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잘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시쳇말로 백 없고 돈도 없고, 거기다가 줄도 없으면, 그야말로 세상살이가 힘들어진다. 가끔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씁쓸한 때가 있다. 넓은 평수에 사는 사람들이, 임대주택의 아이들과는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소재한 궁집.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아마도 화길옹주가 이곳으로 시집을 왔을 때, 시비들이 이곳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또한 능성위 구민화의 집에도 아랫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궁집 옆으로 초가가 한 채 보인다. 바로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집이다.

 

 

신분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초가

 

하지만 궁에서 따라 나온 시비들이나, 마름 등은 이 초가에 묵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궁집 안에도 행랑채가 있어, 마름들이나 궁에서 나온 시비들은 그곳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보다 신분이 낮은 머슴이나 종들이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

 

궁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묵었다고 전하는 이 초가는, 궁집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집도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이 초가는 현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옛 고택들 중에서도 특히 초가의 경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퇴락해 버리고 만다. 이 초가 역시 많이 훼손이 되었다.

 

 

 

 

연륜을 알 수 있는 주변의 경관

 

궁집의 하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초가. 주변으로는 꽤 오래 묵은 듯한 나무들이 서 있어, 이 집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초가는 ㄷ 자 형으로 되었다. 앞으로 사랑채를 놓고, 그 중간에 대문을 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ㄴ 자의 꺾인 부분에 대청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드렸다.

 

이 초가는 일반적인 초가와는 조금 다른 형태로 꾸며졌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편에 방에 불을 때기가 편하도록 깊게 골을 파서 연결하였다. 한 사람이 양편에 불을 한꺼번에 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는 방을 드렸다. 아마도 초가의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이 초가에 살던 사람들이 신분이 낮았으니, 아랫사람을 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양편의 방을 일꾼들이 사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의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아 주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의 특이한 구성, 머슴들이 생활한 집인가?

 

사랑채에 비해 안채는 간결하게 꾸며졌다. 사랑채에 붙여 ㄱ 자로 지은 안채는 작은 방 하나를 놓고 부엌과 안방을 드렸다. 안방은 뒤로 물려 앞을 마루를 놓았으며, 꺾인 부분에는 넓은 대청을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을 드렸다. 이런 구조로 볼 때 이 초가에는 주로 일을 하는 머슴들 위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일반적인 중부지방의 초가와 다름이 없지만, 그 집의 구성으로 볼 때는 상당히 특이한 형태인 초가. 부엌 뒤편으로는 장독을 놓았으며, 사랑채를 맞물려 안채의 뒤편으로 연결이 될 수 있도록 담장을 둘렀다.

 

 

 

 

사람이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재신이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집의 형태. 그런 집들을 돌아보면서 참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7월 17일에 찾아간 남양주시 평내동의 궁집.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해가 저무는 12월 22일은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冬至)’이다. 동지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집의 여기저기에다가 뿌린다. 한 마디로 모든 잡귀들이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잡귀들은 붉은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런 풍습이 전해진다. 아마 팥죽을 한 그릇 먹는 것도, 알고 보면 내 몸 자체를 잡귀에게서 보호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아우한테 가니 동짓날 팥죽 쑬 것을 미리 준비를 한다고 장을 보러 나간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집에 찾아오니, 적잖이 팥죽을 끓여대야 할 것이다. TV를 보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꾼’이란 단어 생각이 난다. 어째 갑자기 ‘꾼’이란 말이 생각이 날까. 아마도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정치인들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국어사전에서 ‘꾼’이란 말을 찾아보았다.


‘꾼’은 나름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

<꾼>이란 [명사]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 그래서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을 ’누리꾼‘이라고 하는 것인지. 그런데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즐기면서 하는 사람이란 뜻이란다. 누리꾼이란 결국 ’누리‘와 ’꾼‘의 복합어인 듯. 그 뜻이 인터넷 안에서 못 갈 곳이 없으니 ’온누리‘를 다닌다는 것인지, 아니면 즐긴다는 것을 ’누린다‘로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다. 워낙 어휘력도 부족한 내가, 국문에도 문외한이니 말이다.

기실 과거부터 많은 ‘꾼’이란 밀을 사용했다. ‘꾼’이란 자신이 즐기면서도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공유한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고 늘 생각을 한다.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그 즐거움을 남들과 공유를 하고, 나름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꾼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많은 꾼들은 나름대로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이런저런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 농사꾼 /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꾼들은 농사를 지어 나만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다. 예전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농사소리에 보면 ‘이 농사를 얼른 지어 나라님께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선영봉제 마친 후에 처자권속 배불리세’라는 사설이 있다. 즉 농사꾼이란 단순히 나만 잘 먹는 것이 아니고, 나와 이웃, 그리고 나라까지 걱정을 했다.

○ 장사꾼 / 장사를 한다는 것은 이문을 남기기 위해 한다. 하지만 그 이문을 그냥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이문을 남겨 생활에 보탬을 주지만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날라다 주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이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 풍물꾼 / 풍장을 치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전문적인 기예를 펼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도 자신의 기예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함께 즐김이라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자신이 노력을 하여 갖게 된 예인으로서의 능력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줌으로써 함께 공유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춤꾼, 소리꾼 등 다양한 예능의 전문가 집단이 있다고 하겠다.

○ 상여꾼 / 출상을 할 때 상여를 메는 사람들을 말한다. 예전에는 영구차로 씽~ 하고 장지로 가는 것이 아니고, 꽃상여를 만들어 여러 사람이 상여를 메고 상엿소리에 발을 맞추어 장지로 향하고는 했다. 이 안에 발을 못 맞추는 짝발이라도 있으면 곤란을 당한다. 이렇게 마음을 합하여 상여를 메는 사람들을 상여꾼이라 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선소리를 하는 사람을 ‘향두꾼’이라 한다. 이 향두꾼은 한 마디로 상여꾼을 인솔하는 지도자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꾼이란 참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정말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자꾸만 날 괴롭힌다. 꾼이란 다 좋은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꾼도 있기 때문이다. 사기꾼도 있고 훼방꾼도 노름꾼도 있기 때문이다.

꾼에도 종류가 있어

‘사기꾼’을 찾아보니 [명사] ‘사기를 일삼는 사람. 사기사(詐欺師). 사기한(詐欺漢)’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사기란 남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사람이란 뜻이다. ‘훼방꾼’이란 남의 일에 훼방을 놓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좋은 꾼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노름꾼’이야 노름에 미쳐 가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이니 오죽하리오.

그러고 보면 ‘누리꾼’ 중에도 같은 이름을 갖고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남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 즐거움을 주며, 양식이 될 만한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누리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유 없이 남을 비방하고 폄하하면서, ‘카더라’ 식의 글을 적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쁜 누리꾼>에 속할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은 스스로가 판단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같은 이름을 가진 ‘꾼’이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정치꾼’이다. 정치꾼이란 그야말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흔히 ‘정치인’ 혹은 ‘정치가’라고 표현을 하지만, 이들이 좀 더 전문적인 집단으로 승화를 하기 위해서는 ‘인(人)’보다는 ‘꾼’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꾼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니,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표현을 한다. 예를 들어 사전에서 농사꾼을 찾으면 ‘농사짓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표현을 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꾼’이 필요해

이 ‘정치꾼’은 사전에 ‘정치가를 낮추어 이르는 말, 정치에 관계되는 일에 빠지지 아니하고 꼭 참여하는 사람’.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정치꾼이란 ‘정치를 해서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들의 권익보호와 복지를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런 전문가’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아무리 보아도 이 정치꾼들이 국민을 위해 노력을 하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잘 먹고 아전인수 격인 주장만 하면서 국민들을 내동댕이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심상치가 않은데, 그런 내용을 속속들이 모르니 더욱 답답한 일이다.

내년에 총선이 있다. 여야가 모두 새판 짜기를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등을 돌린 지가 오래이다. 이젠 지금까지의 그런 구태한 모습들을 보여서는 국민들의 눈길을 받기가 쉽지가 않다. 이제는 정말로 국민들을 위한 그런 전문적인 ‘꾼’이 필요할 때이다. ‘싸움꾼’이나 ‘난동꾼’이 아닌, 국민을 위하는 그런 듬직한 즐거움을 주는 ‘꾼’ 말이다. 동지 팥죽 생각을 하다가말고, 별 생각을 다 한다. 아마도 동지팥죽을 들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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