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2-3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는 충주미륵대원지이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 사원터로 밝혀졌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미륵대원지에는 보물 제96호인 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 그리고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당간지주, 삼층석탑, 귀부, 사각석등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각형으로 조형이 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이 된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대원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층석탑 앞에 위치한다. 이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와 화사석, 그리고 위에 올린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벌써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아왔다. 그동안 이름도 바뀌고 비지정으로 남아있던 석조물들이 지정문화재로 바뀌기도 했다. 사각석등의 형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또 하나의 석등이 있아. 오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양편에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화형문양으로 장식을 한 간주석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을 장식했다. 연화문은 대형으로 새겨져 있지만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사각형의 홈을 마련하여 간주석을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간주석은 평면 사각형의 석주형으로 마련되었다. 표면에는 보주형 안상이 새겨지고, 그 안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화형 문양이 새겨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앙련을 표현하였는데, 하대석에 비하면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으로 각 면이 가운데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대석과 대조를 이룬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특이한 화사석의 결구수법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 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간주석과 화사석은 독특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특이롭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륵대원지의 사각석등에서 보이는 화사석의 결구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 현화사, 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걷기조차 힘든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비록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며 답사를 마쳤지만, 그래도 한 곳에서 많은 문화재를 만났다는 행복이 더 깊었나보다. 남들이야 그 행복을 알 수 없겠지만, 30년 세월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난 사람에게는 이보다 즐거움은 없을 듯하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이곳은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리 사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으로는 지릅재를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절터. 미륵대원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절터에는 현재 미륵리 석불입상, 석등,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있고,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여기저기 석재가 널려있는 미륵리 사지. 현재는 세계사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중창 중에 있는데, 본존불인 석불입상으로 올라가는 입구 좌측에 커다란 귀부가 하나 놓여있다. 그 귀부의 크기로 보아, 이곳으로 운반을 하는 데만도 대단한 역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미륵리 사지에 소재한 귀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로 밝혀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이 귀부는 길이가 605cm, 높이가 180cm나 된다. 그 모습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과연 귀부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귀부는 머리가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넘어가는 귀부의 형태는 거북이 등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부의 경우는 거북이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우선 등에는 거북등에 있는 육각의 문양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앞쪽 왼편 등에 작은 거북이 두 마리가, 어미의 등을 타고 오르듯 양각되어 있다. 그것도 주변을 파내고 양각을 한 형태이다. 등을 보면 중앙부분이 뾰족하게 올라있다. 이 형태도 일반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다. 머리는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길게 - 자형으로 판 입과 그 위에 작은 콧구멍, 그리고 양 옆에 동그랗게 표시한 눈 등이 사실적 표현을 했다. 앞발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을 했다.


거북이 등에 파 놓은 비좌는 거북 모양에 비해 크지가 않다. 1970년대부터 발굴을 시작한 미륵리 사지에서, 수차례 발굴을 했으나 비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 귀부 위에 올려 질 비의 몸돌은 조성되지가 않았다는 것인지. 이 미륵리 사지에 이러한 귀부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미완성일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미륵리 사지에 있는 귀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의구심이 생긴다. 그 첫째는 바로 이 귀부를 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 더구나 이렇게 본존불,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있는 그 앞에 자리한 귀부. 등에 내 놓은 비좌로 보아서는 귀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등에 파 놓은 홈이 과연 비좌일까 하는 점이다.



비좌로 보기에는 형평에 맞지가 않는다. 적어도 이만한 귀부에 올릴 비문이라면 그 비의 몸돌 역시 상당히 클 것이다. 그런 큰 비문의 몸돌을 올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를 올리는 비의 받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일 이것이 비를 받치는 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시대에 따른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등에 새기는 문양이나, 거북이 몸에 용머리 등,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미륵리 사지의 귀부는 단순한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이 거북이 형태로 다듬어 놓은 귀부의 뒤편 우측 꼬리 부분이다. 꼬리 부분에는 돌을 쪼아 내려는 듯 여러 개 구멍이 나 있다. 이렇게 일렬로 나 있는 구멍으로 보아, 이 귀부는 미완성작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귀부라면 이해가 간다. 귀부를 조성하기 위해서 조각을 하는 도중에, 중단이 되어 그대로 방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석굴식으로 만든 석불입상이나 오층석탑 등 모든 것이 다 완성이 된 절에서, 왜 유독 이 귀부만 완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미륵리 귀부가 주는 의문점

미륵리 사지에는 현재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첫째는 하늘재 입구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 탑이다. 그리고 본존불인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충청도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석굴식 법당의 주존불이다.

석불입상과 오층석탑의 사이에는 석등이 서 있고, 그 앞으로 보물 제95호인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 역시 고려 초기 탑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경내에는 당간지주와 불좌대 등 많은 석조물들이 남아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이 미륵리 사지의 창건 당시의 사격이 어느 정도였는가 가늠이 간다.



이 몇 기의 문화재의 연대가 모두 고려 초기의 것으로 밝혀져, 미륵리 사지는 고려 초기에 있던 미륵대원이라는 절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미륵대원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석굴을 짓고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석불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북녘을 호령하던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부는 언제 조성이 된 것이며, 무슨 연유로 이렇게 거대한 돌 거북을 조각한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다. 이 거북의 머리가 왜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본존불인 석불입상과 같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에서 조성이 되었다면, 이것을 귀부로 보아야 할까 하는 점이다.


고려 초기 인근의 사지인 원주 부론의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와,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도 같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절이다. 이곳에도 비가 서 있으며 이 비의 귀부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용머리에 거북의 몸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주변의 정황을 살펴볼 때 미륵리 사지의 귀부가 과연 귀부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고려 초기의 귀부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등에 새겨지는 문양이 없다는 점. 필요이상으로 크기가 크다는 점,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다는 점 등을 볼 때, 귀부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석조물은 아니었을까?

거북이 등에 새겨진 두 마리 작은 거북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를 상징하는 게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귀부 하나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 쌓인 미륵리 사지를 오랜 시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귀부가 눈에서 떠나지를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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