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6에 소재한 중요민속자료 제147호인 청천리 고가는,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현재는 곁에 충북양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 때는 이 집을 양로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이 청천리 고가는 ㄷ자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를 일각문을 사이로 동서로 나란히 두고, 안채의 앞에는 중문을 달아 一자 모양의 광채를 배열했으며, 뒤쪽에는 4칸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선이 고운 사랑채의 멋은 단연 최고

 


 

 

청천리 고가의 대문채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대문의 외벽은 기와로 줄 문양을 넣은 것이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ㄷ 자 모양의 사랑채가 자리한다. 청천리 고가의 사랑채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집의 사랑채와는 다르다. 우선 사랑채의 지붕을 보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선이 일품이다. 어떻게 저렇게 양편 날개채의 지붕을 아름다운 선으로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보기만 하여도 덩달아 하늘 위로 날아오를 듯하다.

 

중앙은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 등으로 꾸몄는데, 대청은 동쪽으로 몰아 낸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동쪽의 날개채를 누마루로 올려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게 했다. 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둘러 대청까지 연결을 했으며, 대청 앞에는 들문을 달아 들어 올렸다. 이 집은 19세기에 송병일이 지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종가로 6대가 거주하였다는 청천리 고가는, 1944년부터는 사회복지법인 충북양로원에서 사용을 하기도 했다.

 

대문 외벽은 기와로 선을 넣어 아름답다. 우측에는 '충북양노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딴 사랑채보다 지붕의 선이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붕의 선이 있다니
 
사랑채의 동편끝에는 누마루를 두어 누정과 같이 꾸몄다.
 
두칸 대청은 동쪽으로 몰아 내었다. 이렇게 대청을 낸 것도 이집의 특이한 점이다.

 

안채 모서리에 쌀뒤주 방을 드리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안채는 ㄷ 자 집으로 안마당에 기단을 쌓은 장독대와 돌로 둥그렇게 꾸민 우물이 자리한다. 마침 안채의 방과 대청을 연결하는 툇마루에는 메주를 말리느라 잔뜩 벌려놓았다. 그 모습이 한없이 정겹다. 양로원의 관계자 설명에 따르면 지금은 고가는 사용을 하지 않고 있으며, 양로원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직접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방의 뒤편에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안방의 뒤편쪽 모서리에 까치구멍을 낸 이상한 방이 한 칸이 보인다. 문을 널문으로 해 달았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이 모서리 방이 바로 쌀뒤주 방이다. 어떻게 안채의 뒤편에 이렇게 뒤주 방을 만들어 놓을 생각을 한 것일까? 고택의 무한한 변신에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안채 역시 대청을 동편으로 몰아 조성을 했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창호는 모두 들문으로 만들었는데, 양편 날개채가 색다르다. 우측 윗방과 사이를 떼어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동편 날개채 끝에 부엌을 드렸다. 양편 날개채의 지붕은 중앙의 지붕보다 낮게 두어, 전체적으로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ㄷ 자모양의 안채도 대청을 동편으로 몰았다. 양편의 날개체도 특이하다.
 
안마당에 기단을 쌓고 장독대를 꾸몄다. 이 또한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뒤주방 안채의 모서리에 마련된 쌀 뒤주 방. 이런 형태는 볼 수가 없었다.

 

집안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중문채와 사당

 

우암 선생의 종가였다고 해서인가, 이 고가의 꾸밈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집의 특징은 어디 한군데 모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안채의 앞에는 - 자형의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안채와 중문채를 합하면 튼 ㅁ 자 형으로 꾸몄다. 중문채는 광채로 꾸몄는데, 중문을 서쪽 끝에 놓고, 일렬로 광과 헛간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 뒤편으로는 네 칸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모두 앞으로 툇마루를 내고 양편의 두 칸은 까치구멍을 낸 막힌 벽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두 칸은 창호로 보아 마루방으로 꾸민 듯하다. 양편 두 칸은 아마 기물을 넣어두는 곳이고, 가운데 두 칸이 재실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뒤편에는 네 칸 사당을 두었다.

 

처마가 아름다운 집, 안채 모서리에 쌀되주 방을 드린 집, 안마당에 장독과 우물이 있는 집. 괴산 청천리 고가는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니, 과거 이 집안에 살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대단한 가문도 사라지는 것일까? 지역에서 나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청천리 고가를 보면서,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에 소재한,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6호인 팔괘정.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이 팔괘정은 송시열 선생이 율곡선생을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진다.

 

스승과 가까이 하고 싶어 지은 팔괘정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이 강경 황산리 금강가에 임이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서 있고 싶어서 정자를 지었다. 임이정과 불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팔괘정은 그 모습도 임이정과 닮았다. 팔괘정은 금강을 바라다보는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은 동일한 간격으로 그중 두 칸은 넓은 대청을 만들고, 한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초익공식과 동일한 구성의 공포를 짜 올린 팔괘정. 창방 위에는 기둥사이마다 다섯 개의 소로 받침을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팔괘정은, 한식 가옥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옛 모습을 그려보다.

 

송시열은 선조 40년인 1607년에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계 김장생이 강경 황산에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송시열이 팔괘정을 지은 때를 인조시대로 보는 이유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임이정과 팔괘정은 크기나 모습이 흡사하다.

 

당시 황산은 김장생과 송시열이라는 두 거목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두 정자 사이에는 조금 아래서 내려서 죽림서원이 있었으니, 날마다 금강가에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을 것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글을 읽으며 세상을 논하고, 시 한수를 지어 어딘가에 적지 않았을까? 팔괘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마 당시 이곳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그 자리에 끼는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았을까? 무심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팔괘정 앞을 날아간다.

 

바위벽에 남긴 흔적

 

팔괘정 옆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있다. 예전 이 팔괘정을 세운 송시열은 이 바위를 바라다보며 나라를 위한 충정의 굳은 의지를 키웠을 것이다. 바위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청초암(靑草岩)'과 ‘몽괘벽(夢掛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젊음의 기상을 떨치고, 꿈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마음에 새기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금강을 한가롭게 유영하는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아마 멀리 북녘까지 날아갈 차비라도 하려는가 보다. 저녁 햇볕이 저만큼 강물에 길게 붉은 띠를 두른다. 이런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이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했을 선생의 마음이 그려진다. 봄날 이는 황사바람 한 점이 스치고 지나간다. 정자 옆 바위는 미동도 없다. 그것이 팔괘정을 지은 선생의 마음일까?

 

괴산의 애한정은 정자 중에서도 그 의미나 경계가 남다른 곳이다. 괴강 삼거리 가까이 있는 애한정은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애한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위를 하여 그 공으로 별좌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낙향한 박지겸이 광해군 6년인 1614에 지은 정자 겸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원래의 애한정은 현재의 애한정 앞에 서 있다.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는 애한정

 

애한정으로 오르다가 보면 현 애한정 앞에 흙 담으로 둘러 친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의집이 있다. 앞으로는 느티나무 보호수들이 둘러친 이 전각이 바로 박지겸이 처음에 지은 애한정이다. 이 구 애한정은 지금은 퇴락하여 여기저기 담에 흙이 떨어져 있다. 애한정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마루를 만들고, 우측 두 칸은 방을 드렸는데,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연결해 전체를 놓았다.

 


예전 처음으로 지었던 애한정. 주변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빼어난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위로 오르면 솟을대문이 있는 애한정이 보인다. 솟을대문 앞에는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솟을대문과 어우러진다. 솟을대문은 양반가의 대문처럼 우측에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이면서도 하나의 독립된 가옥으로서의 구조를 하고 있는 애한정, 아마 학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구조로 정자를 꾸민 것 같다. 솟을대문은 좌측에는 방을 드려 놓았다.  

 

이 새로운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박지겸의 손자인 박연준이 군수 황세구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짓고, 그 후 숙종 38년인 1712년, 숙종 44년인 1718년, 영조 51년인 1775년에 중수를 하였다. 최근에는 1979년에 중수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꾸몄다.

 


양반가의 집들처럼 솟을대문 우측에 쪽문을 내었다.

 

 
후일 새롭게 조성을 한 애한정. 정면 6칸으로 꾸며진 애한정은 뒤편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있다.

 

팔각의 주춧돌을 사용한 정자

 

정자에는 애한정(愛閑亭)이라는 현판이 대청 우측으로 걸려있고, 안에는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등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와 '제애한정기첩후'이다. 그리고 몇 개의 편액이 더 걸려있다.

 

정면 6칸으로 된 애한정은 정자를 바라보면서 좌측의 한 칸은 누정 형태로 높게 꾸몄다. 그리고 앞을 문양으로 내어 마감을 했으며, 방안으로 들어가면 다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중앙에는 두 칸 대청이 있으며, 우측의 두 칸도 방으로 꾸몄다. 중앙 대청의 앞 창호는 모두 올려서 위로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대청에는 박지겸, 송시열 등이 쓴 글의 편액이 걸려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만든 끝방은 대청 옆방에서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특이한 형태로 주춧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일석을 이용해 맡에는 사각형으로 조성하고, 그 위를 깎아내어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양편 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대청과 연결을 하였다.

 


팔각으로 조형된 주축돌. 일석을 이용해 아래는 네모나게 다듬고, 위를 팔각으로 다듬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애한정

 

애한정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이 정자 앞으로는 다리를 놓기 위해, 몇 년째 교각 공사를 하고 있다. 정자의 뒤편으로 돌아가니 아직 체 녹지 않은 고드름이 처마 끝에 달려있다. 소나무 숲에서 나는 솔향이 싱그럽다.

 

애한정을 내려 괴강 쪽으로 걸어본다. 주변에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모여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백의로 선조 어가를 모시고 그 어려운 길을 다녀 온 박지겸. 아마 그 마음이 닮아 저렇게 높이 하늘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괴강 위로 놓인 다리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시끄럽다. 역사는 그렇게 주변 환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것인지. 바람 한 점이 몸을 감싸고 계곡으로 달아난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 산 174번지는 곤지암천을 끼고 있는 곳이다. 98번 도로를 따라 곤지암에서 여주군 산북면 쪽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에 '백인대(百仞臺)'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백인대가 무엇인지 궁금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안에는 축산물등급판정소가 있다. 그 앞을 지나면 곤지암천이 흐른다. 그곳에서 아래쪽으로 보니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작은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바로 백인대이다.

백인대를 바라보면서 밑으로 내려가니 소의 분뇨를 버린 듯 냄새가 코를 짜른다. 아직은 눈이 녹지를 않고 설 연휴에 며칠간 날이 푹하다 보니, 개울에 얼었던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른다. 건너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돌을 집어 물에 던져 넣었다. 수십 개의 돌을 큰 돌 중간에 던져놓고, 그 돌을 밟고 기우뚱거리며 겨우 내를 건넜다.



송시열이 제자와 강학을 논하던 곳

물을 겨우 건너고 보니 이번에는 녹은 얼음으로 인해 발이 빠진다. 겨우 벗어나니 눈길이다. 그래도 저 앞에 보이는 백인대를 올라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눈에 미끄러지면서 겨우 벼랑 아래에 도착을 한다. 계단은 절벽에 돌을 쌓아 놓았는데, 눈과 낙엽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을 헤치고 낙엽을 밀어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경사가 급해 자칫 한발만 실수를 하면 저 밑 곤지암천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바위를 잡으며 겨우 오른 백인대. 백인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시열이 충청도에서 상경할 때는 반드시 들렸던 곳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광주 출신의 제자인 구문찬과 더불어 경학을 강론하고 시를 지었다. 백인대는 곤지암천이 흐르는 절벽 위에 지었는데, 물이 많아지면 배를 타고 건너고, 물이 마를 때에는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백인대 가까이 다가가 본다. 밑으로는 곤지암천이 휘감아 흐른다. 이곳에서 대학자인 송시열과 강론을 한 구문찬. 1937년에 구문찬의 후손들이 이곳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훼손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백인대는 시멘트로 지었으며, 1996년에 신축한 것이다. 백인대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렇게 위험한 답사는 정말 × 같아요'

백인대를 돌아보고 내려오려는데 난감하다. 도저히 미끄럽기도 하고 가팔라서 내려갈 길이 막막하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 쌓인 낙엽과 눈을 치운다. 그래도 서서 내려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듯하다. 할 수없이 엉덩이를 계단에 붙이고, 한발씩 자리를 잡으면서 엉금엉금 내려오는 수밖에.



그렇게 한참이나 고생을 한 끝에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동행을 한 일행은 건너편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절벽을 기어오르듯 올라간 것도 위험한데,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손에 땀이라도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답사를 하는지 알아주나요?"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정말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이렇게 ×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인지 몰랐네요."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닌데 멀 그리 야단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이런 답사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웃고 말아야지.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리란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젠 '× 같은 답사'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글쎄다. 앞으로는 편한 글을 쓸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백인대의 기억은 아마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대전 동구 가양동 65번지에는 우암사적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적공원 안에는 우암 송시열과 관계되는 건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사적공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솟을대문이 보인다. 이 솟을대문 안에는 기국정과 남간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남간정사는 낮은 야산 기슭의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간정사 앞으로는 남간사가 자리하고, 뒤편으로는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1607 ~ 1689)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우암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첫째가는 제자이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인 남간정사

우리나라 정원사에 멋스러움을 이룩한 남간정사

우암 선생은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선생이 동구 소제에 살고 있는 동안 흥농촌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남간정사는 선생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곳이기도 하지만, 선생의 학문을 완성시킨 곳으로 치기도 한다.

이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남간정사는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 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남간정사는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간정사는 마루 밑으로 물을 흘려 연못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지금은 물길을 막아버리고 구멍만 남았다.
 
용과 닮은 괴이한 나무 한 그루

남간정사를 찾아갔으나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안을 기웃거려 보지만, 들어갈 방도가 없다. 정사 밑으로 난 물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으려나 했지만, 물구멍만 남겨놓고 축대로 막아버렸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밖에서만 빙빙 돌 수밖에. 돌다가보니 대문 앞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누워있는 형상이 보인다.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은 나무 한 그루. 대문을 막아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무를 찍으려고 나무 옆으로 돌아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흡사 한 마리 용이 비천을 하려고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이렇게 불편하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남간정사를 지키고 있는 용과 같아 보인다.

뒤편에서 보면 꼭 용과 같이 생겼다.


남간정사 출입문 앞에있는 나무는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다.
 
나무줄기에 돌출된 옹이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고. 누워있는 나무줄기의 한편이 뒤에서 보면 마치 용틀임을 하면서 승천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남간정사도 우리 정원의 조경에 독특한 구성이지만, 이 나무로 인해 남간정사의 멋스러움이 한결 더해진 듯하다. 답사를 하면서 많은 정자와 가옥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집과 나무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은 처음인 것만 같다. 이 나무 한 그루로 인해 답사 길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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