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등에 위치한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9호로 지정하였다고 12일 밝혔다.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하천경관을 바라볼 수 있고, 운길산 정상에서는 한강은 물론 서울 북동쪽지역의 산지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의 금대봉 검룡소(명승 제73)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합쳐지는 장소로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 일원은 계절에 따라 신록, 녹음, 단풍, 설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시간과 날씨에 따라 일출, 일몰, 운무 등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경관가치가 큰 곳이다.

 

 

조선초기의 대문호 서거정도 극찬한 곳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인근에 생가가 있었던 정약용(17621836)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할 만큼 즐겨 찾던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다. 또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 문화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남양주에 두물머리와 수종사가 있다면, 우리 수원에는 광교산과 창성사지가 있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현재 비는 화성의 방화수류정 가까이에 옮겨져 있다.

 

 

창성사지는 지금도 옛 절터의 석축이 남아있고, 사지 안에는 우물과 함께 여기저기 석물들이 보인다. 이 창성사지는 고려 때의 절터라고만 알려져 있다. 창성사지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산의 능선이 아름답다. 아마도 저런 경치 때문에 이곳을 절터로 잡은 것은 아니었을까?

 

창성사 복원할 수 있을까?

 

지난 511시부터 수원시의회에서는 제302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가 열렸다. 이날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를 문화재 발굴조사를 한다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창성사지는 수원시와 한울문화재연구원의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2008년 대략적인 현황이 파악된 바 있다. 이번 동의안은 수원지역 관련 학술연구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책임성 있는 법인 또는 학술연구기관을 선정하여 문화재 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특히 창성사지의 발굴조사는 창성사지의 사역 및 건물지 확인,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의 원 위치 주변을 조사하여 창성사지의 가람배치 및 창건시기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향후 연차적 발굴조사 계획 및 복원 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한다는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창성사지의 문화재 발굴조사가 끝나고 이곳에 옛 건물대로 창성사가 복원이 될 수 있다면, 많은 절터가 있는 광교산도 명승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지는 않을 것인지. 특히 창성사를 오르는 길이나 사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경은 이곳이 명승이 되고도 남을만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곳을 자주 찾아가고 이곳이 경치를 좋아하는 내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문화재청에서 수종사 일원을 명승으로 지정했다는 소식에, 광교산 창성사의 소실이 안타깝다. 보물인 비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 모습을 유추해 내기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해서이다. 오늘은 창성사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보아야겠다.

환벽당 일원 항공사진/ 광주북구청 제공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위치한 광주 환벽당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7호로 지정하였다고 고지를 했다.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성원 등을 제자로 둠, 1501~1572)가 노년에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증암천 옆에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정자와 연못을 비롯하여 전후좌우로 송림과 죽림, 그리고 주변의 산들이 그림처럼 두르고 있어 환벽(環碧)’이란 뜻 그대로 모두 푸른빛으로 둘러싸여 청록색의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자연경관 또한 빼어난 곳이다. 이런 고지를 만나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 30년 간의 문화재 답사 때 들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흡사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 듯하다.

 

 

또한 환벽당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과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은 조선시대 별서원림(別墅園林, 사방의 주변 경관을 조망할 수 있게 만든 정자와 정원)으로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樓亭文化)를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번에 명승으로 지정한 구역은 기존 환벽당 정자와 연못,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493~1583)과 사촌 김윤제가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와 용소, 송림이 아름다운 뒷동산을 포함함으로써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 식영정(息影亭, 명승 제57)과 더불어 옛 일동삼승(一洞三勝, 한 지역 안에 3개의 명승이 있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호남문학의 찬연한 꽃을 피운 광주 환벽당

 

충효동에 자리하고 있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번에 환벽당이 명승으로 지정이 되었다는 고지를 보면서 왈칵 눈물이 난다지난 3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 다녔는지. 누가 돈을 주면서 시킨 것도 아니지만, 미친 듯 돌아보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지나친 곳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 아마도 내 바람따라 걷는 행보는 계속될 것만 같다.

이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하지만 아직도 한 낮에는 길을 조금만 걸어도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른다. 이런 날 가장 생각나는 곳 중 한 곳이 바로, 명승 제37호인 동해 무릉계곡이다. 강원도 동해시 무릉로 584 등에 해당하는 동해 무릉계곡은 동해시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집필 된 곳

 

여름철이 되면 무릉계곡에는 피서를 하기 위해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무릉계곡은 고려시대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했다고 전한다. ‘무릉계곡’이라는 명칭은,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인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500여평의 무릉반석에는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무릉계곡에 찾아 든 시인묵객들은 이곳에서 시 한수를 읊조리고, 바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을 것이다. 아마도 옛 선비들은 이곳을 세상의 시든 때를 깨끗이 하기 위한 장소로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맑은 물에 발이라도 담구고 앉아있으면,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자와 어우러진 곳에 발을 쉬다

 

무릉계곡은 곳곳이 폭포 및 기암절벽들이 절경을 형성한다. 거기다가 뚜렷한 절리 등이 단열에 의해 형성되고 있으며, 쌍폭과 용추의 절리로 형성된 절벽에 따라 소가 형성되어, 특이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무릉계곡에 나타나는 단애 및 폭포 등이 전형적인 화강암 계곡의 침식 및 퇴적 지형을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처음 금란정은 조선조 말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해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유생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는 금란계 계원들이 모여 시회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정리가 된 지금의 금란정은 근자에 들어 새롭게 조성한 정자다. 아마 1945년에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곳. 더구나 이곳에는 삼화사라는 절이 있어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는 제격이다. 나는 한 여름철 무더위에 지칠 때마다 이곳을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 있다.

 

‘신선이 되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무릉계곡으로 달려가라’

천혜의 신비를 간직한 무릉계곡은 국민관광지 제77호로 1977년에 지정이 된 곳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계곡이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무릉계곡은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에 있는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동해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금란정과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는 무릉반석(아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 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이 무릉반석이 있는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다. 금란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정자는 무릉반석 곁에 노송 몇 그루와 바위들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란정은 조선조 말 향교인 명륜당에서 공부를 하던 유생들이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이 되고 향교가 폐지되자, 그 분을 이기지 못한 유생들이 모여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란정을 이곳에 짓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관헌들에 의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명승 무릉계곡

그 후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해 당시 유림선비들의 자손들이 모여 선대의 뜻을 기리고자 이 정각을 세우고 금란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지금도 매년 봄, 가을에 계원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새롭게 선경에 조성한 금란정

 

깨끗하게 정리가 된 금란정은 근자에 들어 새롭게 조성한 정자다. 아마 1945년에 지은 것을 부수고 다시 조성한 것처럼 보인다. 옆에 맑은 물이 흐르는 무릉반석에는 깊게 판 많은 글자들이 사람의 눈길을 끈다. 한문으로 된 문구들을 바라보며 학식이 없음을 탓한다. 어찌하랴, 워낙 재주가 없다보니 그냥 바라다 보고만 있어야지.

 

누가 같이 동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반석의 넓이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장관에 취해 잠시 정자는 잊었다.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해가 간다. 이 절경을 보고 시 한수 읊지 않는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움에 취해 흥얼거리지 않는다면 어찌 묵객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잃은 울분을 이곳에 와 정자를 지어 풀어버리려고 했던 분들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니 그분들도 그런 심정이지나 않았을까.

 

 

금란정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무릉계곡을 찾아 계곡 입구에서 삼화사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일주문 전에 정자가 있다. 무릉계곡을 찾아가는 길은 동해시 효가 사거리 - 우회전 - 4.4km - 삼화동3거리 - 좌회전 - 5.3km - 무릉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가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 현지교통을 이용하려면 동해시외버스터미널-무릉계곡으로 30분 간격으로 운행을 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1월 6일, 오후까지 일을 보고 잠시 광한루원에 들렸다. 걸어서 20여분, 카메라 하나를 걸머메고 천천히 걸어 광한루원까지 가는 길에, 은행잎이 떨어져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광한루원은 명승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광한루원이야 유명한 곳이고 수많은 소개가 된 곳이니, 구태여 여기서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월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적에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정경을 본 따 축조를 했을 것이다. 담벼락 한편에 은행나무가 서 있어. 초가 위에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이 아름답다. 월매의 집은 대문채와 안채,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별채인 부용당으로 꾸며져 있다.


전형적인 민가를 잘 나타내고 있어

물론 월매의 집이 문화재는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있던 집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을 돌아보면, 예전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매의 집 앞에는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월매(月梅)집 -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타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하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이 집은 돌담 위에 짚으로 이엉을 올렸으며, 대문은 네 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한 칸은 대문채인 하인의 방이고, 대문, 그리고 좌측 두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그 옆에는 한 칸으로 지은 측간이 자리한다.

그 측간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노랑 은행잎이 떨어져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누가 가을은 붉다고 하였는가? 이 노랑 은행잎이야말로 가을을 알리는 가장 멋진 색이 아닐까 한다.

다섯 칸으로 구성한 안채 훌륭하네.

월매의 집 안채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자리한다. - 자로 서 있는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이 자리하고, 부엌 옆에는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마루방과 맨 우측에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정자와 같이 난간을 둘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안방과 대청까지 연결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 뒤로는 문을 달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놓은 듯하다. 문마다 잠겨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정도 집이라면, 민초들의 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다.

안채의 앞면이다. 가끔은 앞에 굴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좌측 부엌쪽에도 없다





이런 세상에 집을 돌아보니 굴뚝이 없네

옆에 서 있는 ‘부용당’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대문채와 안채만 갖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초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그래도 명승에 마련한 집이고, 더욱 춘향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꾸민 집이다. 그런데 대문채를 들어서면 대문채 방 앞에 <행랑채 - 방자가 식사하는 장면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방자가 왜 월매네 집의 행랑채에 묵고 있을까? 그것이야 이도령이 부용당에서 춘향이와 사랑 놀음에 빠져있으니, 이 대문채 행랑방에서 방자가 밥을 좀 먹기로서니 무엇이 문제이랴. 그런데 안채를 돌아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를 본다.

뒤켠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연도도 없다. 만일 연도가 있다면 축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안채 부엌에는 향단이가 불을 때고 있는 모형이 보인다. 이 안채의 구성으로 보아서 적어도 굴뚝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에서 나오는 굴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도도 없고 굴뚝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불 때는 향단이가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는.

측면에도 역시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두 개의 굴뚝이 서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나오는 굴뚝. 그런데 굴뚝이 없다. 보일러를 옛날에도 썼는지?


명색이 명승 안에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곳 안에 마련한 집에 굴뚝이 없다니. 굴뚝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저 건성으로 대충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전시행정. 참으로 멋진 월매네 집의 ‘옥에 티’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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