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팔각형으로 조성한 간결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충주 미륵대원지 석등(忠州 彌勒大院址 石燈)’은 월악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보물 제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과 버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의 중간에 놓여 있는 석등이다. 한 겨울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미륵대원지. 그곳에서 만난 석등은 그저 아무런 밀도 없이 그렇게 눈 속에 파묻혀 있다.

 

미륵대원지 석등은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 , 하로 이루어진 3단의 받침을 마련했다. 받침 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기둥은 적당한 높이에 간결한 모습이다. 위받침돌에는 아래받침돌과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면에 창을 내었으며,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려졌다. 꼭대기에는 8각의 낮은 받침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마의태자가 조성했다는 미륵대원지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함께 서 있는 석불입상,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오측석탑을 중앙에 두고 양편에 석등이 서 있다.

 

 

이 두 개의 석등은 사각 석등과 팔각 석등은 모두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미륵대원지를 처음 석굴사원으로 보성할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석등은 간결하지만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마도 석등에 쌓인 눈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계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하기에 문화재 답사는 사계절을 다 돌아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문화재는 여름철에 더 아름답고, 또 어느 문화재는 겨울철에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 미륵대원지야 말로 겨울철에 가야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한 겨울에 눈 속이 묻힌 석등을 바라보면서 다음에는 봄철에 이곳을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인 미륵대원지. 1982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발굴한 바 있으나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고, 발굴 당시 미륵대원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대원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일연 스님이 살았던 그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 고려 초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발굴 당시 출토된 관련 유물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미륵대원은 고려초기인 11세기경에 창건되었다가, 고려후기인 고종 때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석굴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5층 석탑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317호로 1987710일 지정되었다. 이 미륵대원지 내에는 보물 제95호인 5층 석탑과 제96호인 석불입상이 있고, 그 외에도 충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19호인 석등과 33호인 3층 석탑 등이 남아있다. 이 곳에는 고려시대의 석불과 석굴이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쪽에 석등과 더불어 보물 제95호로 지정된 충부 미륵리 오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대원 5층 석탑의 하층 기단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네모난 돌로 조성을 했다. 특별하게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그 위로 기단의 맨 윗돌이 올려져있다. 탑신은 1층 지붕돌인 옥개석만 2장일 뿐, 나머지 몸돌이나 다른 지붕돌은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몸돌의 넓이에 비하여 좁은 기둥인 양우주를 모서리에 새겼다.

 

 

옥개석인 지붕돌은 급격하게 좁아져 석탑 전체의 균형과 미관을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지붕돌의 밑면의 받침은 5단이지만,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처마는 수평이고 지붕돌의 경사는 매우 급한데 귀퉁이는 거의 위로 치켜져 있지 않다.

 

철간이 남아있는 미륵대원 5층 석탑

 

미륵대원 5층 석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인 복발이 남아 있다.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게 조성하였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 모양의 찰간이 남아있다.

 

5층 석탑은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비해,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을 보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탑은 신라가 망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태자사 신라 석굴암을 따라 조성한 석굴불상으로 조성한 앞에 세운 고려 초기의 탑이라는 것에 비중을 둘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갔던 충주 미륵대원지. 눈이 쌓인 석조물들의 정취가 더 없이 고풍스러워 보인다. 한 겨울에 답사를 하는 이유는 여름철에는 볼 수 없는 이러한 또 다른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의태자가 세웠다고 전하는 충주 미륵대원지. 아마도 그곳에서 마의태자는 망해버린 신라가 안타까워 모든 설음을 잊고자 미륵세계가 올 것을 간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2-3에 소재한 사적 제317호는 충주미륵대원지이다.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사지이다.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 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 사원터로 밝혀졌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미륵대원지에는 보물 제96호인 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5층석탑, 그리고 충북 유형문화재인 석등과 당간지주, 삼층석탑, 귀부, 사각석등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각형으로 조형이 된 석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로 지정이 된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317호로 지정된 미륵대원지 안으로 들어가면 오층석탑 앞에 위치한다. 이 사각석등은 크게 기단부와 화사석, 그리고 위에 올린 옥개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원래는 평면 사각형의 판석형 석재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벌써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아왔다. 그동안 이름도 바뀌고 비지정으로 남아있던 석조물들이 지정문화재로 바뀌기도 했다. 사각석등의 형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미륵대원지에는 또 하나의 석등이 있아. 오층석탑을 가운데 두고 양편에 석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화형문양으로 장식을 한 간주석

 

하대석은 투박한 복판 연화문을 장식했다. 연화문은 대형으로 새겨져 있지만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지 못하고,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대석 상면에는 사각형의 홈을 마련하여 간주석을 끼워 고정하도록 했다. 간주석은 평면 사각형의 석주형으로 마련되었다. 표면에는 보주형 안상이 새겨지고, 그 안에 좌우대칭을 이루는 화형 문양이 새겨 장식하였다.

 

상대석은 하부에 앙련을 표현하였는데, 하대석에 비하면 비교적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연화문은 복판으로 각 면이 가운데 배치된 연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나가는 형상으로 표현되어 하대석과 대조를 이룬다. 화사석은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도록 했다.

 

특이한 화사석의 결구수법

 

옥개석은 하부를 수평으로 치석하고 관통된 원공을 시공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내려오고 있으며, 상륜부는 현재 사각형 받침대가 올려 져 있고 나머지 부재들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간주석과 화사석은 독특한 치석 수법을 보여주고 있어 특이롭다.

 

미륵리 사각석등은 전형적인 석등 양식에서 다소 벗어난 이채로운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화사석은 고려시대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이었다. 이러한 화사석은 고려시대 개경 일대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륵대원지의 사각석등에서 보이는 화사석의 결구수법의 석등으로는, 관촉사, 현화사, 개국사 석등이 있다. 대부분 고려 초기와 중기에 걸쳐 건립된 석등으로 특정 사찰에서 만 적용된 석등 양식이다.

 

눈이 발목까지 쌓여 걷기조차 힘든 날 찾아간 충주 미륵대원지. 비록 눈에 빠지고 미끄러지며 답사를 마쳤지만, 그래도 한 곳에서 많은 문화재를 만났다는 행복이 더 깊었나보다. 남들이야 그 행복을 알 수 없겠지만, 30년 세월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난 사람에게는 이보다 즐거움은 없을 듯하다.

나무 한 그루가 나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한 두 번 본 나무가 아니지만, 그 나무 앞에만 서면 난 늘 작아지고는 한다. 그 나무의 위용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그 나무의 연륜 때문이다. 1100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서 지난 세월의 역사를 보고 있었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수령을 지니고 있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은행나무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여러 가지 약재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다. 또한 열매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나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 최고령의 은행나무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11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나무의 수고는 42m, 밑동의 둘레는 15.2m 정도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많은 은행나무 가운데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이 나무를 따를 것이 없다. 또한 줄기 아래에는 커다란 혹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다섯 번째인가 만난 것은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8월이었다. 용문사 진입로 앞에 차를 대놓고 천천히 빗길을 걸어 들어간다. 차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용문사는 굳이 그럴 생각이 없다. 그저 걷기만 해도 주변 경관이 뛰어나 즐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굳이 차로 가도 될 것 아니냐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그리 넓지도 않은데 차로 이동을 한다면 죄스럽기 때문이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일설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난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에 무게를 둔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많은 전설 가운데는, 고승들이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그리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고승이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지만, 그 지팡이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무가 되었다는 설은 조금은 황당하기 때문이다.

 

당상관 품계를 받은 은행나무

 

그밖에도 용문사 은행나무에 대한 설화는 많다. 누군가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며, 1907년에 일어난 정미의병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은행나무가 소리를 내어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행나무가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면 울었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충남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도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우리나라 곳곳에 전하고 있다. 하기야 10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니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을 수밖에.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 때 정3품 벼슬인 당상관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졌다. 나무가 이렇게 벼슬아치가 된 것은 보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 소나무도 있다. 나무도 벼슬을 줄 수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 이런 것만 보아도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정리하면서 올해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진설명 1. 비오는 날 만난 용문사 은행나무

2. 용문사 경내에서 바라 본 은행나무

3. 은행나무의 밑동

4. 중간 갈래로 뻗은 즐기

5. 가을철 단풍이 든 은행나무(문화재청 사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 소재한 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불입상.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이상하게 깊은 겨울, 그것도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이곳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이 미륵리 석불입상을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석불입상을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거대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개석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이용해 거대 석불입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북향을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와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후,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도 전한다. 마의태자는 덕주산에 있는 덕주공주가 새긴 마애불과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석불입상은 석굴식 전각 안에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이 미륵입상이 서 있는 좌우와 뒤편으로는, 거대한 돌들을 이용한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앞과 위로는 목조로 된 전각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타버렸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가 고려 초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거대석불의 특징을 보이는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그 전체적인 조형은 투박하다. 신라의 석불처럼 섬세한 면은 떨어진다. 머리에 쓴 옥개석은 팔각형이며, 육계는 나발이 있다. 양귀는 큼직하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를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으로 하였으며, 눈은 가늘게 반개를 해 감은 듯하다. 코는 우뚝한데, 인중이 짧아 입과의 사이가 멀지 않다. 입술은 두툼하고, 목은 굵게 표현해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안면의 코와 입이 가깝게 표현한 것은, 멀지 않은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석탑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얼굴과 흡사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처리를 했는데, 옷 주름 등은 모두 약식으로 처리되었다. 얼굴을 중점적으로 공을 들여 조성을 한 것에 비해, 나머지 부분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은 발끝까지 통으로 되어, 굴곡이 없이 조각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의 공통적인 점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미륵리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미륵리 석불의 팔의 모습도 형체만 겨우 살렸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복부 위에 대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석불의 조성한 내력으로 보아 무엇인가 간구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누가 조성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이 석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전문적인 석공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견줘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어깨 위 부분과 그 아랫부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깨 위의 돌은 흰색을 띄고 있는데 비해, 아랫부분의 돌은 검은색이 많이 나타난다. 6개의 돌을 쌓아 조성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큰 거대석불을 조성할 때도 일석, 혹은 이석 정도로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을 처음으로 조성한 사람이 마의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뒤편에 만든 석굴의 형태도 그렇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석굴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의태자가 이 석불입상을 조성했다고 하면, 석굴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의태자 조성설에 무게를 두어

정확한 문헌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진 마의태자의 조성설(造成說). 마의태자는 신라의 부흥을 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휘가 김일이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불린다. 이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길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충주를 거쳐 원주를 지나 인제 설악산 기슭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 지리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현재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인 미시령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이고 남쪽은 설악산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마의태자가 충주에 도착하여 미륵대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다. 이런 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일행이 따르고 있었으니, 그 중에 석공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석굴암을 따른 석굴을 조성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또 하나 석굴암에 조성된 본존불은 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다. 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백색인 이유는 그런 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의 이 지역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건립한다고 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연 중앙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석공들이 아닌 향리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년대나 조성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미륵리 석불입상. 그런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륵입상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젠가는 이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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