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장맛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뿌려댄다. 일기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꽤 많은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주에 볼일을 보아야하니, 후줄근하지만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은 했지만 이 빗길에 어찌해야 할지.

몇 곳을 들려 당동 당산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거창 가조면 소재지에서 가북면 방향 지방도 1099호 선을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사병리 당동마을이 나온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당산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인에게 그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몇 분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마을 뒤편에 자리한 당산을 찾았다.



당산은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거처

‘당산(堂山)’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당산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일제치하에서 문화말살정책을 편 것도, 그 한편에는 당산이 갖는 공동체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당산에 모여 정성을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끈끈한 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다산을 기원하던 곳인 당산. 그 당산에서 이루어지는 기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당산은 우리의 마음의 거처이기도 했다.

당동마을 당산을 찾아가다

비는 잠시 멈춘 듯하다. 그러나 논둑길에 자란 풀들이 다리를 휘감는다. 빗물에 젖은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니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돌담을 쌓은 안에 작은 집 한 칸이 바로 당동마을 당집이다. 옆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라도 되는 듯.

당동마을 당산제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숱한 세월을 당동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를 잡아 온 것이다. 이 당산은 철종 9년인 1858년과 고종 15년인 1878년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1858년에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동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하루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제관을 정한다고 한다. 보름이 되면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산, 금귀봉, 박유산, 장군봉의 산신께 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제를 올린다. 당동 당산은 경남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당산을 만나 마음을 내려놓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당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어본다, 한 칸 남짓 돌과 흙으로 지어진 당집 주변에는 금줄이 여러 겹 쳐져있다. 이 당동 당산제에서는 닭피를 뿌린다고 한다. 당집 안에는 간소하다. 벽에 걸린 선반에는 ‘당사중수기’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밑에는 촛불과 향을 피웠던 그릇들이 있다. 당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 주민들만 아니라 아마도 무속인들도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 것인지. 소나무 가지와 금줄에 오색천에 걸려있다. 당집을 찬찬히 돌아본 후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 한 자락 이곳에 내려놓고 가고 싶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는 당동마을 당산이다. 그 안에 마음 하나두고 빗길을 돌아선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국도변을 지나다가 보면,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 같은 이 소나무는, 수령 400년이 지난 천연기념물 제426호 대하리 소나무이다.

대하리 소나무는 반송의 일종으로 그 줄기가 마치 용이 뒤틀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2개의 우산을 맞대어 놓은 것 같다는 대하리 소나무. 그 모습은 여느 소나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26호 대하리 소나무

마을의 수호신이었으나 이제는 시들해

대하리 소나무는 높이가 6m, 가슴 높이의 둘레가 3m가 넘는다. 가지는 동서로는 15m 정도에 남북으로는 20m가 넘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보니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오랜 세월을 지나다가 보니 그런 세월의 아픈 상처가 생기는가 보다.

대하리 소나무는 주변에 황희선생의 영정을 모신 장수황씨 종택사당과 사원이 있어, 마을 이름을 ‘영각동’이라 불렀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과 가내의 안녕을 기원하는 영각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소나무 잎에 돌이 음식을 진설하는 지석이었다.

소나무의 앞을 보니 제단으로 사용했을 지석이 보인다. 사람들이 그동안 이 소나무를 얼마나 정성을 다해 위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영각동제도 중단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변하면 사람들도 그러한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주인의 마음이 2세를 키우고 있어

소나무를 찍으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식당에서 한 분이 나와 제지를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대하리 소나무가 있는 대지의 주인이란다. 소나무야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하는 것이지만, 이 땅의 주인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 분이 주인이 되는 셈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을 찍는다고 소나무를 해칠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대하리 소나무는 반송의 일종으로 마치 용이 뒤틀고 있는 형상이다.

미처 이야기를 하지 못했음을 사과를 하고,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소나무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소나무로 인해 주변 정리를 함부로 할 수도 없어서 많은 불이익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러다가 따라오라고 하여 건물 뒤로 따라갔더니, 작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바로 천연기념물인 대하리 소나무의 2세라는 것이다. 그저 지정만하고 아무 대책도 세워놓지 않아, 수령이 많아 죽어간 나무들을 보아온 터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는데, 대하리 소나무는 2세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제법 큰 나무들도 보인다.


수술을 안 부위가 안에서 썪어가고 있다고 한다.
식당 건물 뒤편에 자라고 있는 대하리 소나무의 2세들.

나무가 상해 잘라내고 외과수술을 한 곳이 드러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 이렇게 방치를 할 수가 있나 싶었는데, 그나마 2세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수많은 천연기념물들이 훼손이 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성을 드리고 있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탁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오랜 시간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정해진 일정 때문에 소나무를 뒤로한다. 매번 상처를 받아 돌아오는 답사 길이었는데, 모처럼 찡그리지 않는 날이었던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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