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과부가 있었다. 이 과부는 날마다 홀로 지새우는 밤이 너무나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남근석을 두 개 만들었다. 그리고 치마폭에 싸서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집으로 옮겨오는데, 너무나 무거워 한 개의 남근석은 창덕리에 두고 왔다.

 

산동리 남근석을 답사하는 날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퍼붓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카메라 렌즈에 빗방울이 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남근석은 참으로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다. 아랫부분은 연꽃문양을 둘렀으며, 1500년 대에 세웠다고 하니 벌써 500년 동안 이 마을에 서 있었다. 남근석은 다산이나 득남을 위해 세운다. 그동안 이 산동리 남근석을 찾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성을 드렸을까? 마을에서는 정월 보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이야기를 한다.

 

  
비바람이 몰아쳐 촬영이 힘든 날에 찾아갔다

  
산동리 팔왕마을 이정표

산동리 팔왕마을에 서 있는 남근석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남근석을 들고 오던 과부가 힘이 들어 버리고 왔다는, 또 하나의 남근석을 찾으러 팔덕면 창덕리를 찾아갔다. 길가 낮은 둔덕에 서 있는 또 하나의 남근석. 생김새나 크기가 산동리의 남근석과 흡사하다. 그러고 보면 산동리에 전하는 이야기가 수긍이 간다. 산동리에 살고 있던 과부가 두개를 만들어 오다가 무거워서 하나를 버렸다는.

 

  
팔덕면 창덕리에 서 있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

현재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창덕리 남근석. 산동리의 남근석과 재질이나 크기, 그리고 조각을 한 모습이 유사하다. 이 남근석도 1500년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산동리의 남근석과 같은 연대다.

 

산동리에 사는 과부는 도대체 왜 남근석을 두개씩이나 만들었을까?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만든 이 남근석은 대담하게도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였다. 나무로 만든 해학적인 것들은 무수하다. 그러나 돌로 만들어진 것들 중에도 이렇게 사실적으로 제작된 것은 드물다.

 

  
창덕리에 소재한 남근석. 좁은 길가에 서있다

도대체 이 과부가 남근석을 만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외로움에 지쳐서 밤마다 이 성기석을 보고 마음속에 둔 남정네를 그리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성기석을 신표로 삼아 이런 장대한 남성을 얻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비는 쏟아지는데 이 남근석을 보면서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남근석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을 한 순창 팔덕면의 남근석. 비를 맞은 남근석은 조각이 선명하게 나타나 대담함을 엿볼 수 있다. 비가 쏟아지는데 남근석 곁을 서성이면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 저런 강한 남자가 되고 싶음인가 보다.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산 2-1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된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 높지 않은 둔덕의 윗부분 노송 숲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정자는, 조선조 세조 2년인 1456년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가 지은 정자이다. 정자 이름을 ‘귀래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 명칭은 바로 신말주의 호이기도 하다.

신말주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곳은 신말주의 부인인 설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신말주는 이곳으로 내려와 뜻이 통하는 노인 열 명과 ‘십노계’를 결성하고, 이 귀래정에 올라 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정자 주변에는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서거정, 강희맹 등의 귀래정기와 시문 등이 즐비하게 걸려있는 귀래정. 현재의 간물은 1974년에 고쳐지은 것이라고 한다. 귀래정을 오르는 길에는 신말주의 후손들이 살았단 유지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설씨부인의 ‘권선문’과 신경준의 ‘고지도’ 등을 보관하고 있는 ‘유장각’ 등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신말주의 세거지는 다시 한 번 거론하기로 한다. 노송이 높게 자란 언덕길을 오르면, 사방이 훤히 트인 곳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세거지를 지나쳐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다 보니, 각종 새들이 여기저기서 푸득이며 날아간다. 아마도 저 새들도 이 노송 숲길이 꽤나 좋은가 보다. 정자는 그저 바람을 맞으며 앉아 글 한 수 읊조리기 좋게 지어졌다. 정자 곁에는 고목이 되어버린 고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옛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귀래정’ 아마도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처가인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아픔의 역사로 뒤돌아 가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흐르는 띰을 닦아낸다. 노송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6월 18일의 후텁지근한 날씨에 절어버린 나그네를 반긴다.



주추만 보고도 반해버린 정자

정자를 찬찬히 둘러본다. 정자의 중앙에는 한 칸 방을 뒤편으로 몰아 들였다. 누마루를 깐 사방은 난간 하나 장식하지 않은 단출한 정자이다. 기둥은 원형기둥을 이용했는데, 주추를 보니 꽤나 아람답다. 주추를 보면서 혼자 빙긋 웃어본다. 주추 하나에도 사람이 반할 수가 있는 모양이다.

밑은 넓고 배가 튀어나오게 둥글게 만들고, 위는 조금 역시 둥글지만 배가 튀어나오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그 주추 가운데를 파 목재를 고정시켰다. 이런 주추를 만난 것도 처음이지만, 그 주추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렇게 주추 하나를 조형한 것도 귀래정 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그저 화려하지 않은 정자 귀래정. 그 누마루에 걸터앉아 일어나고 싶지가 않다. 처음 정자가 지어진지 벌써 550년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신말주 선생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일까? 천천히 정자를 내려와 세거지로 향한다. 세거지 곁 마을 집에서 백구 한 마리가 짖어대며 낯선 나그네를 경계한다.

전북 순창군 적성면 석산리 산130-1에 소재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4호 ‘석산리마애여래좌상(石山里磨崖如來坐像)’ 이 마애불은 이번이 두 번째 답사이다. 첫 번째는 물어물어 찾아갔지만 일몰 시간이 다 되어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이 마애불은 적성면의 선돌마을을 지나, 도왕마을 쪽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번에 찾아갔다가 보지 못하고 와서인가, 늘 마음에 미련이 남아있던 곳이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이곳을 택해 답사 길을 잡았다. 6월 18일 아침부터 땀이 흐른다. 오늘도 어지간히 날이 찔 모양이다. 마애불이 500m 전방에 있다는 곳부터 걸어야 한다. 마애불로 인해 500m의 아픔이 있는 나이다. 예전에 500m 산 중턱에 마애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올랐다가 곤욕을 치룬 기억이 나서이다.


산길을 접어드니 마음만 바빠 오고

마애불은 대개가 깊은 산중에 있다. 요즈음은 교통이 좋아 차가 들어가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아직 마애불은 걸어 올라야 하는 곳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석산리마애여래좌상도 산을 걸어 올라야 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산이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숲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가끔은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의 땀을 식혀주기도 한다.

아무리 숲길이라고 해도 30도를 넘는 기온이라고 한다. 조금 오르다가 보니 목이 탄다. 그런데 물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참고 오르는 수밖에. 누군가 나무계단을 놓았다. 고마운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오르다보니, 불과 얼마 오르지 않아 나무계단이 끝이 난다. 그리고 가파른 암벽 위로 길이 나 있다. 쌓인 낙엽에 미끄러져 한 발만 실수를 해도 저 밑으로 굴러 떨어질 듯하다.



조심조심 바위를 지나고 보니 좌측으로 누군가 이곳에 집이라도 지으려고 했는지 돌 축대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길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산죽이 자라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산모기는 땀 냄새를 맡았는지 어지간히 달라붙는다. 산죽덤불을 헤치고 조금 올라가니 바위가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불

바위는 약 2.5m 정도가 되는 듯하다. 몇 덩이로 나뉜 바위를 바라보니 좌측에 마애불을 새겨놓았다. 마애불은 오른쪽 대좌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수직으로 선 평평한 바위면에 두광과 신광, 불신, 대좌 등을 얕은 부조로 조각하였다. 커다란 바위가 머리 위를 덮고 있어, 그 오랜 시간을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온전히 남아 있었나보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항마촉지인을 한 채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좌상이다.



석산리 마애불의 머리 부분은 마치 두터운 모자를 쓴 듯 투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민머리에 큼직한 상투 모양의 육계를 묘사하였다. 얼굴은 큼지막하게 정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눈은 마모되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큼직한 코와 두툼한 입술 등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입술은 가장자리는 쳐지게 표현하였으며, 입술과 이마 선을 따라 붉은색의 칠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왜 채색을 한 것일까?

삼도는 목이 짧아 몸의 상단에 걸쳐지게 표현되었으며, 몸은 얼굴에 비하여 유난히 작게 표현하였다. 아마도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깨가 좁고 위축되어 있는 편이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왼쪽 어깨에 대의 자락을 걸친 우견편단식 옷차림이다. 법의 자락은 배 부근에서 결가부좌한 두 다리 위로 가는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연화대좌는 오른쪽 부분이 파손되었으며, 광배는 배 모양의 신광 안에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광배의 여백을 따라 당초무늬를 선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두 번째 찾아가 만난 순창 석산리마애여래좌상. 얕은 부조기법과 토속화된 얼굴 표현, 그리고 평행밀집형의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어서 그런가, 별다른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 마애불의 불신에는 채색을 하였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고려시대 불상 조성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마애불을 조성하고 채색까지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합장을 하고 마음속에 간직한 서원을 말한다. 입술에 붉은 칠을 한 마애불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입을 움직이는 듯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일까? 시원한 산바람이 산죽 잎을 흔들고 지나간다.

한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일제의 만행에 앞서 피를 흘리며 싸웠다. 그들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런 고귀한 죽음을 아직도 망령된 일제의 잔재들이 더럽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가끔은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이젠 그도 세월이라는 역사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듯해 안타깝다.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번지 순창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순창객사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6.25때도 불타지 않고 잘 보존된 중요 유적지며 사적지다. 순창객사는 조선조 영조 35년인 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이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48호인 순창객사와 망궐례를 행하던 정당(가운데, 아래)

서대청이 사라져 버린 순창객사

순창객사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다. 정당이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전하 만만세’라고 새긴 궐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곳이다. 또한 나라의 일이 있을 때도 궁궐을 향하여 절을 했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고을의 수령은 반드시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중앙의 관리가 이 고을에 찾아 왔을 때는 이곳에서 묵었던 곳이다. 객사는 공무로 일을 보는 관리들의 숙박 장소였던 곳이다.




순창객사의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안의 바닥은 누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은 모두 살창으로 막아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이는 공적인 궝례를 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것이란 생각이다.

방이 없는 동대청

원래 객사를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기 때문에 객방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동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그런데 이곳 동대청이 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서대청에 방이 있었는가 보다. 동대청은 시원하게 누마루를 깔았으며, 주변에는 오래 묵은 고목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객사의 역사를 가늠하게 한다.


동대청은 1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올렸다. 그리고 원형의 기둥을 세워놓았다. 대청의 누마루 위에는 가운데 기둥을 세웠으며, 천정 위에는 신서도와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교한 건축기술을 자랑하는 이 객사는, 한말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임병찬 의병장이 진을 치고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구국열기가 뜨겁던 곳

순창객사는 단순히 객사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던 곳이 아니다. 순창객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읍의 무성서원에 모였던 의병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운동을 거세게 펼쳤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잔주에서 급파된 병사들에 쌓여 항전을 벌이던 의병들은 결국은 숫자열세에 밀려 패퇴를 하고 말았고, 최익현은 순창객사에서 일본군에게 생포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가 되었다.



관원들의 공무길에 묵을 수 있었던 객사. 언제 서대청이 소실되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정당과 동대청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자리하고 있어, 객사의 단조로움을 벗어나게 해준다. 군청 옆 순창초등학교 건물 앞에 서 있는 순창객사는, 역사의 산 증거물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오수천을 바라보며 한 소리꾼이 춘향가 한 대목을 불러 젖히고 있다.

자시에 생천(生天)하니 불언행사시(不言行四時) 유유창창(悠悠蒼蒼) 하늘 천(天)
축시에 생지(生地)하여 금목수화를 맡었으니 양생만물(養生萬物) 따 지(地)
유현미묘(幽玄微妙) 흑적색(黑赤色) 북방현무(北方玄武) 검을 현(玄)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동서남북 중앙토색 누루 황(黃)
천지사방이 몇 만리 하루광활(廈樓廣闊) 집 우(宇)
연대국조(年代國祖) 흥망성쇠 왕고래금(往古來今) 집 주(宙)
우치홍수(禹治洪水) 기자추연(箕子推衍) 홍범구주(洪範九疇) 넓을 홍(洪)
제제군생(濟濟群生) 수역중(壽域中)에 화급팔황 (化及八荒) 거칠 황(荒)

(생략)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박대(薄待) 못하느니 대전통편(大典通編)의 법중율(法重律) 춘향과 나와 단 둘이 앉어 법중 여(呂)자로 놀아보자. 이리 한참 읽어가더니마는,
"보고지고 보고지고 우리 춘향 보고지고 추천하든 그 맵시를 어서어서 보고지고."


조선 후기에 8명창 중 한 사람인 김세종(1835 ~ 1906)은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소리꾼의 내력이 있었다고 전하며, 김세종은 송우룡 등과 함께 고창의 신재효에게 판소리의 이론을 익혀, 신재효의 소리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세종의 이론은 소리꾼의 지침

김세종이 언제부터 소리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지 않는다. 다만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를 통해서 본 김세종의 판소리에 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 소리의 정형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 이론을 보면


가작마을 안내비와 마을 안길(아래) 우측으로 김세종 명창의 생가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첫째, 판소리 발림을 극적인 내용과 같게 해야 하며, 얼굴 표정과 몸의 모든 동작이 극적인 내용 및 절주가 같아야 한다.
둘째, 음악은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융합되어야 한다.
셋째, 장면이 긴박하지 않은 곳에서는 느린 장단을 쓰고, 긴박한 장면에는 빠른 장단으로 몰아야 한다.
넷째, 슬픈 장면에는 계면조를 쓰고 웅장한 장면에는 우조로 소리를 해, 조와 장단이 판소리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어울러야 하며 가사의 뜻에 따라 선율 또한 일치되어야 한다.
다섯째, 가사는 짧게 붙이고, 소리는 길게 부르는 ‘어단성장(語短聲長)’의 이치에 맞아야 한다. 등이다.

김세종의 자취를 찾아 가작리를 가다

흥선대원군조차 그 소리에 반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 김세종 명창. 그 자취를 찾아 순창군 동계면 가작리를 찾았다. 면 소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이지만 찾기는 수월치가 않았다.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매실나무들이 빼곡 차 있다. 그 한편에 ‘김세종 명창 생가 터’라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마침 밭에서 일을 하고 나오는 마을 분들을 만났다.

“김세종 명창 생가 터가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인가요?”
“아닙니다. 그걸 왜 거기 세워 놓았나 모르겠네요. 저 안에 보이는 저 집이 명창이 살던 집 터라고 하는데”
“저기 길가에 집 말인가요?”
“예, 거기가면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그 앞 집이예요. 며칠 전에도 버스로 사람들이 한 차가 와서 둘러보고 갔는데, 그 양반이 대단한 사람이었나 보네요.”

마을에서조차 이젠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명창의 일생이다. 마음 한 편이 허전해진다. 소릿광대 쯤으로 여김을 받던 세월을, 그렇게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던 명창의 대우가 씁쓰레해서이다. 괜히 생가 터 안내판만 보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돌아설 뻔 했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우측으로 공동 우물이 보인다.


그 앞에 앞마당이 너른 집이 있다. 바로 김세종 명창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집터라고 한다. 지금의 집이 당시의 집은 아니다. 그러나 그 주변을 돌아보니 명창이 나옴직도 하단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집 앞으로는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잠시 그길로 걸음을 옮겨본다. 조금 나아가니 잡풀이 우거져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아마도 명창은 이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며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까?

장자백, 이동백, 유성준, 이선유 등 당대를 울린 명창들을 제자로 둔 김세종 명창. 대문 앞에 놓인 풍구에서 옛 흔적을 찾아본다. 괜히 부질없음을 알고 멋쩍은 웃음을 남기며 뒤로 돌아선다. 어디선가 천자뒤풀이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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