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65~1에는 삼국시대에 조성한 삼존불입상이 전하고 있다.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경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보존을 하고 있다는 것. 이 석불들은 선방사 터에 누워져 있던 것을 모아서 세웠는데,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지자체나 문화재청에서만 할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문화재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재들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던지 제대로 보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전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주변에 삼불사라는 절이 들어와 보존을 하고 있다.

 

 

후덕한 상을 보이는 본존불

 

삼존불은 각각 조성이 되었지만, 이곳에 있던 절에서 한 시대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자리하고 있는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나게 표현을 했으며 풍만하다.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 본존불은 수인으로 보아 석가모니불이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후덕한 인상에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협시보살의 표현 놀라워

 

삼존볼 중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소불로 보아 이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의 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이 삼존불은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거기다가 천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당시 신라 석조각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문화재에게 날마다 서원을 하다

 

경주 삼존불입상을 만나면 늘 한 가지 서원을 한다. 바로 이 해가 다 지나고 2014년에는 우리 모두가 아픔을 당하지 않고,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서원을 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 모든 일, 그리고 언제나 그저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다고 한다. 그렇다고 피해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찌하랴. 이렇게 서원이라도 할 수 밖에.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는 민초들이야 그저 빌어서라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천 번인들 빌지 못할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우상숭배를 한단다. 하지만 세상에 우상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부처님의 마음자리라면 우상이 아닐까? 우상숭배라도 좋으니, 2014년 한 해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836-1에 소재한 원주시립박물관에 뒤편 도로 밑에 보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일산동오층석탑(一山洞五層石塔)’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19625월에 강원 감영터로 이전하였다가, 2000년 봉산동 시립박물관 야외로 이전 전시하고 있다.

 

앞쪽으로는 좌우에 석불좌상 2기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이 석불좌상은 두 기 모두 머리부분이 사라져 새로 만들어 조성하였다. 그 좌상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진다. 왜 이렇게 석불의 목을 잘라버린 것일까? 이런 경우 대개 종교적엔 이질감에서 목을 자르기도 했다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균형 비율이 뛰어나

 

일산동 오층석탑은 현재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전체가 큼직한 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양우주와 탱주인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영 우주를 새겼다. 이 오층석탑은 위로 오를수록 서서히 줄어드는 비율이 단아하며 안정감이 있다.

 

 

비록 탑은 훼손이 심하기는 하지만 형태도 정돈되어 있다. 일산동 오층석탑은 몸돌의 덮개석인 옥개석은 얇은 편이다. 지붕돌인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인데, 층마다 안타깝게도 파손된 부분이 많다. 오층석탑은 그 조형이 된 양식으로 보아 고려중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일산동 오층석탑을 바라보는 시각은 착잡하기만 하다.

 

우리문화재의 보존, 이대로 좋은가?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아마도 수백 번은 가슴이 찢어졌을 것 같다. 아니 수천 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풍화에 의해 훼손이 된 문화재보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이 된 문화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 보호를 했는지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 한 마디로 개판이다. 문화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단 한 번이라도 시켜 본 것일까? 아마도 우리 교육에서는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교육이 없었을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국보인 전각 외벽에 낙서하기. 보물로 지정된 전각의 외벽에 빼꼭하니 경쟁하듯 갈겨놓은 낙서. 소중한 문화재에 상처내기. 문화재가 무슨 훼손시키기 경쟁 터인 듯하다. 이렇게 망가져 가는 문화재를 보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문화재가 밥 먹여주나?”

 

흔히 듣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질문이다.

문화재가 밥을 먹여주긴. 오히려 내 삶을 갈아먹고 있는데.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그동안 길에 뿌린 돈만 해도 아파트 한 채 값은 날아갔을 텐데. 밥을 먹여 주었겠소?”

그러면 그 알아주지도 않는 답사는 왜 하나요?”

우리의 정신이 깃든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죠. 있는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미쳤구만 그 많은 돈 써가며 시간 낭비하며 왜 그 짓을....”

 

한 마디로 난 미친 사람이 된다. 사실이다. 미치지 않고서는 누가 돈 처들여가면서 이 짓을 할 것인가? 그렇게 길가에 뿌린 돈만 해도 아마 목 좋은 곳에 30평이 넘는 아파트 한 채는 장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그만 두어야지라고 늘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면 무엇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보따리 챙기고 길을 나서는 것을. 이젠 정말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만 하고, 밥도 안 먹여주는 문화재답사를....

 

하루에 1.8개의 글. 참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11일부터 1130일까지 거의 날마다 2개씩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자료를 보거나 TV, 혹은 영화를 보면서 쓴 글이 아니기에 더욱 더 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나 기타 사람들 간의 인터뷰, 혹은 현장에서 취재한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라는 것은 절대로 집안에서는 쓸 수 없는 글이다. 현장을 나가 문화재를 보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에 흠뻑 젖어도 보고, 눈에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11달 만에 쓴 글이 자그마치 654개나 된다. 남들은 이런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한다. 남들이 아니라 내가 생각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답사는 계속되어야 한다


 


9월 한 달 5kg이 빠졌다.

 

9월 한 달 동안 수원은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렸다. 생태교통 수원2013은 수원시와 ICLEI(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유엔 HABITAT(유엔 인간주거계획) 등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미래 생태교통도시 재현을 통해 기후변화와 연료의 고갈 등에 대한 대응을 위한 새로운 교통부문의 대안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한 달 동안의 차 없는 거리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앞으로 미래에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난 후, 우리의 자손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풀어갈 것인가를 사전에 알아보는 국제적인 프로젝트였다. 9월 한 달 동안 행궁동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서 살았다. 9월은 연일 살인더위였다.

 

 생태교통 한 달동안 5kg이 줄었다. 80개의 기사를 썼다

 


한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거리에서 한 달간, 하루에도 몇 군데씩을 현장 취재를 하고 다녔다. 한 달간 쓴 기사만 해도 80개가 넘는다. 그동안 살이 무려 5kg이나 빠졌으니, 흘린 땀만 해도 어지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 년간의 활동을 뒤돌아보다

 

201311일부터 1130일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을 썼지만, 역시 나는 문화재 전문 블로거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러 나가기 전날이면 괜히 마음이 설렜다. 흡사 소풍날을 앞둔 아이처럼.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11개월 동안 답사를 한 날짜를 계산해보니 58일 정도가 된다. 58일 동안 답사로 소요된 경비만도 천여만 원. 누가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길거리에 돈을 뿌렸다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발 목까지 눈이 쌓여도 그 핑계로 답사를 멈춘 적은 없다

 


지만 문화재 답사는 나에게는 내 일생을 걸고 하는 나만의 생활이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 자료로 만들어 둔다. 언젠가는 그것들을 이용해 좋은 연작 자료집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천만 원을 벌어도 시원치 않다고 한다. 그런데 실상 천여만 원을 투자해서 나에게 돌아 온 수입이란 고작 300여만 원이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투자한 금액보다 수백 배의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 방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성한 글의 90%는 모두 현장에서 취재를 한 기사이다


 

앞으로도 내 바람 따라 걷는 길은 영원할 것

 

눈이 온다고 해서 답사를 멈춘 적이 없다. 오히려 눈이 내리고 비가 오는 날은, 또 다른 정취를 풍기는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늘 나는 스스로를 바람 같은 남자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게 바람 부는 대로 길을 나서 문화재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일 년 동안 엄청 밑지는 장사를 했지만, 그보다 몇배 깂진 지료를 얻었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재 관리가 허술한 나라도 없을 것만 같다. 사찰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 편이지만, 산속이나 들판 등에 자리를 한 문화재들은 언제 누구에게서 훼파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길 위에 서 있는 것도 결국 나 하나만이라도 그 문화재를 눈 부릅뜨고 지키겠다는 마음에서이다.

 

2014, 2015, 혹은 그 이후.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리에 힘이 붙어 있는 한은, 내 문화재 답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1130()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과 함께 떠난 답사. 보령 성주사지와 남포읍성, 서산 부석사를 돌아오는 당일 코스로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백제 때의 절 오합사가 나중에 낭혜화상이 중창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성주사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 3점이 있는 곳이다.

 

금당이란 절의 중심부요,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곳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옛 성주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전날 눈이 내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성주사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금당터였다.

 

금당터의 석불좌 설명이 이상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금당터에는 사면으로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중앙오층석탑 뒤로 오르는 계단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옛 사진을 토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자상의 설명을 듣고 나서 계단을 올라 석불좌 앞에 모여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해설사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금당터는 사방이 트였던 것으로 보여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석불좌 사방에 주초가 놓여있고, 북쪽으로 또 하나의 주초가 있다. 이렇게 석불좌와 주초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당터 가까이만 전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높게 조성을 한 금당터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중앙에만 주초가 있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이 금당터를 올라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금당터 사방이 트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사의 해설이 못 미더워

 

그런데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설명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석불좌 위에 신라시대에 조성한 철불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철불을 조각내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이 석불좌는 깨진 것이다. 이 위에 철불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여기 이렇게 녹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석불좌가 깨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석불좌는 거대한 돌을 구할 수 없을 때, 몇 조각으로 나누어 조성을 한다. 대개는 두 조각이나 네 조각으로 조성을 하는데, 깨진 석조각이 4조각으로 칼로 그은 듯 깨질 수가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석불좌는 하단부이다. 그 위에 커다란 네모난 돌을 앉고 앙련을 하단부에 새겨진 조각의 반대형으로 조각을 한다.

 

철불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석불좌가 깨졌다거나, 그 위에 바로 철불을 올려 그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영 미덥지가 않다. 거기다가 국보인 낭혜화상 탑비를 70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업고 다녔다는 설명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비 몸돌의 높이가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나 되기 때문이다. 장정 몇 사람이 들어도 힘든 비를 노인네가 업고 다녔다는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화재 해설이란 정확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하는 문화재 해설. 참 웃지도 못하겠다. 문화재 답사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해설사들이 입증이 안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기에 내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재 해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하는 가정의 해설, 또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추정하는 문화재 해설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문화재 해설이란 가장 정확한 내용, 가급적이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된 내용을 관람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쳐도 이렇게 미치면 남들은 아예 포기를 할 것만 같다. 14일(일)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인천방향으로 가다가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탔다. 그리고 다시 당진 대전간 고소도로를 타고 가다가 예산을 거쳐 청양읍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40분. 관광안내도를 하나 받아들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청양군까지 가기 전부터 난관에 봉착을 했다. 장마전선이 북으로 올라갔다는 말만 믿고 나선 답사 길이다. 하지만 평택에 들어서 서해안대교에 진입하자, 10m 앞도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붓는다. 그냥 들이붓는다는 말이 적당할 정도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가는 날이 장날 맞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청양군청에서 멀지 않은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15-37에 소재한 석조여래삼존불상. 보물인 이 삼존불상을 보기 위해 좁을 길을 몇 번이나 돌아서 찾아갔지만, 보호각 공사 중이라고 삼존불을 아예 막아놓았다. 어떻게 비집고 들여다 볼 틈도 보이지가 않는다. ‘가는 날이 장날’, 정말 딱 맞는 말이다.

 

그리고 청양군 일대를 샅샅이 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힘들게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일반적으로 어느 지자체나 문화재 안내판이 큰길가나, 아니면 가로 안내판 등에 적혀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양군 내의 거의 모든 문화재들은 길가에 안내판이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도로표지판에 나타나는 것은 장곡사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비는 하루 종일 퍼붓고, 안내판은 찾아 볼 수 없고. 이런 답사라면 차라리 발길을 졸려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왕 나선 길이 아니던가? 그리고 얼마 만에 이렇게 1박 2일로 나선 답사인가? 도저히 뒤돌릴 수가 없어 빗길에 답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미친 문화재 답사가라네.

 

정말 그랬다. 어쩌다가 문화재를 찾다가 근처 주민들에게 문화재가 어디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웬 정신 나간 미친 인간이 이 장대비 속에서 문화재를 찾아왔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단 말인가? 조금은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고 해도,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답사를 계속하는 수밖에.

 

 

그렇게 몇 곳을 돌다가 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늦은 점심 한 그릇을 먹고 다시 답사를 시작했다. 향교, 고택, 석탑, 사찰, 그리고 연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까지. 거기다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 있는 길과, 옛 칠갑산 고갯길에 있는 ‘콩밭 매는 아낙네 상’까지 찾아보았다.

 

저녁 6시까지 그렇게 돌아본 청양군의 문화재 답사는, 악천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상한 눈으로 본다. 도대체 제 정신이라면 이런 장대비 속에서 어찌 문화재 답사를 할 것인가? 장곡사를 들려 나오는 곳에 장승공원을 들렸다. 갖가지 표정의 장승들이 웃고 쳐다본다.

 

 

빗길에서 얻어 낸 짐 보따리, 이젠 풀어야지

 

1박 2일 동안 참 많이도 돌아쳤다. 자료만 해도 17곳을 뒤졌으니 정리를 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지만 이 많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문화재답사. 그리고 그 답사를 빗길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괜히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만다. 언젠가 잘 아는 지인에게서 들은 소리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미친 문화재답사가 한 사람이 참 여럿 즐겁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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