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무릉계곡은 국민관광지 제77호로 1977년에 지정이 된 곳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무릉계곡은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동해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금란정과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는 무릉반석(아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란정은 조선조 말 향교인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한 유생들이 모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승 무릉계곡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 정각을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계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새롭게 선경에 조성한 금란정

 

깨끗하게 정리가 된 금란정은 근자에 들어 새롭게 조성한 정자다. 아마 1945년에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반석에는 깊게 판 많은 글자들이 사람의 눈길을 끈다. 한문으로 된 문구들을 바라보며 학식이 없음을 탓한다. 어찌하랴,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그냥 바라다 보고만 있어야지.

 

누가 같이 동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반석의 넓이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장관에 취해 잠시 정자는 잊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해가 간다. 이 절경을 보고 시 한수 읊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에 취해 흥얼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묵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이곳에 와 정자를 지어 풀어버리려고 했던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그분들도 그런 심정이지나 않았을까.

 

 

금란정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무릉계곡을 찾아 계곡 입구에서 삼화사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일주문 전에 정자가 있다. 무릉계곡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효가 사거리 - 우회전 - 4.4km - 삼화동3거리 - 좌회전 - 5.3km -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가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현지교통을 이용하려면 동해시외버스터미널-무릉계곡으로 30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전라북도에는 두 개의 ‘제일’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호남제일루’란 명성을 자랑하는 남원의 ‘광한루’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제일이 있다. 바로 정읍시 태인에 자리한 ‘피향정’이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주변의 경관을 느끼면서 피서를 하고자 지은 피향정은, 호남지방에서는 으뜸가는 정자로 꼽힌다.

몇 년 전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피향정을 들렸다. 그 때는 봄이었는데, 겨울의 경치는 어떠할까? 그것이 궁금하여 정읍시 태안에 있는 피향정을 찾아갔다. 피향정은 보물 제289호이다. 예전에는 피향정의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던 경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읍시 태인면에 소재하는 보물 제289호인 피향정

통일신라시대에 기인하는 피향정

피향정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태산군수로 있던 최치원이 이곳의 연지가를 소일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것을 버면, 피향정은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현재의 피향정의 모습은 조선조 숙종 42년인 1716년에 현감 유근이 넓혔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였으며,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피향정은 주심포계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는 새 부리가 삐져나온 것과 같이 꾸몄다.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위) 현판에는 '호남제일정'이라 적혀있다(가운데) 난간은 화려하지 않게 꾸며졌다. 

피향정은 사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의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피향정의 동편으로는 ‘피향정(披香亭)’이라 쓴 편액이 걸려있고,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남아있다.

누마루 밑의 돌기둥, 정말로 말문이 막혀

아직 마당에는 눈이 쌓여있다. 몇 년 사이에 피향정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안으로도 흙 담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일각문을 지나 정자 가까이 다가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있다. 바로 누마루 밑에 세운 돌기둥들이다. 이 기둥 돌들은 아래가 약간 넓고 위가 좁은 방추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일정하지가 않다.



피향정의 멋은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이다.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기둥도 있다(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여려 겹 포개놓아 만들었다(가운데) 정자 안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걸려있다(아래) 

몇 개의 기둥은 여러 개의 돌을 포개 기둥을 삼았다. 밑으로 줄지어 선 돌기둥들은 위에 잇는 기둥과 일직선이 되게 조성을 하였다. 이렇게 돌기둥을 사용해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형태는, 피향정이 아니면 보기가 힘들다. 정자 위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한 층부터 여러 층을 포개 놓으면서 자연적인 층계가 되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피향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자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정자는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남원 광한루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 피향정. 누군가 ‘호남제일정’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그런 안목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철이라 조금은 황량하게 보이겠지만,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명성이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남제일정이라는 것에 절로 수긍이 간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길 것인지. 정자를 뒤로하면서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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