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8일은 음력으로 5월 5일로 이 날을 ‘단오(端午)’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수리’라고 부르며,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부른다. 단오는 우리민족에게는 4대 명절의 하나로 친다. 즉 설날과 추석, 동지와 단오가 그것이다. 경기지방의 각 가정에서는 ‘단오다례’라고 하여, 아침 일찍음식을 장만하여 가묘에 제를 올린다.

 

이날은 남녀가 다 새 옷을 갈아입고 서로 모여서 하루를 즐기고는 했다. 요즈음이야 음력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사람들이 단오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오절의 의례가 다 사라져 버렸다. <동경세시기>에 보면 단오를 속명에 ‘술의일(戌衣日)’이라고 하여서, 술의는 곧 차(車), 수레를 뜻한다고 하였다.

 

 

단오날에는 쑥을 따다가 잘 찧어서 팥가루에 넣고 푸른빛이 나게 하여 수레바퀴 형상으로 만들어 먹음으로 수릿날이라고 한다고 했다. 단오를 천중절이라 함은 이 날 일 년 중에서 태양이 하늘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양기가 가장 왕성한 때이므로 천중절이라 불렀다.

 

단오절에 행하는 놀이

 

예부터 단오 날은 많은 행사가 있었다. 우선 단오 날에 사람들이 즐겨하던 놀이로는 창포에 머리를 감기와 그네타기, 그리고 씨름이 있다. 단오 날에는 밭에 나가 창포를 뿌리 채 뽑아다가, 그것을 삶아서 그 물에 머리를 감는다. 단오 날 창포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 윤기가 나고,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창포의 뿌리로는 비녀를 만들어 그곳에 복(福)자나 수(壽)자를 쓰고 끝에 연지를 발라 머리에 꽂고 다녔다. 이를 ‘단오장(端午粧)’이라고 불렀다.

 

그네뛰기는 ‘추천’이라고 한다. 단오 날에 전국 각지에는 큰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고, 그네뛰기를 즐겼다. 그네뛰기는 혼자 타면 외그네요, 둘이 타면 쌍그네가 된다. 고려사에 보면 고려 때는 이 그네뛰기가 전국적으로 매우 성행했음을 적고 있다. <천보유사>에는 한식에 궁중에서 추천 경기를 하니, 이를 ‘반선지희’라 부른다 하였다.

 

 

추천이 여자들의 놀이라면 씨름은 남자들의 놀이이다. 각저, 각희, 각력, 상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씨름은, 고려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씨름은 오른손으로 다리샅바를 잡고, 왼손으로는 허리샅바를 잡는다. 씨름의 기술에는 ‘손재간’, ‘다리재간’. ’허리재간‘ 등 세 가지로 크게 구분을 하는데, 단오 날 씨름에서 판막음(우승)을 한 사람에게는 황소가 한 마리 주어졌다.

 

이날 씨름판은 먼저 열 대여섯살 정도 먹은 아이들이 먼저 나와서 씨름을 하게 되는데, 이를 ‘아기씨름’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총각마구리’리고 하여서 젊은 총각들이 나와서 재간을 겨룬 다음, 맨 끝에 ‘소걸이’라고 하여서 정말 꾼들이 나와 재간을 겨루게 된다. 이러한 단오 날에 볼 수 있는 많은 놀이들이 사라져버린 것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단오부채와 천중부적(天中符籍)

 

예전 조선조 말까지만 해도 단오 날이 되면 공조에서 부채를 만들어 진상을 하였으니, 이를 재상과 모든 신하들에게 ‘단오부채’라 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 때 큰 부채는 50살이나 40살 정도의 살을 가진 큰 부채를 주었는데,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그 부채에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그리거나 도화, 산수, 부용, 백로 등을 그려 넣었다.

 

공조에서 뿐이 아니라 영남과 호남 등 각 고을에서도 부채를 만들어 궁에 진상을 하였다. 이렇게 지방에서 진상을 하는 부채 중에서도 전주 남평과 나주의 부채를 가장 으뜸을 쳤다. 부채의 종류도 다양하여 승두선, 어두선, 사두선, 반죽선, 내각선, 단목선, 합죽선, 신각선, 소각선, 죽절선, 태극선 등 다양한 종류의 부채가 있었다.

 

단오 날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불길한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주사로 벽사문을 지어서 문 위에 붙이는데 이것을 ‘천중부적’이라고 하였다. 이 단오 날 부치는 부적을 ‘단오부’리고도 했는데, 옛날 관상감에서는 해마다 단오일에 주사로 부적을 써서 궐내에 올렸다.

 

 

수원의 단오절 행사

 

지난 8일, 수원시 영통 단오어린이 공원에서 개최된 제9회 영통청명단오제가 3천 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매탄2동과 태장동 사물놀이의 흥겨운 가락이 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며,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아래서는 당산제가 열렸다. 당산제는 전통의 맥을 잇고 올 한해 주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것이다.

 

당산제를 마친 다음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최희순 영통구청장 및 주민들이 당산나무에 막걸리 주기 의식도 베풀어졌다. 오래된 나무에 막걸리를 부어주는 것은, 나무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함이다.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소재한 임 아트갤러리에서는 단오 하루 전인 6월 7일부터 6월 23일까지 김승호, 홍영표 두 화가의 부채전이 열리고 있다. 이 부채전은 ‘합죽선 위에 핀 봄 향기’라는 부제로 열리고 있으며, 문인화와 수묵화를 부채에 담아준다고 하니, 단오 절기를 맞아 합죽선의 관람을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수원 영통구 제8회 영통청명단오제를 가다

 

“내년(2013)이 우리 영통구청이 개청을 한지 꼭 1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알차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행사를 알차게 꾸밀 생각입니다. 지난 해는 3,000명 정도가 행사장에 참석을 했는데, 올해는 한 3,500명 정도가 다녀갈 듯합니다. 벌써 8회째를 맞이한 영통 청명단오제는 지역주민들이 참석하는 단오제의 보존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2년 6월 23일(토) 오전 9시 30분부터 수원시 영통구 건영4차 아파트 앞에 마련된 영통 단오어린이 공원의 행사장. 수령 530년이 지난 느티나무 아래서 만난 김영규 수원시 영통구청장은 매년 다르게 변해가는 청명단오제를 내년에는 수원시에 건의를 하여,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축제를 만들겠다고 한다.

 

 

 

오래 전통 속에 녹아있는 청명 단오제

 

영통구의 청명단오제는 원래 예전에는 마을에 있는 당나무 아래에서, 지역에 거주하는 최모만신이 주관을 하여 ‘단오굿’을 펼치던 곳이다. 그러나 40여 년 전 굿을 주관하던 최모만신이 세상을 떠나자 중단이 되었던 것을, 지역의 주민들이 청명단오제로 재현을 하였다. 청명단오제는 예전에 농촌이었던 영통구 일원에 살던 주민들이 모심기를 마치고, 단오장을 연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단오장은 농촌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날이다. 일 년 중 가장 기운이 왕성한 날이라고 해서, 이날은 집안에서 일을 하는 머슴들을 하루 쉬게 하고 장에 나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단오장에서는 항상 씨름판이 열리게 되며, 마을에서는 풍물패를 초청해 한바탕 난장을 벌리기도 했다.

 

 

 

이 날의 행사는 9시 30분에 느티나무인 당산목 아래서 제례의식인 당산제로 시작이 되었다. 식전행사로는 부채춤과 영통구의 실버합창단 등이 출연해 축하를 해주었으며, 식후에는 난타와 춤, 섹소폰 연주 등이 열기를 더했다. 주민들이 참여하는 각종 민속경기로는 그네뛰기, 팔씨름, 씨름, 줄넘기, 굴렁쇠굴리기, 새끼꼬기 등 잊혀 가는 우리 민속을 재현하는 놀이를 펼쳐 주민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지역주민들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아름다운 축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동안 살아오던 영통구는, 1994년부터 영통, 영덕지구 신사가지가 형성이 되면서 수원에서는 가장 번화한 도심으로 변화하였다. 이런 영통구에는 외지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농촌지역에서 흔히 놀이로 인해 창출이 되는 공동체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당산제에 아헌관으로 참가를 한 경기도의회 안혜영의원(위) 식전행사로 펼쳐진 부채춤


이런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마련한 것이 바로 청면단오제이다. 행사장에는 나이가 드신 분들보다 30~40대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활기찬 젊은 영통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통구는 수원시 중에서도 가장 젊은 층이 생활을 하는 곳이다. 거기다가 광교신도시에 모든 사람들이 입주를 하고나면, 그야말로 수원의 가장 번화하고 젊은 명품도시로 거듭날 수가 있다. 당산제에 아헌관으로 참가를 한 경기도의회 안혜영 의원은

 

“우리 영통은 사람이 살기 좋은 명품도시입니다. 이제는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변화를 하면서 자칫 잊기 쉬운 우리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나아가 이곳에 뿌리를 내린 모든 구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영통을 만들기 위한 축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축제는 앞으로 영통이라는 명품도시를 전국적으로 가장 가볼만한 축제로 키워나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 등위에 타고가는 젊은 엄마(위)와 식후행사로 펼쳐진 난타공연


행사장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소달구지에 올라탄 아이들이 소리를 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극성스런 어머니들은 직접 소 등에 올라타고 행사장을 돌기도 해,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축제를 만나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축제에도 ‘옥에 티’는 있는 법. 행사장에 간이화장실조차 준비가 되지 않아, 아파트 관리동이나 상가의 화장실까지 멀리 다녀야 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또한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 진행에 미숙한 점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이런 점은 축제를 진행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앞으로 축제의 진행을 함에 있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답사를 하면서 만나는 많은 나무들. 그 중에는 천연기념물도 있고, 지방에서 지정된 기념물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호수도 있고, 아예 아무런 지정도 받지 못한 나무도 있다. 아직 나도 그 지정의 가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왜 천연기념물과 기념물로 나누이는지, 수령이 오랜데도 지정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등은 늘 궁금하다.

천연기념물이란 자연 가운데 학술, 자연사, 지리학적으로 중요하거나, 그것이 가진 희귀성, 고유성, 심미성 때문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여 법률로 규정한 개체 창조물이나 특이 현상, 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한 구역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식물을 주체로 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노거수가 124건으로 1그루씩 지정된 것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수종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종(樹種)으로는 은행나무가 가장 많은 19건이다. 이어 소나무종류가 처진소나무와 반송을 합해 18건이지만, 곰솔까지 포함을 한다면 24건으로 가장 많다. 그만큼 다양한 소나무가 지정을 받았다. 다음으로 느티나무 종류가 12건 등이며, 백송과 이팝나무, 향나무가 각 8건 정도이다.

귀한 몸으로 지정을 받은 나무의 종류는 다양하다. 회화나무와 털왕버들을 포함한 왕버들류, 비자나무, 푸조나무, 후박나무, 옴나무, 탱자나무, 팽나무, 망개나무, 측백, 갈참나무, 회향목, 올벗나무 등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외에도 특별한 것으로는 송악, 소태나무, 등나무, 배롱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 등의 조금은 생소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고창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9월 4일, 전북 고창군 지역을 답사하는 날은 이상하게 나무들만 만났다. 답사를 며칠 나가야 거목 한 그루를 보는 것이 보통인데, 이날은 열 그루에 가까운 나무들을 만난 것이다. 그 중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446번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멀리서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나는 그냥 얼어붙고 말았다.

천연기념물 제494호, 고창 수동리 팽나무. 멀리서 보이는 이 나무는 마치 우산을 쓴 모습이다. 나무의 생김새가 멀리서보아도 아름답다. 폭나무, 포구나무라고도 부른다는 팽나무 한 그루. 어딜 찾아보아도 이 나무가 도대체 몇 백년이나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아주 오래 묵었다는 것 밖에는.



한 걸음에 달려가 본다.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다. 팽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염소를 매어 놓은 줄에 걸린 것이다. 그 염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에 푹 빠져버렸다. 나무 가까이 기서 본다. 외과수술을 한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생육이 좋은 나무이다. 어떻게 이런 나무가 있을 수가 있나, 그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팽나무라 쓰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 읽는다.

수동리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이곳이 바닷가였다고 한다. 간척지로 매립을 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배를 묶어두기도 했다니, 변해버린 주변 경관이 아쉽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을까?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지고, 높지 않은 둔덕위에 팽나무가 자리를 하고 있다. 지금도 그림 같은 모습인데, 예전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수동리의 팽나무는 8월 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당산제와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를 이 나무아래 모여 기원하던 당산나무라는 것이다. 오래도록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수동리 팽나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팽나무들 중에서, 가슴높이의 둘레가 가장 크며 수형이 아름답다고 한다. 수세 역시 좋은 편이어서 팽나무 종을 대표할 만하다.

나무 주변을 돌아본다. 보면 볼수록 이 나무에 빠져든다. 한편으로는 멀리 산줄기를 바라보고, 예전 바닷물이 들던 곳은 가슴이 시원하게 터질 수 있는 들판이다. 나무는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 줄기 여기저기 이상한 형상으로 옹이가 뒤틀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밑동 움푹한 곳에는 나무 스스로가 이름 모를 버섯을 키우고 있다.

나무 밑동에 붉은 옷을 입고 서있는 사람이 키 180cm의 건장한 남자이다. 비교를 해보면 팽나무의 크기와 굵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나무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수동리 팽나무를 보는 순간, 몇 날을 이야기를 해도 다 하지 못할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 난 이 나무를 그렇게 불렀다.

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장맛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뿌려댄다. 일기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꽤 많은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주에 볼일을 보아야하니, 후줄근하지만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은 했지만 이 빗길에 어찌해야 할지.

몇 곳을 들려 당동 당산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거창 가조면 소재지에서 가북면 방향 지방도 1099호 선을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사병리 당동마을이 나온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당산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인에게 그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몇 분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마을 뒤편에 자리한 당산을 찾았다.



당산은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거처

‘당산(堂山)’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당산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일제치하에서 문화말살정책을 편 것도, 그 한편에는 당산이 갖는 공동체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당산에 모여 정성을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끈끈한 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다산을 기원하던 곳인 당산. 그 당산에서 이루어지는 기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당산은 우리의 마음의 거처이기도 했다.

당동마을 당산을 찾아가다

비는 잠시 멈춘 듯하다. 그러나 논둑길에 자란 풀들이 다리를 휘감는다. 빗물에 젖은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니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돌담을 쌓은 안에 작은 집 한 칸이 바로 당동마을 당집이다. 옆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라도 되는 듯.

당동마을 당산제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숱한 세월을 당동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를 잡아 온 것이다. 이 당산은 철종 9년인 1858년과 고종 15년인 1878년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1858년에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동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하루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제관을 정한다고 한다. 보름이 되면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산, 금귀봉, 박유산, 장군봉의 산신께 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제를 올린다. 당동 당산은 경남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당산을 만나 마음을 내려놓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당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어본다, 한 칸 남짓 돌과 흙으로 지어진 당집 주변에는 금줄이 여러 겹 쳐져있다. 이 당동 당산제에서는 닭피를 뿌린다고 한다. 당집 안에는 간소하다. 벽에 걸린 선반에는 ‘당사중수기’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밑에는 촛불과 향을 피웠던 그릇들이 있다. 당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 주민들만 아니라 아마도 무속인들도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 것인지. 소나무 가지와 금줄에 오색천에 걸려있다. 당집을 찬찬히 돌아본 후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 한 자락 이곳에 내려놓고 가고 싶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는 당동마을 당산이다. 그 안에 마음 하나두고 빗길을 돌아선다.

전남 담양군 무정면 면소재지에서 무정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안으로 들어가면 봉안리 슬지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높이가 33m 에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마을 가운데 서 있다. 봉안리 1043~3번지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82호이다.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로 명명된 이 은행나무는, 가슴 높이의 둘레는 8.5m 가 넘는 거대한 나무로, 마을 외곽 네 방위에 있는 느티나무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여겨진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밑 부분에서 2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는데, 작은 줄기는 근원부에서 발생해 생장한 것으로 보이며, 큰 줄기는 지상 2m 부위에서 11개의 줄기로 갈라져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산 위에서 바라본 슬지마을과 마을 한 가운데 서 있는 천연기념물인 봉안리 은행나무 


겉모습만으로도 당당한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확장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단히 장엄하게 보인다. 당당한 풍채의 수형을 자랑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철이 되면 나무 밑에 떨어진 은행이 상당량이 쌓인다고 한다. 실제로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은행나무의 주위에는, 지난 해 떨어져 마른 은행열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은행나무 밑 그늘에는 마을 여자 분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사를 하고 은행나무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

“은행나무 밑에 금줄이 쳐져 있네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나요?”
“예,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냅니다.”
“제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당산제라고 하죠. 여긴 추석 때도 행사를 해요. 구경 와요”


수령 500년이 지난 봉안리 은행나무와 지난 해 떨어져 나무주변에 수북히 쌓인 은행


“이 나무 죽으면 안된 당께”

나무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마을 분들은 묻는 대로 대답을 해주신다. 이중의 원형단을 쌓아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봉안리 은행나무. 한 분이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큰일이라고 하신다.

“이 나무 이제 죽은 나무에 제사 지내게 생겼어”
“왜요? 나무가 50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왜 죽어요?”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고 사람들이 그래요. 그래서 위에서 무슨 약을 뿌리더라고“
“약이 아니고 나무에 주는 영양제에요.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딴 나무에 비해 잎이 무성히 달리지는 않은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생육상태는 좋은 듯한데, 위편의 은행잎이 충실치 못한 듯도 하다. 아마도 나무가 오랜 고목이 되다보니, 위편 가지에 생육이 조금 부실한가 보다. 나무의 밑동은 뿌리가 땅 위로 솟아날 만큼 세월의 연륜을 느끼는 고목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벌들도 공생하는 신령한 나무

봉안리 은행나무는 신령한 나무로 소문이 나 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한일합병과 8,15 광복, 한국전쟁 등, 나라에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마을 주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상당히 신령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가 있어 마을에 지금까지 도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무를 한 바퀴 돌아가 보니 어디선가 벌들이 날아온다. 가만히 보니 나무줄기가 갈라진 틈에 벌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벌들이 그 틈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은행나무에 벌들이 집을 지었네요.”
“오래되었어요. 꿀이 많을 때는 밖으로 흘러내리기도 하는데”
“한봉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은행나무 당산님이 벌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의 갈라진 틈새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발들에게 속을 내줄 만큼 속이 넓은 천연기념물. 그래서 오래 묵은 나무는 그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하시는가 보다. 듣는 소리마다 신기하다. 500년 넘는 세월을 봉안리 슬지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 온 은행나무. 부디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마도 마을 주민들의 간절함이 있어. 절대도 별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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