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하기는 했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쓴 것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대문의 안편

 

머슴들의 생활을 엿보다

 

감고당을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영조의 친필인 감고당 편액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은 중앙과 우측에는 문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문이 있을 자리에는 방이 들어섰다. 누가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하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솟을대문의 양편으로는 길게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머슴 등 일꾼들이 작업을 하는 곳이다. 새끼를 꼬기도 하고 가마니를 짜기도 한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도 이용을 하는데. 감고당을 둘러보다가 만나는 하인들의 모습이 재미 있다. 

 


머슴들이 주로 기거를 하는 곳이다. 농한기면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새끼를 꼬기도 한다


행랑채 방에서 새끼를 꼬는 머습의 모습이 재미있다


행랑채 방 중에서 곳간으로 사용되는 방에서 볏가마를 진 머슴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사랑채

 

행랑채의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다. 이곳은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시를 쓰고 정치를 논하기도 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랏일을 걱정하고는 했을 것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분이 되어 있다. 사대부가의 집이라고는 해도 정취가 있게 지어진 집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누마루, 대청, 사랑방으로 구분된다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비켜서면 중문채가 있다. 중문채는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곳이다. 중문채의 입구에는 중문이라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문 안편으로는 안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칸막이를 하였다. 이 중문채에 달린 방에는 집안에서 일을 하는 청지기 등이 기거를 하는 곳이다. 또한 김칫독을 저장하는 저장소나 곳간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채다. 안채는 여자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와는 담을 사이에 둔다. 감고당의 안채는 집안에서 가장 안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외부와는 차단되었다.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 안채는 명성황후와 인현황후가 기거를 했던 곳이다.

 


집안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며 외부와 차단이 된다


사랑채와 담을 경계로 한 안채

 

두 분의 황후가 기거를 했다는 감고당.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듯 하다. 찬찬히 훑어본 감고당은 역사의 아픔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그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소용돌이치는 역사를 이제는 다 잊은 듯.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에 소재한 사적 제207호인 홍, 유릉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능침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있는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인 1897년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기존의 역대 어제실과는 다르게 조성해

 

고종황제의 능침인 홍릉을 바라보고 그 좌측에 보면 어제실이 있다. 어제실이란 홍릉에 제를 모실 때 제관들의 제사 준비와 휴식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고급스런 사대부가의 살림집처럼 마련한 제실은 행랑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마련하였다. 이곳은 능참봉을 파견해 능을 관리하게도 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함에 따라 모든 제도를 혁신하였다. 이에 따라 능의 구조와 돌로 만든 석물의 배치 등도 달라졌으며, 재실의 건축 또한 많이 달라졌다. 하기에 홍릉과 유릉의 어제실은 기존의 왕릉에 딸린 재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유릉의 경우에는 홍릉의 재실보다 더 웅장하게 조성하였다.

 

 

석물을 많이 사용한 어제실

 

어제실의 문을 들어서면 앞에 7칸의 전각이 보인다. 이 전각을 장대석을 이용해 세 칸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7칸으로 된 건물을 마련하였다. 전각을 바라보고 좌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중앙에 두 칸은 대청을 꾸몄다. 우측으로는 세 칸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맨 우측의 방은 마루방인 듯하다.

 

이 건물은 벽을 돌과 벽돌을 이용해 꾸몄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양편으로 모두 자로 꺾어지었는데, 좌측은 두 칸의 광과 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나열했다. 우측 역시 좌측과 똑 같은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우측의 담장에는 작은 문을 내어 제관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에도 9칸의 건물이 있어

 

중앙에 제관들이 사용하는 전각 뒤편으로도 9칸으로 된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이 전각 역시 한 칸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자로 지은 이 집은 좌측에 두칸을 내달아 부엌과 방을 드렸으며, 이어서 두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두 칸의 대청과 한 칸의 방이 있다.

 

이 건물 역시 외벽은 돌과 벽돌로 조성하였다. 일반적인 역대의 재실보다 그 규모가 더 커졌음은 물론 장대석으로 높이 쌓아올린 후에 맞배지붕의 전각을 지어 황제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왕들의 능침에서 보아오던 제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꾸며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어제실. 보기에는 더 웅장하게 지어진 어제실이지만, 그 안에 고종황제의 슬픔과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의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를 않고 있다.

  1. 참교육 2014.04.23 07:17 신고

    역사의 비극이 남아 있는 곳이군요.
    요즈음 세월호 침몰에 대처하는 국정운영을 보면서 훌륭한 지도자가 필요한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2. 익명 2014.04.23 07:44

    비밀댓글입니다

  3. pennpenn 2014.04.23 08:09 신고

    미답의 왕릉인데 조만간 한번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4. 익명 2014.04.23 08:26

    비밀댓글입니다

  5. 저녁노을 2014.04.23 08:37

    아픔이 남아있는 곳이군요.

    잘 보고가요

  6. 온누리49 2014.04.23 09:09 신고

    수원연화장을 갑니다
    오늘은 학생 영가 21명이 연화장으로 온다고 하네요
    슬픈 장면을 보아야하지만 그래도 찾아보렵니다
    오전 7시부터 시작해 오후 2시까지 들어온다고 합니다
    다녀와 소식 전하렵니다

  7.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04.23 09:24

    세월의 시간앞에 아픔은 늘 비껴갈 수가 없나 봅니다.

  8.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04.23 09:35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그것을 깨우치고, 발전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오늘의 우리 몫이겠죠..
    오늘 참담한 현장에 가시는군요..
    명복을 비는 저의 마음도 챙겨가주세요..

  9. The 노라 2014.04.23 10:09 신고

    제 감정이 요즘 슬퍼서 그런지 어제실을 보기만 해도 아프네요. ㅠㅠ

  10. Hansik's Drink 2014.04.23 10:32 신고

    다녀간답니다~
    알차게 오늘을 보내셔요~

  11.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좋은 곳을 보여주시네요. 발 보고 갑니다. ^^

  12. 카라 2014.04.23 10:57

    덕분에 좋은포스팅 잘보고갑니다~
    오늘도 힘내서 아자아자~ 파이팅~

  13. 발사믹 2014.04.23 11:07 신고

    한번 편하게 갈수 있는 거리이네요. 글 잘읽고 갑니다.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14.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04.23 11:24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1. *저녁노을* 2012.06.16 06:28 신고

    우리의 문화재...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말이죠.

    슬픈 사연 잘 보고가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2. 참교육 2012.06.16 07:42 신고

    역사를 파괴하는 사람들....
    역사가 보이는 사람의 눈에만 비치지요.
    무개념의 사람들은 지금 이시간에도 역사를 파괴하고 있답니다.
    남북통일이 아니라 남북간의 적대관계로 만드는...

  3. pennpenn 2012.06.16 07:54 신고

    산성의 규모가 꽤 크군요
    토요일을 편안하게 보내세요~

  4. 날아라뽀 2012.06.16 10:18 신고

    소중한 문화유산 잘지켜야 하겠어요^^

  5. 주테카 2012.06.16 21:42 신고

    덕주산성 복원이 엉망이네요.
    분명히 문 주변의 성돌도 다른 성벽과 마찬가지로 쌓여 있을 텐데
    조선 후기의 양식으로 쌓았군요.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황후가 태어날 만한 기가 응집된 곳

 

명성왕후 생가를 돌아보다가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생가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행랑채와 곳간, 측간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솟을대문 안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중문에 연결되어 대청과 방으로 연결된다. 헛간을 두고 꺾여 중문채를 두었다. 중문과 사랑채, 중문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배치가 되었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 곳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안채와 중문채 사이에 일각문을 두어 별당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명성황후 생가를 출입구는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중문 곁에 붙은 사랑채의 마루가 된다. 일직선상에 놓인 대청은 솟을대문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이 바람을 막는 것을 피해, 솟을대문과 마루를 일직선상에 놓아 바람이 맞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으로 연결이 되며 마루에 안으로 문을 내어 바람이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문은 사랑채의 마루에 붙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나 있다. 이 중문 안에 방과 헛간은 청지기가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과 안방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중문을 들어가 방과 헛간, 부엌을 지난 후 ㄱ 자로 꺾여 있으며 대청과 건넌방, 곳간으로 마련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건넌방이다.

 

 

대청을 지난 건넌방은 안채의 대청보다 높은 마루가 앞에 있다. 그리고 그 마루 밑에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이 건넌방은 솟을대문과 샤랑채의 마루, 그리고 건넌방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바로 이 기가 모이도록 지은 집안의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좁은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기능성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랑채와 중문채를 이어서 구성한 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반가의 집과 같이 집을 띄엄띄엄 지은 것이 아니고, 오밀조밀하니 붙여지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평지와 작은 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편에 있는 구릉에 막히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형태의 집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여유를 보이는 별당채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이 이어지는 곳에 일각문을 통해 별당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별당채는 명성황후가 8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별당채는 안채와 사랑채보다도 넓은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을 드나드는 문은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에 연결한 일각문과,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있다.

 

그런데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장에 연결된 일각문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다. 별당채는 안채보다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그런데 행랑채의 끝에 있는 초가로 만들어진 측간 곁에 별당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내었다는 것은, 우리 전통가옥의 구조상 어긋난다는 생각이다.

 

 

 

별당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이 별당채도 1995년 복원이 되었다. 별당채는 매우 간결하게 꾸며져 있다. 별당채는 정면 세 칸으로 좌측의 한 칸은 방으로, 우측의 두 칸은 대청으로 꾸몄다. 방과 대청의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의 문은 들어 올리게 되어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추운 계절에는 문을 닫아 보온을 하였다. 대청의 뒤는 판자문으로 막았는데, 대청 끝 우측 벽을 창호를 내어 멋을 더했다. 어린 소녀가 이곳에서 자라, 한 나라를 뒤흔들만한 역사의 중심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굴뚝이 없는 거북등 연도와 부엌의 비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이상한 점이 있다. 연도는 있는데 굴뚝이 없다.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굴뚝이 없다. 대신 거북이가 웅크리고 앉은 듯 한 연도가 있다. 안채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 집은 굴뚝을 세우지 않고 연도를 뺀 듯하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우연히 이 집을 복원할 때 일을 맡아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복원을 할 때 안채의 부엌바닥을 조금 고쳤다는 것이다. 어째 옛 모습 그대로였다면 조금은 더 깊어야 할 부엌바닥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엌바닥은 조개무덤이 생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조개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바뀐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복이라고 하셨다. 많은 집들이 보수를 하면서 이런 조개무덤이 사라졌다.

 

 

부엌이 깊어야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방에 불을 때고 음식을 조리하려면 부뚜막이 있어야 하고, 그 부뚜막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방을 데우게 만든다. 그러려면 부엌의 아궁이가 깊어야 불길이 위로 잘 솟아 방이 빨리 뜨듯해진다. 아마 바닥 정리를 하면서 조금 돋은 듯 하다. 고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옥의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다.

  1. 익명 2012.04.04 08:20

    비밀댓글입니다

  2. ecology 2012.04.04 09:54 신고

    역사적인 장소 잘 보았네요
    행복한 하루되세요

  3. 라이너스™ 2012.04.04 10:28 신고

    듣고보니 왠지 상서로운 기운이 어린듯.^^
    멋진 탐방 잘보고갑니다.

  4. mami5 2012.04.04 18:07 신고

    굴둑없이 거북등같은 연도가 신기하네요..
    부뚜막하니 어릴적 부억 부뚜막에 걸터 앉아
    만화책읽다 엄니께 혼난적도 있는데..ㅋㅋ
    덕분에 잘 보고갑니다..^^

승광재. 조선의 황손인 이석씨가 사는 곳이다. 한옥마을 최명희 문학관 인근에 있는 승광재는 2004년 8월 경에 지어진 집이다. 이곳은 조선황실의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가 거주를 하고 있으며, 전통예절을 가르치는 설예원과 함께 있다. 현재 전라북도 도지사인 김완주 지사가 전주시장으로 재직시 이 승광재를 지어 이석씨를 머물게 했다는 것이다.

승광재는 한옥마을의 한편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긴 흙담 사이로 난 골목 안에 일각문이 보이고, 그 문 위에는 ‘승광재’라는 현판을 걸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는 설예원이 있고, 우측으로는 ㄷ 자로 꾸며진 승광재가 자리한다. 승광재는 ㄱ 자 집 두 채를 연결해 ㄷ 자로 꾸민 집이다. 승광재에는 황실 사람들의 사진과 황실에 관련된 내용들이 진열이 되어있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보다.

내가 황손 이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0월 8일 명성황후 생가에서이다.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를 생가 마루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올해로 벌써 70세인 이석 씨는 한 때 가수로도 활동을 했으며, 터전을 잡지 못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황제의 손이고 아버지는 의친왕이다. 하기에 명성황후는 이석 씨의 할머니가 된다.


지난 해 명성황후 생가에서 만나 황손 이석씨. 그리고 현재 한옥마을의 승광재

황손 이석 씨는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사동궁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결국 궁에서 나오게 되고, 대한제국이 막을 내리면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전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5공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곳에서도 쫓겨나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단다.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는 황손 이석 씨였다. 한 낮에 찾아 든 승광재에는 문이 닫힌 채 나그네들만 왁자하니 집안을 돌아보고, 예절을 배우러 온 아이들인지 소리를 치면서 뛰어다닌다.

요즈음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는 사극을 보면서, 만일 일본과의 그런 개탄스런 과거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찌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승광재가 조금은 남다른 집일 것만 같다. 오래된 고옥도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서 조용하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그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끄럽게 만든다. 그 한편에 숨을 죽이듯 엎드려 있는 승광재를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승광재와 설예원(아래)

오늘 황손의 집은 낯이 설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도 결코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래도 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고맙다는 황손의 말을 되새겨본다. 글쎄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늘 한옥마을 한 끄트머리에서 만난 황손의 집에서,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이다.


위는 영조의 가계도, 아래는 고종황제의 가계도(전단지 전사)

  1. *저녁노을* 2010.09.10 15:10 신고

    편안하고 인자하신 모습같습니다.ㅎㅎ 잘 보고 가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09.10 16:03

    편온한 모습이 참 좋네요..^^
    가수로도 활동을 하셨군요~
    누리님~지금은 뭐하시나요?^^
    주말 잘 보내세요^^

  3. 빛이 드는 창 2010.09.10 16:56

    비둘기집을 부르셨던 분인가요?
    가계도를 이렇게 보니 새롭네요.
    전주도 한 번 가보고 싶네요.

  4. 이그림 2010.09.10 18:31

    참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가수로 데뷔도 할 정도로 개성있는 분이시고 아까운 분이셔요..
    인물도 좋고.. 여길 다녀 오셨군요
    비가 계속 내리네요
    옥수수 안주삼아 막걸리 한 잔하면 좋겠죠.. ㅎ

    주말 건강하세요~~

  5.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09.10 18:34

    가계도까지 정리해 주시는 수고 ..감사해요^^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6. 황실의 후손이라 느껴질만한 부분이 전혀 없음이 안타깝네요.
    비록 만들어진지는 6년째이지만 승광재가 오랜 시간 보존되길 바래봅니다.

    • 온누리49 2010.09.10 21:23 신고
      댓글 주소 수정 및 삭제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든 궁의 한 곳이라도 들어가 살아야 하는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단 생각이고요

  7. @파란연필@ 2010.09.10 19:52 신고

    평소 조선왕조 계보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이렇게 잘 정리가 되어있군요...
    마지막 황손께서 아직 살아계시다니.... 저도 한번 찾아뵙고 싶어지네요...

  8. 비바리 2010.09.10 20:00 신고

    황손께서 참으로 인자하게도 생기셨네요...
    70연세가 믿기지 않을정도세요..

    황손께서 머무르는 집을 보니..그저 마음이 착잡하네요
    그래도 편히 쉴 수 있는 최고의 집이 아닐까 생각하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9. 익명 2010.09.10 20:53

    비밀댓글입니다

  10. 정암 2010.09.10 21:05 신고

    전주에 내려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집을 본것을 처음입니다.
    집이 조금 낮게 지어졌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11. 익명 2010.09.10 21:27

    비밀댓글입니다

  12. 익명 2010.09.10 21:36

    비밀댓글입니다

  13. 박씨아저씨 2010.09.10 22:23

    아주 정정해보이시는데요~ 기품도 있어보이고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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