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전하는 물레방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에 보인다. 당시 세검정에 구릉성 산지에서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었음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물레방아하면, 20세기가 시작될 때 서울에서 태어나 25살 이라는 피지도 못한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요절한 불우한 작가 나도향이 먼저 떠오른다.

 

나도향의 물레방아는 방원의 아내가 신치규와 물레방아 깐에서 정분을 통하고, 결국은 남편인 방원에게 물레방아 깐에서 살해를 당한다는 줄거리이지만, 당시의 물레방아는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레방아 마을이 있어

 

이러한 물레방아는 가물어 물이 모자라게 되면 방아를 찧을 수 없게 되자, 1920년대부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대신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아가 보급이 되면서, 자연 추억속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물의 힘을 이용한 물레방아가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일반적으로 물레방아 하면 물의 힘을 이용한 디딜방아 형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와는 달리 거대한 동력구조의 방아가 오로지 물만 갖고 돌렸다는 것이다.

 

진안군 백운면 운교리에 있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6호 백운면 물레방아는 1850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되는 물레방아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진 이 물레방아는 물을 막은 보가 61m에, 보에서 물레방아에 이르는 수로가 252m이다.

 

 

수로의 넓이가 2m나 되는 이 물레방아는 소나무로 제작이 되었으며, 지름이 310cm에 폭이 130cm나 되는 큰 물레방아다. 기존의 물레방아가 ‘ㅡ’자 형을 갖고 있는데 비해, 도정력을 높이기 위해 ‘ㄱ' 자 형으로 특수 제작된 47개의 날개를 갖고 있다. 더욱 이 운교리 물레방아 인근에는 11개 정도의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 물레방아 집단지였던 것 같다.

 

민속문화재로 지정

 

큰길가에 안내판 하나가 없어, 몇 번이나 길을 물어 찾아간 백운면 물레방아, 최근까지도 사용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말라버린 잡초만 무성하다. 물레방아의 문이 열려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아의 형태가 지금껏 보아오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크기도 그렇거니와 물레방아 깐의 구조가 상당하다. 세 칸으로 나뉘어져 있는 물레방아는 풍구와 도정기, 그리고 기계를 돌리기 위한 바퀴들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고, 낡은 피댓줄들이 이 물레방아를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풍구 옆 기둥에는 1995년 3월 27일 진안군수가 발행한 양곡가공업 등록증이 붙어있고, 그 밑에는 정미소 주인이 적어 붙인 도정효율표가 있다. 효율표에는 백미 80kg 한 가마에 4kg을 현물로 받으며, 운반료는 별도로 받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 물레방아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다고 한다.

 

 

물레방아 한편에는 곡식을 쌓아두었던 곳인 듯 너른 공간이 있다. 그곳을 보면서 갑자기 나도향의 물레방아가 떠 오른다. 저런 곳에서 신치규와 방원의 처가 밀담을 나눈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물레방아의 밑은 물이 빠져 나가는 물길인데, 아직도 물의 고여 있다. 한때는 부의 상징이었던 물레방아. 이제는 먼지만 쌓여가고, 물이 마른 물길은 옛 영화가 그리운 듯 마른 잡초만 가득하다.

개울가에 자리를 잡은 정자 하나.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지붕을 보니 돌을 편을 떠 만든 너와지붕이다. 정자를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너와지붕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나무가 아닌 점판암 판돌을 이용한 너와지붕 정자는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그 돌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 작은 정자 안에 기둥이 더 촘촘히 서 있어, 오히려 그런 점이 이 정자의 멋을 더한다.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영모정은 그렇게 한가한 모습이었다.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모정은 전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6년인 1869년에 세워졌다. 그 뒤 몇 차례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누정의 남쪽내부 중앙에는 永慕亭과는 달리 '永碧樓'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 정자의 아름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량문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었으며, 『진안군지』에 영모정기가 게재되어 있다.

 

 

귀부를 주추로 산은 영모정

 

영모정 아래로 내려가다가 보니 정자의 아랫부분 네 기둥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원형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물가에 있기 때문에도 그리했겠지만,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이 아니겠는가? 개울가로 향한 정자 정면에 있는 4개의 평주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건립된 까닭에 다른 것 보다 1m정도 더 내려와 있다.

 

개울을 건너 영모정을 바라다본다. 개울 물속에 또 하나의 영모정이 드리워져 있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영모정은 주변 경관과 어울러져 더욱 아름답다. 이런 절경 속에서 정자에 올라 그 아름다움에 취해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 그래서 신의현의 효행을 본받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녹음이 짙게 드리워지면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아마 지금보다 더 멋진 영모정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차가운 바람에 개울물에 빠지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아주 가끔은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영모정을 찾았을 때도 참으로 민망한 꼴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보는 이들도 없는데도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한 겨울이었다고 한다면, 다시는 답사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것이다.

 

영모정을 촬영하다가 보니, 괜한 욕심이 난다. 바로 내를 건너가서 물과 함께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을 낸 것이다. 가을이라면 개울물에 아름답게 단풍이 함께 느리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삭막한 가지에 잎도 없는 모습을 찍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건널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물이 조금 흐르고 있는 방둑처럼 생긴 위로 조심스럽게 건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런 곳엔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긴장이 되었나보다. 그만 발이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것도 물속으로. 그 중에도 카메라가 젖었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니. 참 답사는 가끔 사람을 이렇게 이상하게 만드는가 보다.

 

영모정을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만 같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며, 귀부처럼 생긴 주춧돌이며, 또 돌로 뜬 너와지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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