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65~1에는 삼국시대에 조성한 삼존불입상이 전하고 있다.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보존을 하고 있다는 것. 이 석불들은 선방사 터에 누워져 있던 것을 모아서 세웠는데,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지자체나 문화재청에서만 할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문화재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재들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던지 제대로 보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전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변에 삼불사라는 절이 들어와 보존을 하고 있다.

 

 

후덕한 상을 보이는 본존불

 

삼존불은 각각 조성이 되었지만, 이곳에 있던 절에서 한 시대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자리하고 있는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나게 표현을 했으며 풍만하다.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본존불은 수인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이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후덕한 인상에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협시보살의 표현 놀라워

 

삼존볼 중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소불로 보아 이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이 삼존불은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거기다가 천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당시 신라 석조각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에게 날마다 서원을 하다

 

경주 삼존불입상을 만나면 늘 한 가지 서원을 한다. 바로 이 해가 다 지나고 2014년에는 우리 모두가 아픔을 당하지 않고,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서원을 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 모든 일, 그리고 언제나 그저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고 피해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찌하랴. 이렇게 서원이라도 할 수 밖에.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민초들이야 그저 빌어서라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천 번인들 빌지 못할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우상숭배를 한단다. 하지만 세상에 우상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면 우상이 아닐까? 우상숭배라도 좋으니, 2014년 한 해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 6월 21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제일교회 1층 세미나실에서는 지동 주민들과 이재준 수원시 제1부시장과의 간담회가 열렸었다. 이 자리에서 지동 마을계획단의 유지현 14통장은

“우리 지동에는 530년 정도가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런데 이 느티나무가 지금 고사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 나무들은 수원에서도 가장 오래 된 느티나무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느티나무 주변을 쌈지공원으로 조성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재준 제2부시장은

“좋은 지적이다. 그런 오래된 나무들을 이용해 공원을 조성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일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마을르네상스 사업이 된다. 먼저 주민들이 선도적으로 무엇인가 시작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을만들기 추진단에 수시공모로 신청을 해서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오래 된 보호수가 있다면 당연히 살려내야만 한다.”라면서 주민들이 먼저 시작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 바 있다.

 

 

마을계획단 느티나무 살리기 위해 노력

 

팔달구 지동 465 도에 소재한 수령 530년의 할아버지 나무와, 지동 230에 소재한 수령 480년의 두 그루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로 부른다. 이 나무들은 화성 축성 이전인 조선 초부터 이곳에서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살아 온 노거수들이다.

 

할아버지나무는 높이가 12m에 나무의 둘레는 4.7m에 이른다. 할머니나무 역시 높이 13m에 이르는 노거수이다. 이 나무들은 화성 축성의 역사를 보았고, 한국전쟁 때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때 마을에서 위하기도 했던 이 나무들이, 현재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동마을계획단에서는 모임을 통해 이 나무들을 살려낼 방안을 모색 중에 있다. 수원시에서는 가장 오래 된 느티나무로 알려진 지동의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를 자칫 고사라도 시킨다면, 수원의 관광자원 하나가 사라진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쓰레기적치장, 전선줄로 몸살을 앓아

 

장맛비가 아침부터 내린다. 중부지방에는 호후경보가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세찬 빗줄기가 아니기에 못골 느티나무를 보기 위해 13일(토) 10시 경에 찾아가 보았다. 그동안 몇 번이고 이 나무들을 지켜보았지만, 이 나무가 과연 보호수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수령 530년이 되었다는 할아버지나무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위로 뻗은 큰 줄기 하나는 고사해서 잎도 달지 못한 체 그렇게 서 있다. 주변에는 담배꽁초와 빈 담배갑 등이 지저분하게 나뒹굴고 있고, 한편에는 쓰레기들이 쌓여있다. 전국 어디를 가보아도 보호수 옆에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은 이곳밖에는 없는 듯하다. 어떻게 보호수 곁에 쓰레기 적치장을 마련했을까? 몇 번이고 찾아가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다. 곁에는 차들까지 주차를 해놓아 이 할아버지나무의 환경이 최악임을 알려준다. 수령이 오래 된 노거수의 경우 매연에 약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실하게 잎을 달고 있는 할머니나무는, 할아버지나무보다는 상태가 나은 편이다. 하지만 이 할머니나무 역시 곤욕을 치루기는 마찬가지. 가지 사이로 숱한 전선들이 지나고 있다. 도대체 이 전깃줄을 가지사이로 보낸 사람들은, 보호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이대로는 두 그루 다 성장 제대로 못해

 

주변의 환경이 가장 열악하다.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를 이렇게 방치를 해도 좋은 것인지. 관계당국에서는 보호수 지정 이후 이곳을 들려는 보았는지, 그리고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 두 그루의 보호수인 느티나무들은 제대로 생육하기가 힘들다. 오죽하면 마을계획단의 회의에서 이 나무들을 살려야한다고 하소연일까?

 

 

보호수란 ‘보존 및 증식(增殖)의 가치가 있어 보호하는 나무.’를 말한다. 보호수는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이 되거나, 훼손이 될 수 있는 나쁜 환경 속에 놓아두면 안 된다. 하지만 지동의 두 그루 느티나무는 이러한 보호수로써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보호수를 관리해야 하는 담당부서에서는, 이 두 그루 보호수의 현장을 조속히 답사한 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줄 것은 당부한다.

 

500년 역사의 이야기를 간직한 지동의 할아버지나무와 할머니나무. 이 두 나무는 과거 득남을 기원하고, 가내의 안과태평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나무였다. 하기에 보호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보호수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지장사는 신라 소지왕 7년인 485년에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팔공산 자락의 절 중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깊다고 하는 북지장사의 임시 대웅전에는, 삼존불 곁에 석불좌상 한 기가 있다. 이 불상은 북지장사 대웅전 뒤쪽 땅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이 불상은 발견될 당시에 광배와 연화좌는 없었으며, 화강암으로 조성한 좌불상 한 기만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좌불상은 현재 북지장사의 대웅전은 복원 공사로 인해, 임시 대웅전에 모셔두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은, 지장보살 좌상으로 보인다.

온화한 얼굴의 통일신라 말기의 좌상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의 얼굴은 온화한 인상이다. 그저 옛 석불답지 않게 말끔하게 조각이 되어, 언뜻 보면 요즈음의 석조미술품으로 볼 수도 있는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단정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한 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옷은 주름의 조각선이 가늘고 약하게 형식화되어 시대가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며, 단정한 자태와 온화한 인상 등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미소를 띤 듯 노한 듯, 마음가짐이려니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얼핏 보아서는 그리 오래된 석불 같지가 않다. 문화재에 깊이가 없는 사람들은 그저 요즈음에 조성한 것으로 착각할 듯. 그렇게 고풍스럽지 않고 너무 말끔하단 생각이다. 그러나 그 연대가 신라 말이라고 하면, 이미 천년을 훌쩍 지났다는 것에 놀라고 만다.

아마도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을 만든 장인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 표면을 닦고 또 갈아낸 것일까? 이런 정도로 곱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 세월 또한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안내판의 설명을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도 그냥 지나쳤을 판이니 말이다.




곱게 표면을 갈아놓은 석불의 얼굴에는 미소를 띤 듯도 하고, 노여움을 가진 듯도 하다.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미소로도, 아니면 노한 듯도 보이는 대구 팔공산 자락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 그것 하나가 바로 옛 석불에서 만나는 신비로움이 아닐는지. 마음을 열고 석불을 바라다본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미소를 찾아낸다.



부처님 앞에 마음 한 자락 내려놓고

삼배를 하고 난 후, 고개를 든다. 한 낮의 햇볕을 받은 석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은 이 사바세계에서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악몽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한다.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아야 하는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전한다. 지장보살은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석가모니에게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악한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 지장보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 역시 이곳에서 서원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기운이 자라는 데 까지, 내 나라에 있는 문화재를 돌아보다가 명을 걷을 수 있기를. 그것이 10월 7일 팔공산 기슭 옛 고찰 북지장사에서 나의 서원이다.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띤 지장보살 앞에 내 마음 한 자락을 내려놓는다. 그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향교나 서원은 예전 교육기관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을 가급적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내어 깊숙이 자리한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보았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향교나 서원은 꼭 문을 닫아 놓는 것일까? 그것도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한다. 또 어느 지역을 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개의 향교와 서원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꽁꽁 닫혀있는 향교, 연락처 하나 없어

출장을 가는 길에 문화재 한 점이라도 조사를 할 양으로, 일부러 금산으로 길을 잡았다. 대둔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이치재를 넘어서 바로 진산면이 된다.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355번지에 진산향교가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역시나’ 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이렇게 굳게 잠가놓을 것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남겨주던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일부러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까지 찾아들어 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여기 관리자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어디 연락을 할 수도 없다. 향교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러나 외형만 찍는 사진, 답답하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51년에 복원한 진산향교

현재 충남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진산향교는, 원래는 조선조 초기에 현 진산중학교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영조 51년인 17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6, 25 한국전쟁 째 훼손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보수하였다.



진산향교는 외삼문, 내삼문, 전교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그 뒤편에 마련한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진산향교는 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향교를 바라보면 맨 아래 쪽에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진산향교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명륜당 때문이다. 누각 형태로 지은 명륜당은 딴 곳의 전각과는 다르다. 비탈진 곳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어떻게 깔았는지 볼 수가 없지만, 누각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누마루의 형태로만 되어있는 듯하다. 누각은 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하였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정면과 후면을 세 칸의 판문을 달아냈다. 좌우에는 한 칸의 문을 내었으며, 양편으로는 풍판을 달아냈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진산향교. 밖에서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담장 밖에서 명륜당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살펴보고, 느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꽁꽁 닫힌 향교와 서원,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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