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 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대동굿이다. 도당굿이란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위해 매년 혹은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 초나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1990년 10월 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경기도당굿은 다른 지방의 도당굿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무당인 화랭이들이 굿을 맡아서 한다. 도당굿에서 나타나는 음악과 장단도 판소리기법을 따르고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고 전통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원이 전승지인 경기도당굿

 

경기도당굿은 처음 지정이 될 당시 화랭이인 고 조한춘과 무녀인 고 오수복이 기예능보유자로 지정이 되었다. 지정 당시 도당은 부천 장말에서 연희를 하였으며, 수원에서는 평동과 거북산당(영동시장 안), 고색동 당에서 굿이 이루어졌다. 무녀로 지정이 된 고 오수복이 수원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 전승지가 수원이 되었다.

 

 

고 오수복 보유자에게서 그동안 굿거리 제차를 배운 이수자들은 상당하다. 이들은 주로 무녀들이 맡아하는 시루도듬이나 부정굿, 제석굿, 군웅굿 등을 익혔으며, 고 조한춘 보유자에게서 화랭이 굿제를 익힌 화랭이들은, 조한춘의 아들인 조영국이 맡아서 연희를 담당해왔다.

 

오수복 보유자 생전 당시 음악을 맡아하던 전수조교는 고 방돌근이 있었다. 고 방돌근은 음악과 장단 문서(굿의 사설) 등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개인무대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경기도당굿을 이어간다.

 

당시 고 오수복 보유자에게서는 무녀제 굿을 익히고, 고 방돌근 전수조교에게서는 장단과 문서 등을 전수받은 승경숙(도당굿 이수자)이, 경기도당굿의 명맥을 잇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이수자 승경숙은 현재 팔달구 인계동에 전안(무당들이 신을 모셔 놓은 곳)을 차리고 있으며, 전수생들의 강습은 오산시 원동 마등산 아래 역말굿당에서 하고 있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에게 소리와 장단, 춤사위 등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더욱 주택가에서는 이렇게 큰 소리를 내어 사설을 익히고, 장단을 치는 등의 학습방법은 주위로부터 눈총을 받아야 한다. 이런 강습의 특성 때문에 인적이 없는 굿당을 택했다는 것이다.

 

오산시 원동에 소재한 역말굿당은 현재 마등사라는 명칭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 이곳은 경기도당굿 남부지부(오산시지부)로 등록이 되어있으며, 현재 4기 전수생을 가르치고 있다. 4기생은 모두 16명 정도가 학습을 하고 있으며, 수원과 오산 등에서 배우러 오고 있다고.

 

경기도당굿은 위엄이 있어

 

6월 3일(일) 경기도당굿의 학습을 하는 전수생들을 가르친다는, 오산시 원동 역말굿당을 찾았다. 입구에서부터 무가와 장단을 연습하는 소리가 마등산 자락에 넘실거린다. 10여 명의 전수생들이 저마다 장고를 앞에 놓고, 사설이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아직 4기생이 전수를 시작한지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전수생들과 이야기를 해보았다. 수원 팔달구 인계동 550-83번지에 ‘애기씨당’이라는 전안을 차려놓은 전수생 최남수(여, 35세)는 이제 신내림을 받은 지 6년 밖에 안 되었단다. 23세부터 이미 신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림굿을 한 후, 굿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경기도당굿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저는 이제 2개월 정도 되었는데, TV 등에서 만날 이북굿이나 덩덩 뛰는 굿만 보다가, 경기도당굿을 보고 저 굿을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경기도당굿은 딴 굿과는 달리 무가도 판소리기법으로 하는 것을 보고요. 도당굿은 위엄이 있고, 무게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우아하다고 할까요.”

 

오산시 원동에 거주한다는 전수생 강봉임(여, 40세)은 화장품 가게부터 별별 것들을 다해보았다고. 그러다가 신을 받은 지 12년이 되었다고 한다.

 

“신내림을 받고나서 창이나 배우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마침 이곳에서 경기도당굿을 가르친다고 해서 3기 전수생으로 등록했어요. 이제 8개월 정도가 되었는데, 아주 조금은 도당굿에 대해서 알 것 같아요. 도당굿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우리지역의 굿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아직은 도당굿의 진수를 잘 모른단다. 하지만 그 매력에 푹 빠져있다는 전수생들. 올해는 도당굿 정기공연에도 참석을 했다고. 고 오수복 보유자 사망이후 자칫 맥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한, 경기도당굿의 맥은 이수자 승경숙에 의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해동은 대한국이요 경기도는 삼십칠관 마련하여

광화는 일품이요 광주는 이품

수원은 정삼품이요 안산은 군수수령 내명은 부사또라

 

10월 8일 오후 7시, 오산시 마등산 자락에 자리한 역말굿당 한 편에서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장단을 치면서 부정무가를 부르고 있다. 경기도당굿 중, 굿을 시작하기 전에 거리부정에서 부르는 무가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 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하는 마을굿이다. 도당굿은 매년 또는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 초나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현재의 경기도당굿은 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지역에 전해져 오는 마을굿으로, 지금은 부천의 장말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경기도당굿을 볼 수 있다.

 

 

 

경기도당굿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나,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3일씩 거행이 되던 경기도당굿

 

대개 마을의 도당굿은 오전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에 끝이 난다. 하지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부지역에서는 3일간이나 굿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굿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당굿을 영위하는 무격들은 집안으로 대를 이어 기능을 연마하고, 음악과 무용에 뛰어난 세습무들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세습무인 화랭이들은 남자무당으로, 줄을 타면서 재담을 늘어놓거나 재주를 보이면서 굿을 축제분위기로 이끈다. 예전에는 도당굿판에는 기생들의 소리와 춤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기, 예능적으로 뛰어난 도당굿의 제차

 

경기도당굿은 굿을 하기 전날 당주 집에서 벌이는 ‘당주굿’으로 시작한다. 다음 날 아침에는 당주집에서 굿당까지 올라가는 중간에, 길거리에서 부정을 가시는 ‘거리부정’을 친다. 요즈음에는 대개 강신무인 여무들이 주로 굿을 하기 때문에, 거리부정도 여무들이 많이 맡아서 하는 편이다.

 

굿당에 도착하면 주변의 잡귀잡신에게 시루를 먹이는 ‘안반고수레’, 굿을 벌일 장소를 정화하는 ‘부정굿’, 신대를 꺾어 든 마을의 대잡이에게 신이 내리면 당가리 앞으로 가 도당신을 모시고 굿청으로 되돌아오는 ‘도당모시기’, 마을의 장승과 공동우물, 원하는 집을 돌며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돌돌이’, 굿당에서 군웅마나님께 대취타연주를 올리는 ‘장문잡기’ 등으로 순서가 진행이 된다.

 

그런 다음으로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굿을 잘 받으셨는지를 알아보는 ‘시루말’을 한다. 시루말은 시루가 쉽게 들어 올려지는 가로 확인한다. 이어서 제석청배와 바라춤을 추는 ‘제석굿’, 군웅조상과 도당조상, 본향조상을 모셔서 집안의 평안과 자손번창을 축원하는 ‘본향굿’, 화랭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춤과 묘기를 보이는 ‘터벌림’, 손님인 마마신을 위한 ‘손굿’으로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경기도당굿에서만 볼 수 있는 화랭이와 무녀가 함께 군웅상을 마주하고 진행하는 쌍군웅춤인 ‘군웅굿’, 날이 밝아 도당신을 도당으로 다시 좌정시키고 돌아오는 ‘도당보내기’, 고깔과 장삼 차림의 화랭이가 놀며 동네축원과 영산수비를 풀어주는 ‘중굿’,에 이어, 굿판에 따라든 잡귀들을 풀어 먹여 보내는 ‘뒷전’으로 굿은 끝난다.

 

 

 

 

오산은 경기도당굿의 남다른 지역

 

경기도당굿은 음악과 장단도 판소리기법을 따르고 있어, 예술성이 뛰어나고 전통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산과 경기도당굿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것은 오산 부산리(현 부산동)에 재인청 3대 대도방의 가문인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대를 이어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오산 부산동에는 도당굿을 펼치던 당집이 보존되고 있으며, 이용우의 후손들이 살고 있기도 하다.

 

마등산 역말 굿당이란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 경기도당굿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경기도당굿 이수자인 승경숙(여, 57세)은

 

“그동안 경기도당굿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굿거리 제차임에도 불구하고, 전승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안타까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당굿을 전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죠. 3년 전부터 1기생 17명을 데리고 시작한 도당굿의 전수가, 올해로 3기생을 맞았습니다.”

 

 

 

 

일일이 소리를 하고 장단을 치는 법 등을 알려주는 승경숙은, 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에게서 춤과 소리를, 전수조교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고 방돌근 선생에게서는 장단 등을 학습했다.

 

“오산은 도당굿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란 생각입니다. 3대 째 재인청의 도대방들이 직접 도당굿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제가 배운 그대로 많은 전수자들에게 전승을 시킬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한 번 도당굿이 옛 모습대로 활성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죠.”

 

열심을 내어 도당굿의 소리와 춤을 배우고 있는 전수생들. 언젠가는 저들이 도당굿의 굿판에 서서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도당굿 제차를 해낼 것이다. 그래서 오산에는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인가 보다.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았더니, 기사 제보를 하겠단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니, 오산에 ‘마등산’이라고 있는데 그 정상 부근에 ‘선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바위야 산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 것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한 마디로 그 바위가 정말 영험하기도 하지만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전설이야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들려주는 이야기에 솔깃해진다. 사실은 이 마등산이라는 산의 지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등산은 모두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1봉으로 가는 능선의 모양이 말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노적산, 배꼽산, 달맞이산, 선바위산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마등산의 딴 이름은 왜 붙었을까?

 

마등산이라는 명칭은 2004년 오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전해지는 명칭 중에서 가장 적합한 명칭으로 정해놓은 이름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산은, 당말의 뒤편 산봉우리가 마치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노적산’이라고 했다. 또한 이 산 봉우리 가운데, 마치 사람의 배꼽처럼 생긴 곳이 있다고 하여 ‘배꼽산’이라고도 불렀다.

 

‘달맞이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말 사람들이 이 산에 올라 달맞이를 했던 것에 연유한다. 이 중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이름이 있다면, ‘선바위산’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선바위란 마등산 정상부근에 마치 돌이 선(=立)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짧은 산행에서 만난 선바위, 그 참 희한하네.

 

제보를 한 박아무개가 거주한다는 오산시 원동 721-1에 소재한 마등사를 찾았다. 이곳은 절이 아니고, ‘마등산 역말굿당’이라는 곳이다. 요즈음은 집에서 굿을 할 수가 없어, 전문적으로 이곳에 들어와 굿을 하는 곳이다. 한 편에 조성한 허궁기도터를 지나 산으로 올랐다. 몇 m 쯤 오르니, 발밑에 토종밤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작은 토종밤들이 윤기가 흐른다. 몇 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시간이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밤을 줍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다. 산봉우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니 무슨 초막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그 밑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가 있고, 그 위로는 몇 개의 바위들이 서 있다. 말 그대로 바위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바위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 바위 중 하나가 보는 방향에 따라, 참 묘하게도 남녀를 상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양성바위(=兩性岩)’라고나 할까? 이곳을 소개한 박아무개의 말마따나, 이 바위가 영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한 마디로 내림을 받는 사람들이 말문이 안 트이면, 이곳 선바위에서 빌면 말문이 터진다는 것이다.

 

 

 

소금 배 세 척을 먹어치운 선바위

 

사실 이 선바위에는 지역에는 전하는 전설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당말에는 제물포에서 소금을 떼어 와서 파는 소금장수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날도 이 소금장수가 제물포로 갔다는데, 소금장수들에게 소금을 파는 구두쇠 영감이 유독 이 소금장수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딴 사람보다 가격도 비싸게 팔았다는 것.

 

당말에서 소금을 사러 간 이 소금장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구두쇠 영감을 골탕 먹이기로 결심하고, 구두쇠 영감이 비싼 값을 부른 것을 알고서도 그 값을 쳐주겠다고 했다는 것. 그는 구두쇠 영감에게 “내 이름은 당말에 사는 선바위요. 지금은 그렇게 큰돈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내가 소금을 싣고 돌아가서 바로 돈을 보내 드리리다”라고 했다.

 

 

구두쇠 영감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소금 배 세척을 내주었다. 그러나 바로 돈을 갖고 오겠다는 소금장수는 영 소식이 없었다. 구두쇠 영감은 화가 나 당말로 선바위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선바위라는 소금장수의 사는 곳을 물었지만,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다만 “저기 노적산 꼭대기에 있는 것이 바로 선바위요”라고 알려주었다는 것.

 

남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구두쇠영감은, 노적산 꼭대기에 소금더미처럼 생긴 바위만 바라보며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 바위에 전하는 전설 때문인지, 이 바위들이 얼핏 바라보면 소금덩이처럼 생기기도 했다. 참 전설이란 그 안에 이런 속 깊은 뜻이 있어서 좋다. 남을 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자신이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오래된 상여가 있다고.

 

선바위를 돌아보고 내려오니, 굿당의 당주인 박아무개가 산자락에 있는 상여막으로 데리고 간다. 아주 오래 된 상여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역말에 있던 것을, 주민들이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970년 초에 이 상여를 손보아 사용했다는 것이다. 분리가 된 상여는 보기에도 100년은 훨씬 지났을 것 같다.

 

“이 상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제대로 맞추어 한 번 사용해 보려고요.”

 

 

오산에는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상여막이다. 전화 한 통을 받고 달려간 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땀을 식히느라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 나오는 내내, 그 양성바위가 눈에서 아른거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바위기운이라도 좀 받아올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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