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송도 명기인 명월이 황진이가 벽계수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이다. 세월은 덧없는 것이라. 황진이의 시는 전하지만, 벽계수는 대체 어떤 이유로 첩첩산중 찾는 이 없는 외로운 곳에 유택을 마련했을까?

 

그러고 보면 이곳을 다녀온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문막에서 원주로 가는 도로 우측 편에 보면 ‘동화사’라는 이정표와 함께, 벽계수 이종숙 묘역이라는 입간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큰 돌 하나를 세워 세종대왕의 증손인 벽계도정 후손묘원이라고 썼다. 양편으로 밭이 있고 임도를 따라 조금 들어가다가 보면 벽계수 묘역이 우측 산길로 400m 라는 표시가 보인다.

 

 

찾는 이 없는 벽계수를 찾아가다

 

조금은 가파르다 싶은 산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고묘가 한기 보이고, 그 앞에 벽계수묘역이 100m 전방에 있다는 표시를 본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 산90번지, 바로 벽계수와 부인인 해평 윤씨가 함께 잠들어 있는 유택이다. 세종대왕의 증손으로 알려진 벽계수는 왕족이다.

 

세종대왕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영해군이 태어났고, 영해군의 차남은 ‘길안도정’이다. 이 길안도정의 3남이 바로 황진이와 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뻔한 벽계도정 벽계수이다. 여기서 도정이라 함은 세자의 증손 혹은 대군의 손자나 세자의 아들 및 적증손 에게는 정3품 계자를 제수하고 도정이라고 했다. 벽계수 또한 도정이라는 품계를 제수 받았다.

 

 

 

현실과 거리가 먼 벽계수의 사랑

 

벽계수는 중종 3년인 1508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사망한 년대는 불분명하다. 품계는 명선대부에 올랐으며 휘는 종숙, 호는 현옹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싫어하며, 빗대어 쓴 시가 많이 전한다. 35세인 1542년에는 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드라마 속의 벽계수를 기억한다. 황진이와 서로 사랑놀음을 하면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자신이 연모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리가 먼 것일까? 황진이는 송도 부근 성거산에 있는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그를 유혹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는 다시 서경덕을 찾아가 스스로 송도에 꺾을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화담 서경덕이요, 셋째는 바로 황진이 자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유명한 송도삼절이 생겨난 것이다.

 

벽계수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일까?

 

그러나 막상 청산리 벽계수의 주인공인 벽계수는 황진이의 그 애간장을 녹이는 시조 한수로 그만 낙마를 하고, 황진이의 마음속에서 멀어졌다. 문막읍 동화리 산 속에 있는 벽계수 이종숙의 묘, 묘지 위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있다. 앞에 석물 몇 기는 최근에 후손들이 세운 듯하다. 묘역 한편에 있는 석물을 보니, 꽤나 오래된 돌이다.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묘역은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이 배향한 방향을 보니, 이 길로 가면 송도로 가는 방향은 아닐까? 한참이나 묘역 앞에 앉아 벽계수와 황진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누군가 묘역 앞에 술병을 치우지 않고 갔다. 그럴 줄 알았으면 막걸리라도 한 통 받아올 것을. 내려오는 길에 숲속에서 나무 부딪는 소리가 나 쳐다보니, 커다란 노루 한 마리가 산등성이를 향해 치닫는다. 아마도 벽계수의 영혼이 그리운 황진이를 찾아 뛰어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 사라진 숲만 쳐다보고 있다.

金入垂楊 玉謝梅(금입수양 옥사매) 금빛은 수양버들에 들고 옥빛은 매화를 떠나는데

小池春水 碧於苔(소지춘수 벽어태) 봄 작은 연못의 물은 이끼보다 푸르구나.

春愁春興 誰深淺(춘수춘흥 수심천) 봄 시름 봄 흥취 어느 것이 깊고 얕은가

燕子不來 花未開(연자불래 화미개) 아직 제비도 오지 않고 꽃도 피지 않았는데.

 

조선 전기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서거정의 시 ‘춘일(春日)이다. 서거정은 조선조 세종 2년인 1420년에 태어나 성종 19년인 14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달성이요,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四佳)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전서 ’의(義)‘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彌性)‘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최항은 그의 자형이다.

 

 

조수와 유방선 등에게 학문을 배은 서거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성명, 풍수 등 여러 방면에 두루 관통하였다. 세종 26년인 1444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인 1451년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인 1457년 문신정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45년간 6명의 왕을 섬긴 서거정

 

서거정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벼슬에 나아간 서거정은 23차에 걸쳐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으며,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세조 6년인 1460년에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에서 안남사신과 시재를 겨루었다. 요동인 구제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또 성종 7년인 1476년에는 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을 때에는 수창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후, 성종 1년인 1470년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이 되고 달성군에 책봉되었다.

 

 

 

조선조 문인의 대표적 인물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의 저술에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지방연혁과 풍물을 담은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도 함께하였다.

 

신라의 설총에서부터 조선건국 이후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약 5백인의 작가들 작품 4,302편을 수록한『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동인시화』와,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와 설화와 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대표적인 저술서로는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방이동서 이묘한 서거정의 묘

 

서거정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강동구 방이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1975년 6월 13일 이장하여 현재의 위치에 모셔졌다. 현재 봉담읍에서 수원으로 올라오는 도로변 우측,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 47번지에 소재한다. 묘소 앞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옛 석물로 남아있는 것은 묘표, 문인석뿐이고, 상석 등은 이장할 때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5월 10일 목요일 오후, 봉담읍에 소재한 서거정의 묘를 찾아보았다. 조선조의 대문장가로 알려진 서거정의 묘소 앞으로는 후손들의 묘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아래편에 사당이 건립되어 있다. 묘를 이장할 때 19매의 묘지석이 출토되었으며, 이 묘지석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묘지석은 백자로 구워졌으며 제1번 묘지석은 특별히 ‘청화(靑畵)’로 썼고, 나머지는 정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필로 글자를 써넣었다.

 

 

 

축대 위에 지은 솟을대문의 앞에는 ‘전성문(展省門)’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재실인 ‘염수재’가 있다. 염수재는 24평으로 염수재의 앞에는 ‘염수재기’를 적은 비가 놓여있는데, 비의 뒤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사가공 재실인 염수재는 서기 1976년도 이축하여 약 25년간 유지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했으나 오래되고 낡은 도가 지나쳐 고심하던 차에, 종산의 일부가 경부고속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그 보상금으로 1999년 3월에 옛 재실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재실의 지었다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없는 대문호 서거정의 묘역

 

재실인 염수재를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비스듬히 비탈이 진 곳에 서거정의 묘를 맨 위에 둔 서씨일가의 묘역이 층층이 마련되어 있다. 서거정의 묘는 묘 앞에 세운 묘표와 좌, 우측의 문인석만이 옛 것이고, 남은 석물은 묘를 이전하면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묘표에는 조선숭정대부 좌찬성 달성군 서거정과 정경부인 선산김씨의 묘임을 적고 있다.

 

서거정의 묘로 오르는 길에 그 앞에 자리한 묘들을 보니, 봉분의 흙이 파이고 제대로 관리가 안된 듯하다. 서거정의 묘는 서울 방이동에서 이묘를 했다고 하지만, 그 묘를 이묘할 때 나온 묘지석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상태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거정의 묘역은 당연히 화성시에서 관리를 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근처의 공장 안내판과 함께 걸려있으며, 재실과 묘역 앞에는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길가에 따로 서 있는 신도비의 앞에 퇴색이 되어 글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묘소 안내문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선의 대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서거정의 묘역치고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대문장가요, 중국에서까지 기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서거정. 화성시에서는 이곳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인물이 묻힌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몰라라식의 처사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남원시 운봉읍 가산리 89번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국악의 성지. 그곳을 가면 볼 것이 있다. 남원은 판소리의 본고장이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춘향가와 흥부가의 배경지가 될 만큼 유명한 곳으로, 예로부터 국악의 산실이었으며 동편제 판소리를 정형화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는 우리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그 판소리 중 동편제 소리의 발상지 이며, 춘향가 흥부가의 배경지인 남원. 운봉에는 국악의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가왕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지가 있고, 지리산을 바라보고 많은 후학들이 소리에 전념하고 있는 국악성지전시관이 있다.


동굴독공을 따르는 후학들이 피를 토하는 곳

국악의 성지 전시관을 들어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판소리의 명창들이 묻힌 성역인 국악선인묘역이 있다. 그곳을 오르다가 보면 계단 위로 소나무 숲길인 소릿길이 있고, 밑으로는 조경을 해 놓은 길이 하나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돌로 조경을 해 놓은 곳에 문이 세 개 있다. 그 문을 열어본다.



문을 열고 입구를 들어서면, 안으로 들어가 꺾인 곳에 또 하나의 문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판소리를 할 때 고수가 사용하는 소리북과 방석 등이 보인다. 이곳에서 명창이 되기 위해 후학들이 소리공부를 하는 곳이다. 동굴독공의 진한 맛을 보기 위해 마련한 곳. 그 힘든 학습방법을 과연 이곳에서 깨달을 수가 있을까?

예전 명창들은 득음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굴독공과 폭포독공을 행해왔다. 동굴독공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입구를 막아버리고, 그 안에서 2년이고 3년이고 소리를 얻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던 득음의 방법이다. 명창 이날치와 이동백 등이 바로 이 동굴독공으로 소리를 얻었다.




그런 명창들을 따라 소리공부를 하기 위해 동굴처럼 마련한 곳이다. 지금이야 소리공부를 하고나서 밖으로 자유자재로 출입을 할 수 있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 옛 명창들의 소리공부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가늠할 수가 있다.

이것이 가로등이라니, 정말 멋지지 않아

동굴독공을 체험하는 곳을 본 후 천천히 전시관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런데 앞에 선 조형물이 색다르다. 여기저기 적당한 간격으로 놓인 것을 보니 가로등이다. 그런데 그 가로등 밑에 소리북이며 가야금, 거문고 등을 달아놓았다. 그것을 보고 괜한 웃음을 웃는다. 멋지다. 누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어두운 길을 밝히는 가로등이 같을 필요는 없다. 나름대로 그 지역에 걸 맞는 가로등을 이렇게 조형을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다. 단지 어두움을 밝히는 용도가 아닌, 색다른 멋을 낼 수 있는 조형물. 그것을 보면서 또 다른 가로등을 생각해본다. 아마도 각 지역마다 그곳에 알맞은 이런 멋진 가로등을 장식한다면, 그것 또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지는 않을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