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충효동에 있는 김유신묘. 현재는 사적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 어느 왕릉보다도 화려하게 조성이 된 김유신묘는 석물과 무덤을 두르고 있는 십이지신상들로 인해 유명하다. 묘의 입구에 서 있는 문은 <흥무문>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왕의 격식을 갖춘 묘

 

김유신의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 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

 

 

 

비에 숨은 비밀, 왜 그랬을까?

 

이 비와 마주보고 서 있는 또 하나의 비. 그 비는 100여 년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비에는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이 비의 맨 아래글자인 능(陵)자가 물에 젖으면 묘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왕으로 추증을 받아 흥무대왕이란 호칭을 받았지만, 김해 김씨들이 관리를 하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유신묘를 찾아간 날은 날씨가 좋아 <묘>자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관리인인 듯 한 분에게 물을 부어도 되느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대답이다. 삼국을 통일하고, 왕으로까지 추증을 받은 김유신.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간에 시시비비를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천년이나 지난 세월에, 굳이 그렇게 임금이 아니었음을 강조를 했어야 했을까?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또 다른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참 우리네 인간이란 것들은 참 묘하다. 왜 굳이 그런 일을 벌어야했는지, 하기에 사람은 살아생전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하라고 성현들이 말씀하셨나 보다. 오늘 이 묘비 하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하직하고 나면, ‘유택(幽宅)’이라고 하는 묘에 들어가 영면을 한다. 물론 요즈음은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을 해서 뿌리거나, 그런 것이 서운하면 수목장(樹木葬)이나 혹은 납골당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묘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봉분을 고집하는 분들이 꽤나 된다.

 

그런데 이 묘를 보면, 참으로 그 사람이 살아생전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궁금하게 만드는 묘들이 많다. 앞에는 석물이 있고, 봉분은 남산만하다. 거기다가 큼직한 돌에는 별 이상한 글도 적혀있기도 하다. 자손을 잘 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대단한 인물인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돈으로 도배를 한 묘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능하다. 그러나 그 묘에 가서 아무도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다. 그 자손들이야 찾겠지만.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에 소재한 태종 무열왕릉

 

묘역을 갖고 사람을 판단할 수 없어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묘가 아니다. 사람이 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다가 죽은 이도 있겠고, 그저 고생만 하다가 죽은 이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나라님이라고 하는 분들은 죽은 후에 그 묘를 보면, 대충 그 사람이 얼마나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묘 하나만 갖고 그 임금님의 일생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경주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왕의 묘를 보면 그 크기가 대단하다. 무열왕의 묘도 대단한데 그 앞에 있는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묘 또한 만만치가 않다. 무열왕릉의 뒤편에는 왕릉이 3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 진흥왕릉고』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 능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보물 제65호인 서악동 삼층석탑을 비껴서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 2기가 있다.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 비

 

사적에 묻힌 나라님들

 

사적 제178호로 지정이 된 신라 46대 문성왕릉(839~857 김경응)은 진흥, 헌안왕 능과 함께 선도산 남쪽 구릉 말단에 있다. 능의 지름은 20,6m에 높이는 5.5m이다. 문성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왕위에 올라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였으며 임해전(안압지)을 크게 보수하였다.

 

사적 제179호인 신라 제47대 헌안왕릉(재위 857~861/김의정)은 문성왕릉의 바로 곁에 있다. 지름은 15.3m에 높이는 4.3m이다. 이 능은 밑 둘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들어나 있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었다. 헌안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하지만 이 두 임금의 묘는 무열왕의 묘에 비길 바는 아니다. 신라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유택을 보면, 그 나름대로 나라님들이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왕릉을 보면 제대로 된 이정표 하나 없이 덩그러니 봉분만 남아 있다. 후백제를 세우고 한 때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갖기도 하였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아들 신검과의 내분으로 고려에 의해 멸망을 하고 말았다.

 

명장을 만드는 것은 휘하의 장졸이다

 

이런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라님의 유택만이 아니다.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경주 김유신의 묘나, 23전 23승이라는 놀라운 전승의 해전 기록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의 유택 역시, 수많은 시간이 지났으면서도 후대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삶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이라는 대단한 해전인 한산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것은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장만 있어서 그 험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가 않다. 그 밑에는 장군을 믿고 의심 없이 따르는 수많은 장수들과, 이름 없는 병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만큼 명장 밑에는 백성들을 생각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수하의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라님 주변 사람들이 과연 명장 밑에 있는 명 장수들일까? 그들이 과연 국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다가 보면 참담하다는 생각만 든다.

 

 

바로 이런 차이다. 훌륭한 명장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따르고 나라와 국민들을 생각하는 장졸들이 있어야만 한다. 요즈음 들어 많은 지자체장들을 보아도, 그 주변에 명장을 만들 수 있는 장졸들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후일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일이다. 곁에 명 장수가 없고, 자신의 버팀목이 될 수 없는 장졸이라면, 당당히 버릴 사람은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말없이 숱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역사는 준엄하게 그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이다.


고달사지 경내에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오르면서 조금 못미쳐 우측으로 길이 나 있다. 고달사지 부도에서 산능선을 따라 500m 정도 오르면 보호철책 내에 정비되어 있는 석실을 볼 수 있다. 무덤 서쪽에는 연도폐쇄석이 놓여 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산 46-1에 해당하는 곳. 경기도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다. 석실의 형채를 상방하원형이라 부른다. 상방하원형이란 하부의 석실평면은 원형이고 연도가 달려 있으며, 상부는 네모난 방형의 2층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임이 밝혀져 그 구조상의 특징을 살려 '상방하원석실묘'란 명칭이 붙여졌다.


지상구조는 2층의 제단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기단 1층의 규모는 동서가 442cm, 남북이 412cm, 높이 46cm로 장방형을 이루었고, 기단 2층은 동서가 322cm, 남북이 280cm, 높이는 50cm이다. 기단하부의 석실은 돌을 쌓아서 평면원형의 현실과 평면장방형의 연도를 만들었고, 평면의 모양은 열쇠구멍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고달사지를 답사한 후 석실묘를 답사하기 위해 산길로 올랐다.  산림욕도 즐길 겸 천천히 이야기를 하면서 20여분 만에 보게 되는 석실묘. 그런데 언제 정비는 했는지 잡풀이 무성하다. 석실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 보호철책을 둘렀는데 들어갈 수가 없다. 보호철책에는 문이 없다. 석실 내부를 보아야 석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데, 보호철책에 문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석실을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 석실묘 입구 잡풀이 무성한 석실묘. 정리가 안된 문화재.

  
▲ 석실 내부 원형으로 된 석실내부

 

문제는 보호철책을 넘어 들어가서다. 석실 입구를 막은 문을 열 수가 없으니 창살 틈으로겨우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어두운 석실 내부를 보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떠야 한다. 이때쯤이면 화가 치민다. 도대체 문화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보호만 하겠다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문화재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들어갈 수 없는 철책을 두르고, 거기다가 열 수 없는 문을 만들었다면 문화재를 보라는 것인지, 보지 말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닫고 감추고 하는 것이 문화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고 느끼고 가야 올바른 문화재의 가치를 알 수가 있다. 고려 말기의 묘제 연구에 소중한 자료인 상교리 석실묘. 하루 빨리 묘실 안을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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