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동안 작품에 정진한 일월호봉도감탄이 절로

 

불꽃을 다루는 여인, 불꽃같은 여인, 그녀를 지칭하는 말은 불꽃이다. 작품을 창작하면서 늘 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두화는 불에 달군 인두를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요즘도 달구어진 버닝펜을 이용해 작업을 하다보면 조심을 한다고 해도 뜨거운 인두에 데기 일쑤다. 그래서 그녀와 불은 땔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진다.

 

지동 불꽃 인두화를 품다전은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2층 갤러리에서 730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한 달간 전시된다. 작품을 벽에 걸고 있는 인두화 일연 우송연 작가를 만났다.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가 그칠 줄 모른다. 중부지방에도 많은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계속내리는 비로인해 취재를 나가기에도 마땅치가 않다. 25, 비가 내리는 오후에 찾아간 창룡마을 창작센터. 그곳에서 우송연 작가를 만났다.

 

저는 인두화를 시작한 지 6년 정도 되었습니다. 사단법인 한국버닝협회 회장인 김현수 전통명장으로부터 인두화를 사사받고 그동안 작품 활동에 정진해왔죠.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인두화에 대해 색다른 매력을 느낀 것 같아요. 이제는 인두화가 제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죠

 

 

많은 곳에서 재능기부도 열정적으로

 

인두화를 시작하고 나서 우송연 작가는 살아가는 방법이 바뀌었다고 한다. 작가가 작품에 심취하면 성격이 바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송연 작가도 자신이 인두화를 접한 후, 기술을 익혀 많은 사람들에게 인두화 제작을 가르치면서 긍정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졌다고 한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화를 그렸어요. 캘리그라피 강사 자격증도 땄고요. 제가 그림이 그리고 싶었는데 결국 대학에서는 그림전공을 하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나 봐요. 선생님께 인두화를 배우면서 인두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면서 제 원을 풀어버린 것이죠.”

 

우송연 작가는 기업강의와 문화센터 등에서도 인두화에 대해서 소개를 하거나 직접 인두화 작품 강의를 했단다. 대기업 등에서 인두화를 강의하면 상당히 좋아하면서 인두화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우송연 작가는 호매실동에 소재한 수원시장애인복지연합회에서도 지체장애인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손이 떨려 인두화 버닝펜도 못 잡던 장애인들이 작품을 그려내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노인들을 상대로 무료강습회를 열고 싶기도 하고요. 또 어려운 분들을 위한 작업도 하고 싶어요. 제가 인두화를 만나면서 너무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에게도 그런 행복을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삶 살고 싶어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2층 전시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대담에 응한 우송연 작가는 이제는 자신이 가르치는 문하생들이 훌륭히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는 것도 큰 낙이라면서 인두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나무에 안두를 대면 나무마다 다른 타는 냄새가 너무 좋다고 한다. 그 각기 다른 나무의 타는 냄새가 흡사 서로 다른 세상 사람들 이야기 같다는 것이다.

 

처음 인두화를 시작하고 나서 2~3년은 기술습득을 위해 많은 애를 먹었다고 하는 우송연 작가는 저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인두화 제작기술을 알려주고 싶어요. 세상은 사로 소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가장 큰 바람이라면 인두화를 하는 작가들이 활성화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죠.”라고 한다.

 

730일 오후 3, 창룡마을 창작센터에서 지동, 불꽃 인두화를 품다개막을 며칠 앞두고 작품전시를 위해 창작센터를 찾은 우송연 작가. 자신의 작품이 걸린 벽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면서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일월오봉도는 세 달이나 걸려서 완성한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우송연 작가. 앞으로 그녀가 바라는 대로 더 많은 인두화 작가들이 많은 활동을 하고, 인두화로 인해 사로가 소통하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동휘스님의 해피만다라 이야기

 

만다라의 그림을 보면 무엇인가 그 안에 심오한 깨달음이 있는 듯 보인다. 만다라의 뜻은 산스크리트어로 둥근 원을 의미한다. 이 만다라는 진리와 우주를 형상화한 그림을 의미한다. 만다라는 현재 불교미술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사원 등의 벽에 장식하여 장엄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만다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자리한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나무갤러리에서 12월 22일부터 28일까지 열렸다. 12월 27일에 찾아간 나무갤러리 전시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휘스님의 ‘부처님이 주신 선물, 불꽃. 옴 해피만다라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명상 뒤에 오는 공허함으로 시작

 

티베트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색을 물들인 모래로 그린다. 정교하게 모래로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만다라를 그릴 때는 여러 명의 승려들이 참여를 하여, 3박 4일 이상이 걸려 그려낸다고 한다. 만다라는 예술적 감각과 모래로 그리는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마치 명상과 같은 수행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참여하여 만다라를 그리고 있으며, 그 모래그림을 그리는 동안 명상과 함께 심오한 부처의 경지를 느끼게 된다고도 한다. 초기 불교당시의 만다라는 주로 탑에 조각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기본적으로 법당에 만다라를 그려 수행자들에게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공간을 제공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뒤늦게 출가한 동휘스님의 만다라

 

이번에 비구니인 동휘스님이 마련한 ‘행복한 대한민국, 옴 해피만다라 전시회’에는 동휘스님과 티벳, 스리랑카 등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만다라 50여점이 소개되었다. 만다라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우주의 진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로, 동휘스님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만다라 전문화가이다.

 

 

동휘스님은 38세의 나이로 뒤늦게 출가를 했다. 부친이 화가였던 집안 내력 때문인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던 동휘스님은, 1998년 수덕사 견성암으로 뒤늦게 출가한 후, 출가하기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만다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동휘스님은 직접 만다라를 그릴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만다라를 모아 강원도 홍천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하는 불사를 펼치고 있기도 하다.

 

'만다라 성지'는 2008년 가톨릭 수도원이 내놓은 땅 1만여 평에 조성되고 있다. 동휘스님은 "네팔의 스완부와 버드낫은 황량한 땅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해, 국제적 명소로 만들었다. 홍천에 들어설 만다라 성지에는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수집하고 기증받은 2천여 점의 만다라를 전시한다는 것.

 

전 세계의 만다라를 만나보다

 

티베트의 만다라가 색조가 어둡다면 동휘스님의 만다라는 맑게 표현되고 있다. 동휘스님은 그 만다다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하고 밝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전시가 되어있는 만다라는 여러 가지 색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가 없다.

 

하지만 굳이 만다라를 통해 심오한 부처의 경지에 달하는 깨달음을 얻지 많아도 좋을 듯하다. 그 만다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림을 한창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에서 유가 생겨나고,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 즉 ‘마음이 원하는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동휘스님의 만나라이기 때문이다.


남원시 주생면 낙동리 산15-6번지. 좁은 마을 길 도로변 밑에 석불 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정표 하나 서 있지를 않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찾을 수조차 없을 것만 같다. 마침 선원사 최인술 봉사단장이 이곳을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과 함께 찾아와 보았다면서 안내를 하는 바람에 만날 수 있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을, 근래에 받침부가 노출됨으로써 불상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전체 높이는 240cm이며, 입상과 광배가 조ㅘ를 이루고 있다. 언필 보면 떨어진 듯도 하지만, 광배를 다듬고 그 앞에 석불입상을 부조한 것만 같다.


낙동리 석조여래입상의 앞과 뒤

심하게 훼손이 된 안면

숲 속 길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길 가에는 이곳에 문화재가 서 있다는 안내판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호 철책을 친 안으로 서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뒤편에 세운 광배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깨어진 곳도 없다. 그러나 정작 석불의 안면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볼이 두툼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해, 상당히 세심한 조각수법을 보였던 것만 같다. 어깨선이 유려한 것이나 발 밑까지 흘러내린 법의의 옷 주름이 부드러운 U자형으로 퍼진 것 등을 볼 때 상당히 수준 높은 석조여래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외롭게 서 있엇을까?




석조여래입상의 뒤편에 세운 광배는 온전하다. 빛을 묘사한 광배에는 꽃과 불꽃 무늬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광배의 뒷면을 잘 다듬은 것이나, 광배의 조각들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이 수준작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석조여래입상을 찬찬히 훑어본다. 얼굴의 윤곽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균형이 알맞게 표현되었다. 두상의 크기와 알맞게 조형된 귀, 그리고 둥글게 형태를 지닌 얼굴.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가까이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손은 다 마멸이 되어 보이지가 않는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이고, 법의를 걸친 어깨선은 부드럽게 표현이 되었다. 법의의 주름은 넓게 퍼져 있으며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발목 부분부터는 주름을 잡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이라면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같은 수준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심하게 마멸이 되어 알아볼 수 없는 안면, 잘려나간 손 등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숲 속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남원 덕동리 석조여래입상. 아마 이 곳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벌써 천년 세월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 인근에 절터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지난날과, 분간이 안되는 모습을 보면서 괜한 한숨만 토해낸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바로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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