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의 여파는 대단했다. 모든 국민들 대다수는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로 참사자들에게 고개를 숙였으며, 나들이 등도 삼간 체 근신을 하고 지냈다. 이렇게 국민들이 자숙하고 있는 동안에도, 얽히고설킨 비리들이 매일 방송과 자면의 톱을 장식하고는 했다.

 

벌써 25일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차가운 바다 속에는 29명이라는 생명들이 생사도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들이 그들의 아픈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주말이면 몰려오던 관광객들의 발길이 뚝 끊겼어요. 4월은 너무 힘들었어요. 십 수 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이렇게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진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관광특구인 강원도 속초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의 말이다.

 

 

예약이 되어있던 사람들이 모두 예약취소를 해버렸어요. 그 많던 손님들이 예약취소를 한 후 매일 텅 빈 가게를 지키고는 했어요. 이번 초파일 연휴가 지나면서 조금 손님들이 찾아들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음식을 준비한 것이 모두 내다버렸고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녜요. 하지만 그것보다 이렇게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가 먼저 치밀어요.” 수원 영통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의 말이다.

 

모처럼 활력이 넘치는 거리

 

이렇게 침체되어버린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다. 그저 윗사람들은 자신들은 죄가 없음을 밝히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이, 국민들은 앞을 다투어 분향소를 찾았고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라가 지쳐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너나할 것 없이 살아갈 길을 택한 것이다.

 

지난 6일 부처님 오신 날의 연휴를 맞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 분위기는, 11일 예전과 마찬가지로 되살아 난 느낌이다. 휴일을 맞아 팔달문 앞 시장거리로 나가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을 찾아 북적인다. 지동시장 순대타운도 빈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들이찼다. 장날 만두 앞에도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 모습을 보네요. 그동안 손님이 없어도 아이들 생각에 참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이제 숨통이 좀 트이네요.” 지동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이아무개씨의 말이다.

 

끈기 있는 한국 사람들. 하지만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한국인들은 언제나 그랬다. 남들이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면서 위로를 하고는 한다. 그것이 우리 역사 속에서 배어난 습속이다. 생활 속에서 언제나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해 온 사람들은, 남이 어려울 때마다 발 벗고 나선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아픔을 당한 듯 함께 아파하고 서로 어루만지며 살아왔다.

 

안산에서 진도까지 유가족들을 실어 나른 택시기사들. 생업의 현장을 버리고 진도로 내려가 자원봉사를 하면서 유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진 자원봉사자들. 그 찬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내려고 하다가 비명횡사를 한 잠수부. 모두 우리 국민들이다. 헌데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회피를 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모처럼 살아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깊은 숨을 내쉰다. 저력이 있는 한국인들의 끈기 있는 모습이 고맙기 때문이다.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하지만 그 미안함과 아픔으로 인해 나라를 침체 속에 빠트린다면, 그 많은 희생자들에게 더욱 죄스런 일이다. 이 살아난 분위기가 앞으로 더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광교저수지에는 지난 해 조성한 목책 길이 있다. 이 길은 1.9km 정도로 벚꽃이 필 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꽃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이 목책 길은 광교산 산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기도 하다. 산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목책 길을 걸어 다리를 건너 후 광교저수지 수변 길을 즐겨 걷고는 한다.

 

이 길은 이제 수원의 명소 중 한 곳이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걷기도 하고, 연인끼리 다정하게 걷기도 한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로 잠시 중단되었지만, 주말이면 이곳에서 거리로 나온 공연을 즐길 수도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 목책 길은 많은 사람들이 걷다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세월호의 아픔이 주렁주렁

 

이 목책 길 1.9Km 중에 1.5Km 정도에 종이에 쓴 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바로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한 사람들의 글이다. 25일 오후, 목책 길 중 저수지를 낀 방향으로 길에 붙은 종이들이 바람에 날린다. 그 날림은 마치 채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젊음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사람들은 중간 중간에 노란 색 가는 천을 빼서 리본을 만들고 간다.

 

엄마가 속상해 꼭 돌아와

울지 마 아가 엄마가 기다려

어른으로 정말 미안하다. 힘내자! 사랑한다.’

얼마나 무섭니 희망을 버리지 마

많이 힘들지. 조금만 기다려 줄래? 꼭 다시보자 - 기적을 믿으며

얘들아 포기하지 마 가족들이란 따듯한 밥 먹어야지

울고 울고 또 울고 기다려 기다려 구해줄게 - 선생님이

 

 

한 장 한 장 읽어가면서 눈물이 흐른다. 모든 국민들의 마음은 한결 같은 것이다. 그 아이들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오기 때문이다. 찬 바다 속에서 얼마나 춥고 공포에 떨었을까?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적어 놓은 글귀들이다.

 

광교저수지 목책 길에 걸린 이 서원지는 기적의 편지 - 수원시민의 기도이다. 글을 읽다가보니 그렇게 눈물이 흐를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 어린 생명들이 이렇게 무참하게 사그라져야 한단 말인가?

 

 

구구절절이 눈물 맺힌 사연

 

우리나라 미래의 희망. 미안하다. 구해내지 못해서

언니 오빠들 사랑해요. 힘내세요(민서)’

사랑한다. 얘들아 아프지 말고 더 좋은 세상에 태어 나거라. 그리고 행복하길

 

수천 장의 종이에 적힌 수원시민의 기도.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그 수많은 간절함도 외면해 버린 것일까?

 

정말 대한민국의 어른이라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희도 자식들을 키우고 있지만,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그 아이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요. 무엇이라고 변명을 할 수 있겠어요. 그저 이렇게 속 타는 마음을 종이에 적어 걸어놓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사죄를 하고 싶은 것이죠.”

 

 

노랑색 리본을 매달고 있던 정수영(, 44)씨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린 것만 같다. 함께 산행을 왔다가 이 노랑리본과 서원지를 보고, 집에 가서도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신아무개(, 44)씨는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요? 그 시간이 짧거나 길거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나라가 도대체 이런 재난에 누구하나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정말 제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이번처럼 부끄러운 적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광교저수지 목책 길에 나붙은 수원시민의 기도와 노란리본. 그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이들은 그 차가운 바다 속에서 몸이 식어갔다. “미안하다 얘들아. 정말 미안하다.” 노란리본 하나를 묶으면서 속으로 눈물을 흘려보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들. 하지만 이 목책 길에 걸린 수많은 수원시민의 기도는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동안 정말 그런지 몰랐다. 아니 몰랐다기보다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매일 발을 씻으면서도, 이것은 당연히 내발이려니 하고 살았다. 당연히 내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니 내 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오늘 왜 ‘발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달 타령이라면 혹 몰라도.

아마 나처럼 발을 혹사시킨 인간도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만 같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이 발은 위로 자그마치 작지 않은 키에, 몸무게도 만만치 않은 몸을 싣고 팔도를 돌아다녔다. 그 발은 한 번도 나에게 불평을 한 적도 없다. 때로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아직도 나를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양말을 신었을 때는 정말 볼랐다.

알고 보니 무지하게 혹사를 시켰네.

누구에게 발을 보여 줄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일도 없다. 그저 답사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오면 찬물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피로를 조금은 풀기 위해 오래도록 주무른다. 그리고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길을 나선다. 하루에 10km를 걸었다고 쳐도, 그 동안 걸었던 길은 모두 24,000km 정도라는 거리를 걸은 셈이다.

이 계산은 이렇다. 답사를 나가면 기본적으로 하루에 걷는 거리가 10km 정도이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걸을 수도 있고, 덜 걸을 수도 있다. 평균 잡아 한 달이면 10일 정도 답사를 한다. 그러면 한 달에 100km를 걷게 되고, 일 년이면 1,200km를 걸은 폭이다.

20년을 답사를 했으니 24,000km 정도를 걸은 셈이다. 서울서 부산은 400km로 잡을 때 편도 60번, 왕복 30번을 걸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으면서도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었다. 이런 발에게 한 번도 미안한 감을 표현하지도 않았고, 감사를 한 적도 없다.

더운 물에 담구고 주무르면서 보니, 정말 발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다. 붓고 굳은 살 박히고, 찢어진 것이

통증 때문에 바라본 발

갑자기 발에 통증이 온다. 양말을 씻기 전에는 벗지 않는 사람인지라, 늘 맨발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발에 통증이 오는 바람에 우연히 양말을 벗었다. 따듯한 물에 발을 담구고 주무르기라도 할 셈으로. 그런데 발을 보다가 놀랐다. 내 발이 정말 형편없이 생겼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발톱은 그동안 산을 타면서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면서, 몇 번인가 빠지고 새로 돋았다. 그런 발톱이 제대로 생겼을 리가 없다. 주로 걸어서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동안 발을 혹사시킨 정도가 아니라, 고문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통증이 오는 곳을 살펴보니 발 뒤꿈치다. 그것에 굳은살이 박여 터지고 피가 난다.

그래서 그렇게 심한 통증은 왔나보다. 그런데 그 발을 보면서 참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발을 보기가 미안스럽다. 아직 한 번도 발에 대해서 고마워 해 본적도 없다. 그리고 발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적도 없다. 그런데 양말을 벗고 들여다본 발은 충격 그 자체였다.

터지고 깨어지면서도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발. 그 소중함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아파서 깨우친 것이다. 아마도 나를 깨우치기 위해 아픈 것은 아니었을까? 앞으로도 얼마를 더 걸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이 발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일까? 발을 보면서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발에게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적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나쁜 발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아서.

“발아 정말 미안하다. 그 동안 너무 혹사를 시켰나보다. 이젠 좀 쉬게 해주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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