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란 정신적인 밑바탕에 기인한 그림입니다. 제목에서 말해주 듯, 둥글다는 것은 부처님의 원만구족한 덕을 말하는 것이고, 밝은 빛이란 부처님의 밝은 마음을 뜻하는 것이죠.”

 

10월 5일 오전, 수원시 우만동 248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봉녕사 도서관 1층에는, 10월 3일부터 6일까지 동성스님의 선화 초대전이, ‘둥글고 밝은 빛’이란 제목으로 열리고 있었다.

 

 

 

동성스님은 1964년에 통도사로 입신득도를 한 후, 1972년 조계종 중앙교육원과 1973년 범어사 불교전문 강원에서 공부를 하셨다. 1984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를 마쳤으며, 1996년에는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학위를 받고, 2012년에는 몽골불교대학교 명예불교 철학박사로 학위기를 받았다.

 

그동안 선화를 갖고 세계 주요도심 기획전에 초대작가로 10여회 초청을 받았으며, 국내에서도 6회의 기획전에 초대되었다. 교토, 시안. 뉴욕 등에서 개인초대전을 15회 정도 가졌으며, 2006년에는 시안 따시산스 ‘세계평화기원 사문동성 달마화비’를 세우기도 했다. 내년에는 인도 델리대학교와 뭄바이대학교에 개인초대전이 예약이 되어있다.

 

 

실제를 전제로 하여 그리는 동성스님의 선화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동성스님의 달마도와 선화세계’라는 평에서

 

‘동성스님의 선화는 일단 그림으로서의 조형적인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 따라서 즉흥적인 흥취에 의탁하거나 무심히 붓을 놀리는 식의 기분에 취한 그림이 아니다. 어쩌면 그림 이전에 글씨로써 먼저 붓을 다루는데 익숙해 있었기에 운필에는 이미 일정한 격식이 갖추어져 있다. 한 마디로 튼튼한 뼈대가 박힌 필선을 구사하고 있다’고 하였다.

 

전시장에 그려진 그림들은 달마와 천진불, 미소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달마는 깨달음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죠. 천진불은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본래자리를 말하는 것이죠. 청정한 성품 그대로인 순수한 마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미소동자는 무관심의 희열을 뜻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관심은 오히려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벗어나 무관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죠.”

 

종교는 예술이어야 한다

 

현재 한국선미술인회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 동성스님은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 79-3 봉국사에 주석하고 계시다. 전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어 관람을 하러 들어온다. 들어오는 사람마다 일일이 반갑게 맞이하시는 동성스님께 선화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선화란 일체중생의 고른 정신문화입니다. 선화는 화두와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종교란 곧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예술입니다. 수많은 불교문화가 그러하듯, 선화 역시 그 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봉녕사 주지 자연스님은 초대 인사말에서

 

“선화란 달을 가르치는 손가락처럼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산란하고 분주한 마음을 다스려 고요한 마음을 이루고 참 나를 찾도록 하는 수행자의 그림이다. 동성스님의 선화는 깨달음의 자유, 청정성의 봉연, 무관심의 희열로써 사람과 생명의 빛나는 장엄을 이루고, 그 어디에도 염오되지 않는 연꽃 속에 담겨져 있는 세상을 지향한다.” 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동성스님의 모습에서는 때로는 달마스님이, 때로는 천진불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림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 자락 깊이 숨어있는 근심을 놓아버린다. 아마도 동성스님의 선화에서 내뿜는 선한 기운 때문은 아닌지. 그림 한 점으로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성스님의 선화. 그 옆에 서서 하루해를 보내고 싶다.

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