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송광사를 찾아 가다가 보면, 26번 도로에 명덕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하여 명덕교를 지나면서 보면, 산에 굴을 파고 지은 듯 한 전각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인법당이 있는데, 이 절은 대한불교 조계종 김제 금산사의 말사인 단암사라는 절이다.

 

700년 전에 세운 인법당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688번지에 해당하는 단암사.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어 주변 경관이 그럴 듯하다. 이 단암사는 고려 말에 서암이 창건을 하였다고 하니, 벌써 700년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단암사에도, 전북 지역의 모든 사찰을 중건하였다는 일옥 진묵스님이 주석했다고 한다.

 

단암사는 '다남사(多男寺)'라고 했었다는데, 언제 단암사로 고쳐 불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말 그대로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잘 낳았는가 보다.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법당 뒤, 새로 조성한 미륵전 뒤편 바위 굴 안에 미륵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미륵이라고 하지만, 그 형태는 미륵인가는 분명치가 않다.

 

미륵굴 안에 조성한 미륵입상. 7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철재 계단을 조성해 놓앗다. 예전에는 이 계단이 가파라 줄을 잡고 오르내렸다.

 

지금은 굴 앞으로 새롭게 미륵전을 조성하고 뒤편을 유리로 막아놓았다. 적멸보궁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는데, 뒤편 바위 위에 조성한 미륵은 색을 입혀 놓았다. 지금은 미륵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조성했지만, 예전에는 가파른 바위계단을 줄을 잡고 올라 다닌 흔적이 보인다.

       

많은 전설이 전하는 미륵굴

 

이 단암사 뒤편 미륵전은 깊지 않은 굴처럼 조성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굴에는 전설이 전한다. 예전 이 굴에서는 절의 식구들이 먹을 만큼 쌀이 나왔다. 절에 사람이 많으면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양이 나오고, 식구가 줄면 그 숫자만큼 먹을 수 있도록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절에서 일을 하는 공양주가 욕심이, 나서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굴을 찔러댔더니 쌀이 안 나오고 피가 흘렀다는 것이다.

 

그 뒤 굴 속에서 나오던 쌀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이 단암사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말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버리는 것이었다. 왜병의 장수가 이상히 여겨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굴 안에는 서연이 가득하고 미륵불이 현신해 있었다는 것이다. 왜장과 병사들은 하루 동안 그 곳에서 정성을 드리고 나서야 말이 움직였다고 한다.

 

전설이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들을 많이 낳는다는 '다남사'라고 불렀던 점이나, 이곳에서 쌀이 나왔나는 전설 등은 모두 이 절이 영험한 도량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한창 불사를 하고 있는 단암사. 그런데 그 불사를 보는 순간,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미륵전은 굴 앞쪽에 새롭게 조성하였다. 흡사 인법당 지붕 위에 지은 듯하다.

 

새롭게 조성하는 불사로 인해 유명해질까?

 

지난 4월 30일, 송광사를 둘러보고 나오다가 절벽 안에 있는 미륵전을 보고 단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밖에서 볼 때는 한창 불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막상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기가 막힌다. 새롭게 조성하고 있는 전각은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니다. 커다란 트레일러 적재함 외벽을 방수목으로 둘러 목재집인 듯 보였던 것이다.

 

미륵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주지스님인 대명스님이 나오신다. 일을 하는 목수들과 다를 바가 없다. 허리에는 연장 띠를 두르고, 허름한 옷을 입고 불사에 동참을 하고 계시다. 아니, 동참 정도가 아니라 직접 목수 일을 하신다. 트레일러 밑에는 커다란 바퀴들이 그냥 달려있는 대로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안과 밖을 목재로 마감을 하고 계시다.

 

"이 건물을 전시실로도 사용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모임도 가지려고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되었나요?"

"어쩌다보니까. 하하. 이거 유명해질 것 같아요?"

 

목재로 조성하고 있는 전시실

가까이 가서보니 트레일러다. 바퀴도 그냥 달려있는데, 단암사의 새로운 전각으로 바뀌고 있다.

 

조성이 다 끝나면 어떻게 변해있을까?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트레일러 전각이니, 생긴 그대로 유명해질 것 같다. 큰 돈 안들이고 전시장과 방, 그리고 창고까지 해결이 되었다고 호탕하게 웃으시는 대명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란 참 별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불사를 마치는 날은 필히 다시 한 번 찾아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린다. 아마 단암사는 전설과 함께, 색다른 모습으로도 유명해지지 않을까?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55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이 불상은 이동면 천리 75번지 적동저수지 입구 저수지 하단 제방 좌측 안쪽에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좌측으로 옮겨 정측 1칸의 전각을 짓고 안치 했었다. 후에 용덕사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수가 좋은 절 용덕사

 

용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인시 이동면의 성륜산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용인에서 45번 도로를 이용해 이동면에서 318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찾아갈 수가 있다. 용덕사 뒤편 산언덕으로 오른 곳에 있는 극락전 뒤 바위에, 암굴이 있어 일명 굴암절이라고도 한다.

 

용덕사가 위치한 성륜산은 용인의 남쪽, 안성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은 높은 산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는 높고 깊은 산이다. 절은 이 산의 중턱에 위치하여 맑고 깨끗한 공기와 탁 트인 시원한 풍광, 그리고 맑은 약수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절 안 곳곳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축과 유물들이 있어 유서 깊은 사찰임을 보여준다.

 

절에 전해지는 기록에는 용덕사가 신라 문성왕 때 염거(廉居)화상에 의해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절에 전하는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번창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 아래 이동면 일대의 땅 대부분이, 용덕사에 속해 있었을 정도의 사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입상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육계의 흔적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아있다. 가슴 앞에서 둥글게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文)이 길게 처지면서 하반신에서 양 다리에서 타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흐른다. 도식화된 이러한 형태의 옷주름 표현은 8세기 이후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결은 시무외여원으로 보이나 오른손에는 보주를 쥐고 있다. 수인과 옷주름 등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옷주름이 도식화된 경향을 일부 보이고, 신체는 부피감 없이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이 이채로워

 

용덕사의 석조여래입상은 미륵전 안에 모셔져 있다. 예전 신라시대에는 거밀현의 관아에 모셔졌던 석조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 예천 동본동 석불입상에서 나타나는 장신화 경행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속조여래입상은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까지 끌어올려 만개하지 못한 꽃봉오리를 잡고 있다. 이 불상은 미륵도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왜 관아에 있었을까?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문화재답사는 늘 궁금증이 커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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