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남한강의 자갈과 모래를 이용한 그림을 그릴까? 그리고 그런 재료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그림이 될까?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 거주하는 이영학씨(·51). 민족미술협의회 회원이면서 여주 민예총 미술분과위원회인 <여미울>의 회원이다.

 

강가 갈대숲의 고라니야 까투리야

그 옆의 버들 숲아

물 위에 두둥실 떠 있는 청둥오리야

 

그림에 붙어있는 설명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내 심장에 붉은 깃발을 꽂아 달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지역신문에 매주 그림을 그려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는 이영학씨. 그 그림은 순전히 남한강에서 재료를 구한 강돌인 자갈과 모래가 전부다. 그 재료를 갖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 <사람>, <어쩌나> 등의 제목으로 그려대는 그림 속에는 이영학씨의 고뇌가 배어있다.

 

4대강을 상징한 걸개그림. 이영학씨를 비롯한 여주 민미협 회원들의 공동작품이다. 아이와 물고기, 그리고 용동치는 물결, 그곳에 포클레인이 삽질을 하고 있다. 그 속에는 숱한 문화재도 함께 훼손당한다

 

자연은 왜 건드린데요?

 

골재, 모래와 자갈.

아니 수 억 년 흘러내려 쌓이고 쌓인

우리 조상들의 살과 뼈와 퇴적물.

그것을 마구 퍼 먹고 있다.

 

자연은 사람이란다. 그 안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을 표현한 그림은 파격적이다. 모래 위에 강돌을 놓아 사람의 형상을 표현했다. 강돌이 발가락이 되고 뼈마디가 되었다. 그리고 그 강돌과 모래가 우리 생명의 원천임을 부르짖는다.

 

우리는 자연입니다.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 살 수 없듯이, 자연도 인간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마구잡이로 보를 막고, 그곳에서 강동과 모래를 채취했습니다. 그것들은 수억 년 오랜 세월을 강바닥을 지켜 온 것들입니다. 그 안에 생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헤쳐 버리면, 그리고 그 돌과 모래를 채취하면서 치어나 알들은 온전히 남아있겠습니까? 이것은 자연에 대한 도전이요, 인간의 오만입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이죠.”

 

강에서 태어나고, 강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허름한 옛집을 구해 작업실로 사용하는 이영학씨는 스스로 자연을 닮은 인간이기를 강조한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자연을 망쳐놓은 사람들도 죄인이고, 그것을 막지 못한 우리들도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후손들에게 죄인입니다.”

 

사람 강돌과 모래를 마구 채취해 자연을 잃은 사람들은 뼈만 남아버렸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보이게 말라버린 사람들

 

작품에서 드러난 작가의 절규

 

이영학씨는 많은 개인전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9년부터 전국을 다니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은 모두 강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들이다. 그렇게 자신의 속내를 작품 속에 드러내고 있다.

 

1996 개인전 '드러냄'(나무화랑)을 시작으로 2008 개인전 '엄마야 누나야'(여주군민회관), 경기통일미술전(안산문화예술의전당), 조국의 산하전(여주인천파주부산) 2009 용산참사'망루전'(평화박물관), 용산참사현장 개인전(레아호프), 생명의 강 (광주 5.18 기념문화관) 등의 전시가 모두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에 관한 것들이다. 지난해부터 이포보 현장 가까운 곳인 남한강에서 강돌과 모래를 가져다가 작업을 시작했다.

 

강을 진정코 막아 그 속살을 퍼낸다면

강이 아니여 깡이여 깡!

깡깡 어는 깡, 가만히 있지 않을 깡

수 천 수만의 세월의 역사를 깡그리 없앨 수도 있는 깡

 

작가는 강돌로 모래위에 ''이란 글씨를 썼다. 그 깡은 ''이 망가지면 ''이 된다는 것이다. 깡그리 생명을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고뇌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그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강에서 만나야만 한단다.

 

 2009 여주 민족예술제 행사장에서 훼손되는 4대강을 주제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이영학씨

 

저는 그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연만이 우리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 자연을 이렇게 깡그리 다 훼손시킨다면, 자연이 우리를 놓아두겠습니까. 그 업보는 그들 스스로의 자손들이 감당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주민예총 주관행사인 '민족예술제'에서 4대강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던 그이다. 대신면 남한강이 가까운 허름한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영학씨. 그는 오늘도 남한강의 강돌과 모래를 재료삼아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어릴 적에 ‘은진미륵’이라는 사진을, 교과서 등을 통해 한 번쯤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대한 화강암 석재로 제작이 된 은진미륵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물 제218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 관촉사 은진미륵의 공식 명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입상의 높이는 l8.12m나 되며, 고려 초기의 거대석불에 해당한다.

은진미륵은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불교적이기 보다는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당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과 넓은 코, 일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고리형으로 매달린 느낌을 준다.


후천세계에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

미륵불은 56억 7천 만 년이 지난 다음에, 그 때까지도 구제가 안 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타날 부처님이다. 흔히 부처와 보살로 불리어지는 미륵불은 미래불이다. 미륵불은 일반적으로 산이나 들 같은 바깥에 세워진다. 관촉사 미륵입상은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들었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입상은 정교하지는 않다. 몸통에 비해 얼굴이 강조되어 아름다운 균형미는 반감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이나 전체적인 꾸밈이 매우 투박하다. 오른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손을 안으로 향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아 관음보살로 생각이 든다.





어깨에 걸쳐 입은 가사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 부분으로 몇 개의 U자형 옷 주름을 돌렸다. 가슴께는 매듭을 묶고 있어 고려시대에 보이는 이 지역 특징인 거대불상의 초기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올렸을까?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이 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인 1006년에 완성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륵보살입상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38년이나 걸린 셈이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하반신의 몸체 위에 어떻게 저 큰 상반신을 올린 것일까? 지금처럼 대형 중장비로도 버거운 무게이다. 그런데 어떻게 상반신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거대석불을 조성하는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걱정을 하던 차에,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자들이 커다란 돌을 놓더니, 그 돌의 주변에 모래를 쌓고 딴 돌을 경사진 모래비탈을 굴려 올라가 위에 놓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혜명대사는 크게 기뻐하여 바삐 돌아와 동자들이 하던 그 방법대로 상반신을 올렸다는 것이다.

결국 그 동자들은 누구였을까? 아마 혜명대사가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지 못해 속이 타는 것을 알고, 동자들을 보내 깨우침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거대한 석불의 상반신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보았을까? 아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이렇게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늘이 깨달음을 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큰 거대석불은 충청도 지역에서 보이는 지역적 특색이기도 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은진미륵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그 미래불인 미륵이 도래하는 시기가 어서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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