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티지 소개 영상물 화면 캡쳐 / 동영상 보기 => http://vimeo.com/28499223

 

언젠가 문화재청에 문화재 영상을 올리는 헤리티지 채널이라는 곳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문화재답사를 하는 블로거를 찾다가 나를 취재해서 올리겠다는 것이다. 남을 취재하고 남을 찍을 줄만 알았지 내가 찍힌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카메라를 메고 나타난 PD가 한 이틀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엔 3일이 넘게 찍었지만, 그 첫날인가 답사지에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존재감이라고 대답을 했다. 나에게 있어 문화재란 수천 년 전과 현대를 이어주는 존재이다. 그 존재라는 것이 결국 나를 있게 한 계기였다고 생각을 한다.

 

 

문화재답사가, 딱 망하기 좋은 직업

 

남들은 쉽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답사를 나가서 많은 것을 보니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부럽네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그냥 흘려버리고 만다. 부러울 것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답사라는 것이 그냥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답사에는 그만한 고통이 수반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한가한 사람이 하는 짓거리 정도로 보일 수가 있다.

 

문화재답사를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내가 어느 지역을 찾아간다고 하면, 그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선 내가 무엇을 돌아볼 것인가에 대한 동선을 파악해야 한다. 12일 정도로 떠나는 짧은 기간 중에 가장 많은 것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사 현장을 나가면 그냥 돌아다녀서 될 일이 아니다. 우선은 기름 값만 해도 만만치가 않다. 멀리 나갈 때는 하루에 300km 이상을 돌아야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먹고 잠을 자야한다. 그런 경비가 만만치가 않다. 예전 같으면 12일에 10~15만 원 정도가 소요가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 배 이상의 경비가 필요하다. 문화재답사가란 하면 할수록 망해가는 직업이다.

 

문화재는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

 

그렇게 망해가는 지름길인 문화재답사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바로 존재감이다. 그곳에 천년 혹은 그 이전부터 누군가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된 문화재. 그 곳을 찾아가면 그 장인의 존재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문화재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 수가 있다. 그런 것이 바로 존재감이다.

 

 

가끔 문화재를 찾아가면 이런 글을 본다. ‘손을 대지 말고 눈으로만 보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물론 문화재란 눈으로 감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문화재 답사를 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문화재를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에 대한 학술적인 설명은 인터넷 검색 하나면, 해설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양의 지식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런데 시간을 허비하면서 그런 것을 들어야만 할까? 그런 시간이 정말 아깝다. 그야말로 눈으로만 보는 시각적인 답사로 끝나는 문화재 답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문화재를 만나면 그 문화재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가끔은 전혀 듣지도 못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을 수가 있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그 주변의 주민들을 만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눈으로 본 문화재를 마음으로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고통을 모르는 망해가는 지름길인 문화재답사. 이번 주말엔 또 다른 문화재를 느끼러 바람 부는 길을 따라 나서야 할 것 같다.

 

알립니다 - 사진은 헤리티지에 소개된 영상에서 캡쳐하였습니다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서 이건한 대가집

한국민속촌 안에 들어가면 몇 채 안되는 와가 중 하나가 제9호 집이다. 남부지방의 대가로 불리는 이 집은,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 있던 대가집을 그대로 한국민속촌으로 이건을 한 집이다. 이 집은 가옥 전체에 누마루와 툇마루 등이 고르게 배치가 되어있어, 호남지방의 특유의 집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이 집의 전체적인 꾸밈은 튼 ㅁ 자 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ㄷ 자 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에는 ㄱ 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우측에는 l 자형의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 문간채가 한편을 막고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큰 ㅁ 자가 된다. 이 집의 특징은 집이 상당히 큰 집인데도 불구하고, 아기자기한 면이 돋보이는 집이다.

누마루의 여유, 대가 집의 특징

집안은 한꺼번에 다 소개한다는 것이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다. 특히 ‘고래등 같다’고 표현을 하게 되는 집들은 대개가 그 안에 이야기도 많은 법이다. 그러다 보면 몇 번으로 나누어야 그 집의 모습을 제대로 소개할 수가 있을 듯하다. 한국민속촌의 9호 집 역시 그러한 집 중 한 곳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놓여있는 사랑채. 아마 이 집이 대개집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사랑채 한 채를 갖고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듯하다. 한편을 ㄱ 자로 달아내어 누마루를 놓았다. 누정과 같이 주추위에 기둥을 놓고 땅에서 떨어지듯 조성을 했다. 말은 사랑채의 누마루방이지만, 그대로 정자가 되는 그런 형태이다.

집안 여인들의 편의를 돕는 동선

누마루정에서 사랑채로 들어가는 앞으로는 길게 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그 마루로 인해 모든 방에 연결이 되어진다. 이 대가집의 사랑채는 방을 앞뒤로 나누어 들인 것도 특징이다. 누마루 정자 뒤편으로도 마루를 놓고, 그 안편으로 방을 드렸다. 두 개의 방을 이어놓았으며, 그 다음은 다시 마루를 놓고 두 개의 방을 또 앞뒤로 드렸다.




그리고 부엌은 안채쪽의 사랑채 뒤편에 드리고, 부엌을 드나드는 곳 역시 안채 쪽에 가깝게 붙여놓았다. 이렇게 안채에서 쉽게 사랑채의 부엌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안주인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랑채에 불을 떼거나 손들을 접대하기 쉽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여인들의 동선을 최대한으로 짧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채를 보호하는 작은 배려도 돋보여

전남 무안에서 옮겨 온 이 대가집의 사랑채는 왜 방을 앞뒤로 놓았을까? 외부에서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앞, 뒤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앞쪽의 입구는 집의 주인이 주로 사용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뒤쪽에 자리한 방은 입구를 따로 꾸며 놓았을까? 별도로 방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렇게 안채를 바라보지 않도록 방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집안 여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랑채에 외간 남정네가 묵더라도 안채의 여인들이 신경을 덜 쓰도록 한 것이다. 사랑채에 딸린 부엌도 안채에서 가깝게 한 것이나, 부엌을 출입하는 별도의 길을 마련한 것들도 모두 여인들을 위한 동선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택 한 채를 돌아보는 즐거움. 그 집의 형태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모양새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그 집안만이 갖고 있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고택답사가 즐거운 것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 호남 대가집의 사랑채, 그동안 수많은 탈렌트들이 이곳에 발을 디뎠다.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이 집 민속촌으로 옮긴 덕에 별별 향수내를 다 맡는 듯하다.


우리 고택을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은 비밀스런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비밀스런 곳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다. 대개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채에서 안채를 들어가려면 중문을 이용하게 된다. 중문을 이용하지 않고 안채로 가는 길은, 그 중간에 쪽문인 일각문을 두어 출입을 한다.

그러나 고택 중에는 그런 쪽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채의 뒤쪽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한 곳도 있다. 그런 집들을 보면 괜히 즐거워지는 지는 힘든 답사 길에서 가끔은 혼자 멋대로의 상상을 즐겨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샛길의 용도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샛길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조 사대부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거창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에 소재한 정온선생 생가는, 처음 지은 지가 500여 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정온선생의 생가였고 종택이었다는 하는 이 집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선생의 생몰연대가 조선조 때인 1569~1641년임을 감안한다면, 줄잡아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순조 20년인 1820년에 후손들이 중창을 한 후로 줄곧 자리를 지켜 온 집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의 중요한 자리를 하고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사대부가나 그러하듯 하나 정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정온선생의 생가는 지역의 기후에 맞게 북부지방의 보편적인 결집형태와, 남부지방의 특징인 높은 툇마루를 두어 두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조화를 시키고 있다.



남부지방 사랑채의 전형을 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정원이 있고, 그 뒤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ㄱ 자형인 사랑채는 7칸인 사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방을 두고, 연이어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방과 누정을 두었다. 누정의 경우에는 기단을 쌓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놓아 올린점이 특이하다.

난간을 두른 누정의 지붕은 길게 내달아 겹처마로 꾸며졌으며, 바깥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다. 좌측의 방 앞에 툇마루에도 난간을 두른 것이 사랑채의 멋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특이하며 남부지방 특유의 사랑채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의 주금 비켜선 뒤편으로는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사랑과 안채의 연결구실을 하고 있다.


중문과 광채

정온선생은 조선조에서 충절로 이름이 높은 분이다.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이 되었다. 선생은 함양 남계서원, 제주 귤림서원 등에 배향이 되었다.

높임마루를 놓은 안채의 여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지만, 안채를 막는 바람벽 등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대신 안채를 조금 비켜서 구성한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중문 앞으로는 길게 광채를 놓고, 그 옆으로 - 자 형으로 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두 칸의 부엌에 이어 방과 대청, 그리고 맨 끝에는 한 칸의 높임마루를 둔 방이 있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높임마루는 남부지방의 특징이다.

앞으로는 사랑채의 뒤편이 보이게 지어진 이 안채는 대청을 지나 구성된 건넌방의 툇마루를 높이고, 그 앞을 난간을 둘렀다. 남부지방 특유의 높임마루의 형태로 꾸며진 것이다. 이러한 집의 구성이 색다른 정온선생의 생가는 북부와 남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집의 꾸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은밀한 동선인가? 사랑채 뒤편 터진 담

그런데 안채에서 사랑채 쪽으로 보니 담장이 트여있는 곳이 있다. 대개는 사랑채와 연결을 할 때는 일각문을 두는 법인데, 그대로 담장의 한 편 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랑채 방 뒤편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동선은 대개 어른들이 기거를 하는 사랑에서, 집안의 젊은 남정네들이 안채에 있는 젊은 새댁을 보러가기 편하게 꾸미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물과 사랑채 뒤편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동선이 있다.
 
더구나 안방에 안주인이 기거를 한다면, 건넌방을 새댁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뒤편에서 중문채에 기거하는 식솔들을 피해, 바로 안채 건넌방으로 갈 수가 있다. 옛 사대부가에 보면 가끔 이런 동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뒤편으로 난 방문에서 댓돌을 찾아보는 것은 그런 은밀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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