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여기저기 장작이 쌓여있다. 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보인다. 아직도 과거의 생활모습 그대로를 찾아볼 수가 있는 초가집. 초가집이 '고래 등 같다'고 하면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주로 기와집이 덩그렇게 높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은 초가집이면서도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정원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진다. 넓은 사랑채가 높이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앞을 바라보고 있다. 초가로 만든 작고 소담한 담장에 붙은 일각문이 대문 역할을 하는 정원태 가옥의 안채 역시 초가로 운치 있는 집이다.

 

 

명당에 자리한 초가

 

제천 정원태 가옥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가옥은 전망이 좋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초가집은 전형적인 길지로 알려져 있다. 안채가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앞쪽으로 ㄴ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해, 튼 ㅁ자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의 날개 부분이 짧게 구성되어 있어, 서쪽이 트여져 있다.

 

안채는 작은 부엌과 안방, 윗방, 2칸 대청이 있고, 그 끝에 골방을 - 자 형으로 배치를 했다.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어, 이 건넌방이 집안 살림의 중심 역할을 한다. 현재는 노부부가 집을 관리를 하고 있으며, 이 부부 역시 부엌에 달린 이 건넌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랑채 서쪽은 시원한 2칸 대청이 있고, 한편에는 부엌방과 큰 사랑이 반대편에는 작은 사랑방을 드렸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 부엌이 딸린 방은 앞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안채에 거주하는 여인들을 보호한 사랑채

 

정원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사랑채다. 그 규모는 안채보다도 충실하게 지어졌다. ㄴ자 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부엌을 동쪽에 두고 부엌과 큰사랑, 대청, 작은사랑 순으로 꾸몄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시원하게 꾸며졌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돌출된 방이 있고, 그 방 뒤로 부엌을 달았다. 안채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사랑채의 부엌으로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한 것이다.

 

행랑채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에 부녀자들이 사랑채를 찾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사랑채는 앞이 트여있어 전망이 좋다. 큰 사랑은 앞쪽과 대청 쪽에 문을 달아 바람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작은 사랑방 역시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ㄴ 자로 지은 사랑채는 뒤편으로 돌아가면 서편쪽의 꺾인 부분을 짧게 처리를 하였다. 서쪽이 트여있어 안채의 답답한 점이 없게 꾸몄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꾸며 좌측부터 작은 부엌 사랑방, 대청, 골방을 - 자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드렸다.

 

사랑채의 앞쪽은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내달아 부엌방이 돌출된 곳까지 연결을 하였다. 사랑채는 원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 뒤 스레드로 지붕을 올렸다가, 현재는 초가로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 서쪽 끝에 꺾어진 곳은 광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앞면은 -자로 되어있으며, 뒤편으로 돌아가면 ㄴ자형으로 지어졌다.

 

안채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정원태 가옥의 안채는 꺾어진 부분에 2칸 대청이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앞쪽은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이 툇마루는 끝 작은 부엌의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방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내어 그곳으로 출입을 하게 만들었다. 현재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라는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이용을 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한다.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방안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달았다. 다락의 밑에는 작은 부엌을 꾸몄다.

 

툇마루 끝에 달린 다락의 밑은 작은 부엌이다. 문이 달리지 않은 아궁이를 둔 이 작은 부엌은 고개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가 있지만, 휑한 곳에서 바람을 맞지 않도록 꾸며졌기 때문에 오히려 아늑함을 준다. 정원태 가옥을 둘러보면 부녀자들이 살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짧은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동쪽 밖의 담장과 안채의 사이에는 텃밭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이집을 지을 때 살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투박한 굴뚝이 정감이 간다. 마치 거대한 함포와 같은 모습이다.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도 이 집을 아름답게 보이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함포와 같은 굴뚝,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어

 

정원태 가옥을 들러보다가 뒤뜰로 갔다. 그곳에서 투박한 굴뚝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곳에 함포가 서 있기 때문이다. 황토로 옹기처럼 만들고 그 위에 굴뚝을 세웠다. 그리고 굴뚝을 모두 백회로 발라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함포처럼 보인다. 이렇게 투박한 굴뚝들이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그 굴뚝과 초가와의 조화 때문인 듯하다.

 

이 집은 배수가 잘 된다고 한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물이 차는 법은 없겠지만, 돌로 만들어 놓은 배수로가 집안에 드는 물을 빠르게 밖으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뒤에도 돌로 꾸민 배수로가 있다. 이렇게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가 이 집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집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정원태 가옥의 문은 크지 않다. 담장에 일각문으로 만들어 놓은 초가지붕의 대문이 멋스럽다.

 

 이 집을 찾아갔을 때 사랑채 곁에 놓인 디딜방아도 정원태 가옥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정원태 가옥의 대문은 일각문이다. 아마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이 훤히 트여있어, 대문으로 인한 무거움을 굳이 원하지 않았는가 보다. 담 장 사이에 붙어있는 일각문도 초가를 얹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랑채의 곁에 놓인 디딜방아 공이가 여유를 보이는 것도, 이 가옥의 또 다른 모양새가 아닐까 한다. 초가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정원태 가옥. 일생에 한 번 쯤은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고택을 찾아다닌 것이, 벌써 100번 째 집을 소개하게 되었다. 찾아다닌 곳은 그 이상이지만 그 중에는 소개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싶은 집들도 있었으니, 아마도 150채 정도는 찾아보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번째의 글을 쓰면서 조금은 남다른 집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만난 집은,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573-1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326호인 윤경남 생가이다.

윤경남(1556~1614)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활동을 하신 분이다. 이 고택은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450년 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집의 형태는 깨끗하게 보존이 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 중문채와 대문채가 있다. 아마도 처음에 건립을 했을 때는 이보다 더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군기를 비축했던 집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 의병모집을 했던 선생은, 원래 과거 등에는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경사에 열중한 선생은 문외, 정온 등의 학자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해지자 이 집을 군기를 비축하는데 사용을 했고, 의병을 모집해 나라를 지키고자 노력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당시 벌인 의병 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장수 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는 대사헌의 벼슬이 더해졌다. 도로가에 위치한 윤경남 생가는 한 마디로 자연을 넘어서지 않은 집이란 생각이 든다. 안채는 5칸으로 부엌위에 다락방이 위치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누마루대청 양식을 갖추고 있다.



비탈진 곳을 이용해 건물을 지은 사랑채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ㄱ 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전체를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누정 형태로 집을 지었다. 비탈진 그대로를 이용하기 위해 뒤쪽으로는 축대를 쌓았으며, 앞으로는 누마루 밑에 기둥을 놓아 누각과 같은 형태로 구성을 하였다. 전체를 난간으로 둘러놓아 운치를 더했다.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높이 올라앉은 사랑채는, 계단을 놓아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크지 않은 사랑채의 구성이지만, 그 치목 등을 볼 때 자연을 벗해 살아가려고 했던 집주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계단 위에 마련된 온돌방은 뒤편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한데 아궁이를 두고 있다.





자연석 기단위에 앉은 안채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은 안채는 사랑채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중앙을 조금 비켜 서 좌측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안채는 모두 5칸으로 꾸며졌다. ㄱ 자 형으로 꾸며진 안채는 산을 등지고 안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건넌방이 있다. 그 밑으로 단을 낮춘 두 칸의 부엌과 한 칸의 아랫방이 자리한다. 아랫방의 끝에는 작은 마루를 놓았다.

이 안채 역시 비탈진 곳을 그대로 이용했다. 층이 진 건물은 안채로부터 사랑채에 이르기까지 비탈진 곳을 그대로 이용해, 자연석 기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했다. 사대부가의 당당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윤경남 생가. 마침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안주인 인 듯한 분이 집안 정리를 하고 계신다.



집과 주인의 심성은 닮는다고 했던가?

집을 좀 둘러보겠다고 허락을 받고 여기저기를 돌아보는데, 차나 한 잔 하고 가라고 권유를 하신다. 바깥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난 후 서울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정도 내려와 집을 정리하신단다. 마음 같아서는 오랜 시간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바쁜 답사 일정으로 감사하는 마음만 전하고 돌아서야 했다.

나오는 길에 중문채를 들여다보니 한 편에 디딜방아가 놓여있다. 대개 방아는 대문채에 두는 것이 일상적인데, 중문채에 디딜방아가 놓여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집안 정리를 하다가 이곳에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돌아서 나오는 객을 대문 앞까지 따라나서 인사를 하시는 안주인. 집과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고 했단다. 100번째의 집은 그렇게 기분 좋게 사람을 떠나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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