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송사는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번지에 소재한 고찰이다. 벽송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절이다. 벽송사가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달려갔는지도 모르겠다. 산 정상 부근에 자리한 벽송사를 오르는 길은 그리 평탄치가 않다. 마침 이 해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길을 잡았으니.

전날 저녁 남원으로 내려가 12월 11일(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요즈음은 일찍 길을 나서지 않으면,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고 해도 몇군데 못 들리기 때문이다. 한때는 빨찌산의 야전병원으로도 이용이 되었다는, 벽송사를 들어가는 입구는 계곡이 아름답다. 내년 여름에는 꼭 한번 들려보고 싶은 곳이다. 가파른 길을 헉헉대고 올라 벽송사에 당도했다.


지금은 옛 영화는 볼 수 없어

벽송사는 조선조 중종 때인 1520년, 벽송 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공부를 한 절로도 유명하다.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는 벽송사에서는, 109분의 대 종장을 배출했다고 한다. 벽송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데, 신라 때의 양식을 계승한 보물 제474호인 3층 석탑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 등이 있다.

벽송사가 어느 정도로 많은 선사들이 이곳에서 도를 이루었는지, ‘벽송사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는 것이다. 벽송사는 조선조 숙종 30년인 1704년에는 환성 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는데, 이 때에 불당, 법당, 선당, 강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의 벽송사는 참으로 한적하다. 그러나 오랜 동안 전해진 전통은 그리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벽송사 경내를 들어가면서 느낀 것은 알 수 없는 기운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옛날 법이 높은 선승들의 기운인가 보다.

삼층석탑과 두 그루의 소나무

벽송사라는 절의 명칭은 벽송스님에 의헤 창건이 되었기 때무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벽송사를 답사하고 난 뒤 느낀 점은, 이곳의 소나무를 보고난 뒤 지엄스님이 호를 벽송이라고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만큼 벽송사 주변에는 노송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현 벽송사의 맨 위에 자리하고 있는 삼층석탑. 보물 제474호인 이 삼층석탑은 신라 때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조성시기는 벽송사가 창건한, 조선조 초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이 삼층석탑은 당시에 조성된 석탑으로서는 단연 백미라고 볼 수 있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은 아래층 가운데돌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얕게 조각하였다. 몸돌에는 층마다 우주와 탱주를 새겼으며, 지붕돌은 날렵하게 위로 솟아, 금방이라도 청왕봉의 정상을 행해 줄달음을 칠 듯하다. 지리산의 천왕봉이 지척에 보이는 곳에 벽송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탑의 맨 위에는 머리장식으로 조성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석탑의 일부분이 조금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그런대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탑이다.

미인송과 도인송

탑을 돌아보다가 보면, 근처에 년륜이 들어보이는 소나무들이 있다. 그 중 미인송과 도인송이 있다는 것이다. 미인송은 나무가 굽어 받침대로 받쳐놓았고, 도인송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뻗어 있다. 그냥 보아도 범상치가 않다. 그 중 도인송은 밑 둘레가 2m가 넘을 듯하며, 줄기의 길이가 20m는 족히 될만하다. 줄기에는 가지 하나없이 곧바로 위로 올라간 나무 끝에, 마치 버섯처럼 잎이 달려있다.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미인송에 기원을 하면 그 사람은 미인이 된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벽송사 경내를 한 바퀴 돈 후에는 그 말도 믿고싶다. 그만큼 벽송사는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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