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로 지정이 된 대웅전.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지은 전각이라고 한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먼저 화려함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 제49호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의 그런 편견을 깨고 있다. 어디에도 칠을 한 흔적이 없이 목재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재위 시에 창건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위덕왕은 44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에, 왕흥사라는 호국사찰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관한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전사를 하자, 아들 창(위덕왕)은 승려가 되려고 하였으나, 즉위를 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의 주심포 양식인 대웅전

 

하지만 덕숭산 수덕사는 백제 후기에 숭제법사가 처음으로 절을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덕숭산 수덕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대웅전에 대한 기록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 된 묵서의 내용으로 인해 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잘 다듬은 8단의 바른 돌쌓기로 쌓은 장대석 위에 올려 세웠다. 양편으로는 난간을 놓은 계단이 있으며, 건물은 고려 때의 양식인 주심포 양식이다. 정면 3,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꾸민 대웅전은, 사각형의 자연석 주초를 이용했다.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조성했으며, 정면에는 빗살 삼분합문으로 꾸몄다.

 

 

단청을 하지 않은 고졸한 건축양식

 

국보라서 칠을 하지 않았나?”

아냐, 국보도 칠을 한 것이 있던데

그럼 왜 이렇게 그냥 놓아두었지? 이러면 오래가지 않을 텐데

 

대웅전을 구경하던 관광객들이 하는 말이다. 요즈음은 주말을 맞아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점점 문화재에 관심이 높아진 듯하다. 수덕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졸한 멋을 풍긴다.

 

9일 오전에 찾아간 수덕사 대웅전에는 수능을 볼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이 찾아들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괜히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 남들이 열심히 자녀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방해라도 될까해서이다.

 

 

조성을 한 형태가 아름다운 수덕사 대웅전, 맞배지붕 안으로 보이는 장식적인 요소가 색다르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니 3칸 벽면에 모두 문을 내었는데 양편에는 문을 장식하고 가운데만 널문을 달았다. 외부로 나타난 목재는 그대로 나무의 재질이 들어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백제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수덕사 대웅전. 건축 당시의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웅전 안을 들여다본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와 약사불을 협시불로 모셔놓았다.

 

대웅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서원을 위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기가 죄스러워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다가 뒤돌아선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만난 신라 때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는 삼층석탑에도 누군가 합장을 하고 열심히 탑돌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단풍이 짙게 든 경내에서 여기저기 모여 사진촬영을 하기에 바쁜데, 천년세월을 그렇게 버텨 온 고졸한 멋을 풍기는 대웅전은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올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산길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아주 오래 전 송춘희라는 여가수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가요 제목을 가진 노래이다. 수덕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 노래 때문인가? 먼저 비구니인 여승을 떠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수덕사는 비구니 절이 아니다. 아마도 이 노래 때문에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주변에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된 선원인 정혜사와 비구니 강원인 견성암이 있다.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이 견성암의 비구니들 대문으로 보인다. 노래 하나가 사람들의 생각을 고착시켜 버린 것이다.

 

아마 이 노래가 처음 불려 질 때인 1966년에는 수덕사가 인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이 몰려든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차들로 가득하고, 입구에는 장사꾼들이 갖은 상품을 진열하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가요도 이제 가사가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수덕도령의 애끓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

 

7월 28일(일)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보면 좋다고 했던가? 딱히 무엇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절집에서 세 곳을 돌아오면 좋다고 하니 길을 따라 나섰다. 그 두 번째로 찾아간 예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덕산향토지>에 보면 수덕사의 창건설화가 실려 있다.

「홍주마을에는 수덕이란 도령이 살고 있었다. 이 수덕이라는 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수덕도령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덕숭이라는 낭자에게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가문이 좋아도 상사병을 앓는 것인지? 수덕도령은 애를 태우다 못해 덕숭낭자에게 여러 번 청혼을 했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고 한다.

 

수덕도령이 하도 끈질기게 청혼을 하자 덕숭낭자는 자신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날부터 수덕도령은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지 절을 빨리 짓고 덕숭낭자를 품을 생각을 한 탐욕 때문에 벌을 완성하자 불이 나버렸다. 다시 절을 짓기 시작한 수덕도령은 이번에도 덕숭낭자를 그리워했기에 또 불이 나 버렸다.

 

세 번째는 오직 절을 지을 것만을 생각하고 열심을 내었다. 그 때문인지 절이 완공이 되었다. 함께 살 것을 허락한 덕숭낭자였지만,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오직 덕숭낭자만을 그리며 절을 지은 수덕도령. 그만 참을 수가 없어 덕숭낭자를 안아버렸다. 그 순간 뇌성벽력이 치면서 덕숭낭자는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덕도령의 손에는 버선 한 짝만이 들려있었단다.

 

덕숭낭자를 끌어안았던 자리는 큰 바위로 변하고 그 자리에는 하얀 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버선꽃(물단초)’이라고 부른다. 덕숭낭자는 바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 부르고, 산 이름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했으며, 지금도 ‘덕숭산 수덕사’라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전설과 수덕사의 중창 내력을 보면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태여 짜 맞추기 식의 논리를 펼 것은 아니지만, 혼자 생각에 젖어 고뇌를 한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귀퉁이 깨진 삼층석탑, 그런데 왜 이렇게 끌리지?

 

일주문을 지나 수덕사 경내로 들어서 대웅전을 찾아가면 그 앞에 탑이 한 기 서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이 삼층석탑의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인 상륜부를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양 옆에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기단에는 가운에 탱주를 새겼다.

 

높이 410cm의 이 삼층석탑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상륜부는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머리장식받침인 노반이 있고, 그 위로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인 보륜과 보개를 올려놓았다.

 

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삼층석탑은 1층과 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이 탑은 통일신라 문무왕 5년인 665년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탑의 모양을 보면 오히려 통일신라 석탑 전성기에 비해 몸돌의 가운데 기둥인 탱주가 생략된 점이나, 지붕돌의 받침이 4단인 점을 볼 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탑이다. 수덕사의 삼층석탑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남아 아름다운 석탑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이 수덕사의 깨진 석탑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 때문일까? 아니면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 때문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고나서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다. 하긴 저 깨진 채로 서 있는 삼층석탑도 참 바보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처음 이 탑을 조성할 때 저렇게 귀퉁이가 깨진 채로 사람들을 만날 것을 누가 알았으리요.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줄도 모르겠다. 저 탑이나 나나 다 깨어진 채로 세상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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