상치기․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무동놀림․네줄백이 등의 판굿을 놀고, 판굿이 끝난 다음에는 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장구놀이․시나위․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을 한다.

 

 

⑵ 버나 : 버나는 쳇바퀴·대접․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단순히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성(劇性)이 짙었다. 돌리는 물체에 따라서 대접버나․칼버나․자새버나․쳇바퀴버나 등으로 분류된다.

 

 

⑶ 살판 :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케 하는 살판은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지기․팔걸음․외팔걸음․외팔곤두․앉은뱅이․팔걸음․수세미트리․앉은뱅이․모말되기․숭어뜀 등의 순서로 논다. 살판쇠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잽이의 장단에 맞춰 정해진 차례대로 곤두질을 치는 것이다. 살판이란 말은 곤두박질을 할 때 불을 가득 담은 화로를 안고 재주를 넘다가 죽는 수도 있어 ‘살판이냐, 죽을판이냐’를 가늠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전한다.

 

 

⑷ 어름 : 어름이란 줄타기를 말하는데, 남사당패의 어름놀이는 초청에 의해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 다닌 <광댓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연했기 때문에 민중 취향으로 짜였다. 어름산이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줄 위에서 가창(歌唱)하고 잽이의 장단에 맞춰 진행되는 것으로 버나․살판의 경우와 같다.

 

 

⑸ 덧뵈기 : 덧뵈기는 다른 지역 탈놀음에 비해 의식성(儀式性)이나 행사성(行事性)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다.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4마당으로 짜여 있는데, 먼저 첫째마당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마당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마당에서는 내부 모순을 불식하고, 끝마당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⑹ 덜미  :맨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남사당패들은 <덜미>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목덜미를 쥐고> <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杖頭人形)을 뜻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지배층의 지배구조와 그 횡포에 대한 저항,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통해 외래종교의 비판, 서민들의 우직한 염원(念願) 등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으로 40여 개의 인형과 10여 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각기 독립적으로 연관된 2마당 7거리를 놀았다. 2마당 7거리는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 짓고 하는 거리) 등인데, 채록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석남사. 서운산은 남으로는 서운면 청룡사가 자리를 하고 있고, 북동으로는 석남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석남사는 가파른 경사에 층계를 놓고, 전각을 계단식으로 꾸며 놓은 운치 있는 절이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19년인 680년에 승려 담하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성왕 18년인 876년에 염거화상이 석남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고려 광종의 아들인 혜거국사가 후에 크게 중건을 했다. 석남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이름 높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수백 명의 스님들이 선방에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는 것이다.

 

서운산의 마애여래입상을 찾아 헤매다

 

마애불이 있음을 알리는 이졍표

 

석남사에서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 서운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보면,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석남사까지는 300m, 정상까지는 1.8km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마애불이 있다는 표시도 보인다. 금광면 상중리 산22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 높이 5.3m의 이 마애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석남사를 한 바퀴 돌고 종무실에 가서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다리를 건너 산 위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대답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마애불이 500m 앞에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우측으로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리고 직진을 해도 역시 산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마애불을 안내하는 표시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리를 건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측으로 난 다리를 건너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500m 이상을 더 걸었을 것 같은데도, 마애불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새 산 정성이 바로 앞에 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마침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나, 마애불의 위치를 물었다. 반대편이라는 것이다. 다리 건너에 작은 이정표 하나만 세워주었어도, 이런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   

 

석남사의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에 석남사를 창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석남사에서 약 350m 정도 떨어진 곳의, 자연암벽에 입상을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길이 갈라지는 마애불의 밑에서부터 돌로 탑을 군데군데 쌓아놓았다. 조금 올라가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마애불이 보인다. 이 지역의 마애불들이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를 한 것에 비해, 석남사의 마애불은 전체를 돋을새김 하였다.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마애불을 찬찬히 훑어본다. 전체적으로는 육중한 느낌이다. 암벽에 꽉 차게 조각이 된 마애불. 3중의 원형 두광을 둘러놓았는데, 그 모습이 투박하다. 그리고 몸에도 신광이 표현이 되어있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씻겼을 텐데, 아직도 뚜렷하게 형태가 남아 있다.

 

발가락이 시리겠네요

  

얼굴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두광과 삼도가 뚜렷하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연화대 위에 올라선 마애불, 법의 밖으로 발가락이 돌출이 되어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연화대 위에 올라 서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발가락 부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경스런 행동이라고 하겠지만, 양 발가락의 표현이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게 만든다.

 

돌출이 된 연화대 위에 법의에서 벗어난 발. 그리고 한 편에 다섯 개씩의 발가락.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데 사실적이다. 법의 속에서 삐죽이 내민 열 개의 발가락. 전체적으로 무거운 마애불을 이 발가락이 희석시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모두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있고, 육계는 낮고 어깨는 넓게 표현을 하였다. 목에 보이는 삼도는 필요 이상으로 두텁게 해, 마애불의 인상이 투박하면서 무겁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를 덥고 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U 자형의 주름을 이룬다. 주름은 복부 밑까지 내려오다가, 다리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석남사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 그 모습 그대로

 

내의의 가슴께 묶은 매듭. 투박한 모습이며 밑으로 잡은 주름도 투박하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묶었으며, 밑으로는 주름이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매듭이나 주름도 상당히 투박해 보인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내영인과 같은 형태의 수인이지만, 한 팔을 아래로 하지 않아 내영인은 아니다. 일설에는 법설을 할 때의 수인과 같다고 한다. 양 팔에도 법의가 팔에 걸쳐있는 형태다.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산을 한 바퀴 돌아 찾아와서인가, 저녁 햇살이 비치는 마애불의 모습이 유난히 자비로워 보인다. 인간세상 고통을 지금이라도 다 가져갈 듯한 미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것인지. 누군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된 듯, 향이 연기를 허공에 퍼트리고 있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이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불입상 1기가 서 있다.

 

미륵불로 조성된 매산리 석불입상. 전체적인 모습에서 고려 초기의 석불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상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석불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머리에 쓴 사각형의 보개와 비례에 맞지 않는 보관

보개와 보관이 마주하는 부분에도 연꽃문양을 조각해 나름대로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이 미륵당의 부처는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모습보다, 오히려 괴이하기까지 한 모습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석불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이 해학적이기도 하다. 가늘고 길게 조성한 눈도 조금은 어색하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의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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