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수원을 자랑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바로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이다. 그리고 수원을 여행할 때 어디가 좋은가를 물으면 광교호수공원이나 화장실 문화공원인 해우재, 또는 물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만석공원이나 일월저수자, 낙조가 유명한 서호저수지 등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수원에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곳이라고 해도 이 가을에 뚜벅이 걸음으로 걸을 만 한 곳이 있다. 바로 팔색(八色)길이다. 팔색길은 여덟 가지로 구분했는데 그 첫째는 모수길이다. 1색 모수길은 수원시민과 함께하는 도심 속의 길이다. 수원천을 따라 거니는 모수길은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2지게길은 광교저수지 수변길로, 아름다운 풍광을 관람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3매실길은 자연하천과 숲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생태길이며, 4여우길은 광교저수지와 원천저수지(광교 호수공원)를 연결하는 녹음이 짙은 숲길이다. 5도란길은 영통 신시가지 메타세콰이어길을 연결한 녹음이 우거진 가로수길을 말한다.

 

6수원둘레길은 수원시와 인접한 타 지역과 경계가 되는 길로 녹음이 짙은 길이며, 7효행길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인 현릉원을 참배할 때 왕래하던 길을 말한다. 끝으로 8화성성곽길은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역사와 사색의 길이다.

 

 

이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여우길

 

28일 오후, 수원 봉녕사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난 숲길로 접어든다. 여우길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마치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 든다. 혼자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은 이 길은, 가끔은 혼자이기 때문에 주변을 돌아보아야 할 때도 있다. 혼자 걸으면서 , 여우라도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숲이 울창한 길이다. 이 길은 광교공원에서 광교저수지를 잇는 5.5km의 길을 말한다.

 

가끔 바람이 서늘할 때면 이 길을 혼자 걷고는 한다. 이 길이 좋은 것은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숲길을 걷다보면 쉼터와 화장실, 볼거리가 있어 즐거운 길이다. 여우길은 생태통로를 따라 조성된 길로 정비가 잘되어있고, 숲이 우거져 한 여름에도 걷기 좋은 길이다. 중간에는 공원 등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이 즐겨 걷고는 한다. 봉녕사에서 생태통로를 이용해 여우골 숲길, 원천배수지 등을 지나면 광교호수공원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

 

광교신도시는 개발사업의 주체가 경기도지사, 수원시장, 용인시장, 경기도시공사사장 등이다. 20046월에 지구지정, 200512월 개발계획 수립, 20076월 실시계획 수립, 200711월에 착공하였으며, 201112월에 1차 준공을 마쳤다. 광교신도시에는 광교산을 비롯하여, 광교중앙공원, 광교역사공원, 광교호수공원, 안효공원, 혜령공원, 사색공원, 연암공원, 다산공원 등이 있으며, 수원박물관과 광교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광교신도시 주변을 한 바퀴 도는 생태통로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걷는 명소가 되었다. 그 생태통로를 팔색길 중 4색길인 여우길로 명명했다.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곳 여우길

 

이 생태통로는 사람과 동물이 공존하는 길이다. 이곳에는 모두 10개의 끊어진 구간을 잇는 에코브리지가 있다. 도로 위를 잇는 이 에코브리지에는 숲을 조성해, 동물이나 사람들이 이곳이 끊어진 구간이 아닌 자연스런 숲처럼 마음놓고 즐길 수 있도록 조성했다. 이와 같이 에코브리지와 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는 광교신도시의 녹지율은 전국 신도시 중 최고수치인 41.7%나 된다.

 

10개소의 다리는 저마다 이름이 있다. 반딧불이다리, 나비잠자리다리, 소나무다리, 갈참나무다리, 풍뎅이다리, 여담교, 하늘소다리, 무지개다리, 꽃더미다리, 새터다리 등이다. 다리마다 이름이 다르듯 그 분위기도 다르다. 그래서 이 길을 많은 사람들이 즐겨 걷는다. 봉녕사에서 나비잠자리다리를 지나가는 길이 바로 여우길이다.

 

이곳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에코브리지와 자연적으로 조성되어 있던 숲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광교공원에서 출발을 해 다시 광교 공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10km를 조금 넘는다. 그 길에는 두 곳의 저수지를 연결하는 광교호수공원과 10곳의 에코브리지가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광교저수지의 목책길과 수변길, 그리고 광교산으로 연결이 되는 아름다운 길이다.

 

 

시인들의 시를 즐길 수 있는 길도 있어

 

이 길에 시인들의 시 숲길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만치 않다. 왜냐하면 이 생태통로에는 워낙 소로가 여기저기 나 있고. 그 시 숲길은 한편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생태통로를 이어서 걷는 사람들은 이 시 숲길로 들어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런 좋은 길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나 역시 이 생태통로를 몇 번이고 걸었지만 이런 시 숲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저 흙을 밟으면서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길, 그 곳에는 조지훈을 비롯하여 김현승, 서정주, 박목월, 김영랑, 김소월 등의 대표적인 시를 만날 수 있다. 욕심 같아서는 지금 수원의 시인들의 시도 쉴 수 있는 공간에 마련해 이곳이 정말 시 동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을 초입에 걷는 팔색길 중 4색길인 여우길. 꼭 여우길이 아니라도 좋다. 수원의 팔색길을 돌아보면서 이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수원의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 때 이 길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니 골이 지끈거린다. 요즈음 연말이라고 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보니 몸살이라도 오는 것일까? 오전에 약속이 되어있는 일정을 오후로 미루어 놓고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가 이렇게 맑지가 않으면 도통 글을 쓸 수가 없다.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보니 앞에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2015년 달력이다. 이 달력은 지동 벽화골목 총괄작가이자 제일교회 종탑에 자리한 노을빛 갤러리이 관장인 유순혜 작가이 손 그림 달력이다. 달마다 작은 달력 안에 화려하게 그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세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달력 안 사람들이 모두 한 마디씩 하는 것만 같다.

 

 

2014년 난 과연 부지런히 살아왔는가?

 

달력을 한 장씩 넘겨본다. 달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벌써 2014년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벌써 1215일이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꺼내들었던 기자수첩을 꺼내본다. 두 권이나 되는 수첩에 글자들이 빼곡하니 차 있다.

 

수첩을 넘기면서 올 한 해 만난 사람들과 일들을 기억해 본다. 참 많은 곳을 다녀왔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11일부터 어제까지 e수원뉴스에 송고를 한 기사가 450개나 된다. 하루에 1.3개꼴로 기사를 쓴 것이다. 거의 기사를 쓰지 않고 넘어간 날이 없다. 그렇게 많은 기사를 써 가면서 만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아마도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따져본다면 수천 명이 넘을 것만 같다. 사람은 많은 사람들과 많으 일들을 겪으면서 세상을 산다고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과연 2014년 한 해 동안 나는 잘 살기는 한 것일까? 혹 나로 인해 누군가가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부지런히 산다고 해서 세상을 잘 살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한 해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것이 참 단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세상의 일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 문제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또 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먹으면 시간이 지나는 것이 같다고 했던가? 생각해보면 그 말이 딱 맞는 듯하다.

 

10대 때 처음으로 작곡이라는 것을 해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곡가가 되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많은 노력을 했고 나름대로 이름께나 알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나는 세상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그런 젊은 시절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기자라는 명함을 남들에게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뒤틀어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한 따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한다는 것이 올해 첫날 가졌던 생각이다. 하지만 과연 난 그렇게 최선을 다한 한 해를 살았을까?

 

이제 보름 남짓 남은 2014. 15일 동안 과연 올 한 해 내가 정한 일들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지끈거리던 마리가 가시는 듯하다. 오늘 약속을 한 곳을 찾아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231, 올 한 해 내가 꼭 이루고 싶었던 일을 이루는 해로 기억하고 싶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항상 서로를 생각하는 친구 두 사람만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삶이라고 합니다. 늘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래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죠. 엊그제인가 강원도 고성에 거주하시는 지인 한 분이 수원으로 오셨습니다.

 

지인이 거주하는 곳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 인근인데, 이번에 눈이 2m나 내린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의 20일 간이나 외부와 소통을 하지 못한 체 전화로만 안부를 묻고는 하다가, 이번에 20여 일만에 포클레인으로 길을 내고 단숨에 수원으로 달려왔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만으로도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시간을 따질 필요없어

 

사진을 찍어서 갖고 온 것을 보면 정말 쌓여있는 눈이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몇 년 전인가, 저도 속초에서 한 3년 정도를 산 적이 있습니다. 그 해도 2월에 눈이 내렸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1m가 넘는 눈이 쌓여, 아침에 난리를 피운 적이 있습니다. 그 뒤 며칠 후에 수원에 일을 보러 나왔더니 20cm인가, 눈이 왔는데 교통대란이 일었다고 합니다.

 

많은 눈을 보다가 보니 별로 쌓인 것도 아닌 눈에도, 사는 환경에 따라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 영동지역 사람들은 그 정도 눈은 눈 취급도 하지 않는데 말이죠. 고성에 사는 지인은 수원으로 오다가 여주에 사는 동생과 동행을 했습니다. 늘 보고 싶은 사람들이죠. 그리고 만나면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자들만의 모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닭골목에 있는 집에서 만나 통닭 한 마리 시켜놓고 그저 술잔만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웃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남들이 들으면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수원에 사는 동생까지 합세를 했습니다. 제가 늘 좋아하는 사람들 중 반은 모인 셈이죠. 그때부터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하면서 또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합니다. 수원의 아우네 집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냅니다. 딱히 모여야 할 이유도 없지만, 이렇게 한 번 모여서 술잔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곁에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

 

사람들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합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죠. 이 날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비슷한 아픔을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아픔의 종류도 다르고 강도도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고 나면, 더욱 곁에 머무는 사람들이 소중해집니다. 그 소중함을 오래 간직한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먼 길을 눈을 헤치고 달려 온 지인. 불과 하루 저녁을 함께 보내고 또 황망히 길을 떠났습니다. 고작 아침 한 그릇을 함께 나누고요.

 

 

하지만 그 하루가 남들의 몇 날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바로 마음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몇 사람만 있다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단순히 사회에서 아는 사람, 혹은 직장의 동료나 친구.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내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침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고성에 사는 지인이 보내 준 눈 사진이 있습니다. 그 험한 눈길을 큰돈을 들여 포클레인으로 눈을 헤치고 달려온 길. 그리고 하루 만에 다시 돌아간 길. 그런 길을 함께 동행 할 사람이 곁에 있어 행복한 날입니다.

 

얼핏 보면 복잡한 탑이다라고 생각이 든다. 탑 하나에 많은 조각을 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이 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 오래 전에 장비도 부족한데, 이렇게 자세하게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돌에다가 이렇게 훌륭한 조각을 하다니, 그저 놀랍다라고 할 밖에.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천년고찰 갑사. 그 경내에는 특이한 승탑 한기가 서 있다. 보물 제2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공주 갑사 승탑(公州 甲寺 僧塔)’. 이 탑은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모습이며, 3단의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놀랍다.

 

106일과 7일의 답사는 꽤 빡빡한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근 한 달간이나 생태교통 수원2013’으로 인해 답사를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바삐 돌아보는 일정으로 인해 피곤하기도 하고 발도 아팠지만, 문화재를 만난다는 기쁨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힘든 답사일정도 즐거움이었다.

 

갑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한 후,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인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아도화상은 탑 아래 배례석에서 참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그 후 위덕왕 3년인 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했다. 의상대사는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갑사는 수차례 찾아간 곳이다. 많은 문화재도 있지만, 갑사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좋아서이기도 하다. 그 옆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신선이라도 될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찾아본 승탑. 언제 보아도 놀랍기만 하다. 어찌 사람의 손으로 이렇게 조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악비천인상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

 

갑사 승탑은 높직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올렸다. 기단은 상중하 받침돌로 나뉘며, 특이하게도 아래층이 넓고 위층으로 갈수록 차츰 줄어든다. 하층기단에는 사자와 구름, 용을 대담하게 조각하였고, 거의 팔각이 아닌 원에 가까운 가운데기단에는 각 귀퉁이마다 귀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다.

 

그 사이에는 주악비천인상을 새겨 놓았는데, 금시라도 연주소리가 울려 나올 것만 같다. 탑신을 받치는 두툼한 상층기단에는 연꽃을 둘러 새겼다. 탑의 몸돌 4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을 새겨 놓았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붕돌은 기왓골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후에 새로 만든 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올렸다.

 

 

사자 조련사가 맞아?

 

하층 기단에 조각한 사자들을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그 중 한 마리의 사자 앞에 사람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보인다. 아마도 이 탑에 조각한 사자들을 위한 배려인 듯하다. 예전 갑사에 들렸을 때 어느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 사람이 사자들을 먹이느라 저렇게 하루 종일 사자 우리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씀이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갑사 승탑은 전체적으로 조각이 힘차고 웅대하다. 하지만 윗부분으로 갈수록 조각기법이 약해진 것이 흠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조각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전체에 조각된 각종 무늬와 기법 등은 고려시대 승탑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작으로 손꼽힌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갑사 승탑. 또 다시 만날 때는 무엇이 또 보일까? 문화재를 만나면서 늘 하는 기대이기도 하다.

 

자장가에 숨은 힘

 

우리소리의 힘은 어디까지 일까? 그 해답은 예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예전 부모님들의 품안에서 자라난 시대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지금처럼 패륜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시대에 따른 불효야 있었겠지만, 그 불효라는 것이 지금의 패륜과는 차이가 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하게 변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소리를 잃어버린 후다. 어머니의 살가운 정이 느껴지는 자장가를 잊고 난 후 아이들이 변한 것이다.

 

얼마 전인가 며칠 사이에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연이어 접했다. 후배를 시켜 가족들을 죽인 사건. 강남에서 살고 싶어 어머니와 누나를 방화를 죽게 만들고, 본인은 그 시간 딴 곳에 놀라가 있었다는 얄팍한 머리를 쓴 사건이다. 더구나 출타 중이던 아버지를 범인으로 몰아가려고 했다는 이야기에 정말 어의가 없다. 며칠 후 술이 취해 어머니를 괴롭힌다고,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또 발생 해 세상을 경악시켰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왜일까?

 

 

자장가를 잃은 세대, 정이 없어

 

그저 우리 것은 모두 불량품이나 골동품 정도로 알고 있는 사고, 외국의 것이라면 ‘개똥도 보약’이라는 문화적 사대주의가 이 나라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 남이야 잘못 되어도 관계없다는 이기주의적인 발상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물론 가정교육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교육현실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인성을 제외하고 주입식 교육에 치중한 사회가, 이런 불행한 아이들을 양산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느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 우리 전통에 대한 내용은, 고작 몇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할까. 교육이 정체성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우리는 교육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놓고도, 자리배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필요로 할 것인가?

 

‘우리’라는 개념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무조건적인 국제화만 부르짖는 정책. 그리고 제나라 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남의 나라 말부터 가르치는 정책. 이런 것들이 우리 아이들을 황폐화시킨 것이다.

 

 

 

어머니의 자장가에는 모든 교육이 들어있어

 

그 자손이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이 허릴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 금자동아 은이로구나 금이로구나,

만첩청산의 보배동아 순지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귀염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주면 너를사고, 금을준들 너를 사랴

 

회심곡의 한 부분이다. 이런 소리를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재우면서, 또는 등에 업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면서 불러주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자라면서 아이들은 잠재적으로 이 소리를 기억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충신이고 효자로, 동네방네 사랑을 받는 예의가 바른 아이로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리는 잠재적인 기억으로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잠재적인 기억이야말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따스한 정을 느끼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란아이, 나쁘게 될 수 없어

 

소리는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어느 누구는 슬픈 노래를 부르다가 슬프게 되어버렸다. 누구는 무명시절 ‘쨍하고’를 부르더니 그야말로 쨍하고 해가 떠버렸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지도 모르는 말을 떠들어 대면서 연신 건들거리고 사는 아이들이, 과연 온전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오륜가를 들어보소. 부모 없는 자식 없고 임군 없는 신하 없다.

부모 공을 알려거든 제 자식을 길러보고, 군의신충 모르거든 효양부모 옮겨가리.

부모에 효도하는 사람이면 임군에게 충성한다.

존장을 존대하고 친구 간에 신 지켜라. 부부간에 화목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라.

이러고야 사람이지 저마다 사람이냐. 철모르는 짐승의 기특함을 들어보소.

 

오륜가(五倫歌)의 사설 중 일부분이다. 오륜가는 사람이 태어나 살아갈 도리를 알려주는 소리다. 이런 좋은 소리를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난 아이들이 나쁜 일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소리의 힘이다. 알게 모르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 새를 보고 개구리를 보고도 그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바로 어머니의 따스한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다. 어머니의 자장가는 그저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부르는 소리다. 특별한 곡조도 없다. 아이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 소리를 할 뿐이다. 그 소리 안에는 어린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러한 소리를 일어버린 요즈음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황폐화 되어있다. TV에서는 선정, 폭력이 난무하고, 컴퓨터 게임에서는 살인과 폭력이 저질러진다. 이런 것을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이제는 모두 정신을 차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 어머니의 가슴에서 울려지는 살가운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피부로 맞닿는 소리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그 따스함을 온전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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